아키타이프, 한비자의 설명방식
전국시대 때 일이다. 조나라는 거북 등에 구멍을 뚫고 서죽(筮竹)으로 점을 쳤다. 대길이라는 점괘가 나오자 점괘만 믿고 연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오히려 조나라는 영토가 깎이고 군대는 치욕을 당하였으며 군주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진나라도 똑같이 대길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조나라와 달리 진나라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혀 큰 이익을 보았다.
한쪽의 거북이는 영험하고 한쪽의 거북이는 사람을 속였던 것일까? 아닐 것이다. 사람이 문제지 거북이 등껍질이 무슨 죄가 있을까. 한비자 식사(飾邪) 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한비자는 해당 편에서 주술적 사고와 미신적 사고를 집중 성토했다. 한비자에게는 주술적, 미신적 사고는 반드시 버려야할 것이었다. 비합리적 사고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역시 없다.
반드시 유용지식만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이 한비자의 생각인데 한비자의 텍스트를 보면 아키타이프(archetype)라는 설명형식이 있다. 한비자만의 레토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형적인 틀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의 무서운 현실주의가 반영된 부분이다.
- 십과(十過), 군주가 자신을 망치고 나라를 잃는 원인을 열 가지 유형으로 설명
- 오두(五蠹), 나라 안에 존재하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들로서 국가의 혼란을 조장하는 자들의 행태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설명
- 삼수(三守),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가 반드시 지켜야 할 세 가지 요긴한 일을 설명
- 팔경(八經), 천하를 다스리는 자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여덟 가지 통치 원칙을 설명
- 육미(六微), 군주가 명확히 꿰뚫어 보아야 할 여섯 가지 기미를 설명
한비자의 전형적인 주장 전개 방식이다. 7대 항목, 6가지 범주. 이렇게 늘 유형화 시켜서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것을 아키타이프라고 한다. 왜 한비자는 유형적인 설명방식을 즐긴 것일까? 바로 인식의 사각지대를 좁히기 위해서이다. 막연하게 보면 막연하게 보일 수밖에 없고 놓치는 부분, 보지 못하는 영역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 사태에 접근할 때는 문제를 분석해서 보게끔 도와주는 틀과 툴(tool)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인식의 사각지대를 줄일 수 있다. 유형적인 접근과 정리는 사각지대의 최소화를 도와준다. 그리고 유형적인 접근 뒤에는 실용지식을 추구함이라는 목적도 있다.
범주화 되지 못한 지식과 자료, 정보는 내 것이 아니다. 카테고리화 시켜놓아야 내 것이 되고 나의 자산이 되고 언제든 당장 써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현장에서, 실전에서 활용이 가능한 유용지식이 되는데 추상적이기만 하고 분류되지 못한 것은 아무리 해박하게 들려도 많은 양을 자랑해도 쓸모없는 지식이 되기 십상이다. 지난 칼럼에서 말한 대로 고난의 땅 중원에서 무용지식을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인식의 사각지대를 좁히지 못하고서는 생존과 부국강병을 도모할 수 있을까? 특히 지도자가, 리더가 현상을 보는데 있어 인식의 사각지대가 넓고 유용지식을 추구하는 법을 모른다면 험난한 땅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비자는 지정학적 이유만이 아니라 궁중사회라는 배경 때문에 더욱 그것들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비자가 살았던 전국시대 때 궁중사회는 정말 무서운 곳이었다. 군주의 권력은 침탈당하기 십상이었고 권력의 경쟁자들로 주변이 둘러 쌓여 있었다, 자식과 부인, 첩도 권력의 경쟁자일 수밖에 없었는데 인식의 사각지대가 많아지면 권력에 누수가 생기고 침해당한다. 당대에는 국왕이 단독의 주권자였다. 그런 시대에 국왕의 권력이 다른 신하와 궁중사회의 실세에 뺏긴다면 그것은 국정농단 그 자체이며 국력은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비자는 미신적 사고를 배격했고 사실만을 추구하고 쓸 수 있는 지식만을 가지려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며 분석의 틀을 제시하며 유형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한 것이다. 그런데 실사구시적인 인식의 자세는 당대의 군주에게만 필요한 자세가 아닐 것이다. 현실에서 경쟁에 부대끼는 우리들에게 특히 지금처럼 정보의 홍수, 빅데이터 시대에 모두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인 것이 문제다.
한국병의 근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 그리고 현실을 늘 분석하려고 하는 것, 우리에게는 항상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특히 관념적 정의로 세상을 보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관념적 정의의 창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유교의 잔재인데, 유교라는 것은 단순히 생활상의 관습과 도덕, 윤리만이 아니다. 아직도 현실을 마주하는 인식의 틀 자체를 유교가 많이 지배하는데 선과 악, 군자와 소인, 정(正)과 사(邪),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에 많이 익숙하다. 지금 정치권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집권세력인 386운동권 엘리트들을 보면 위정척사적 관념에 투철하다. 그들이 다른 정치세력을 타협과 거래, 설득의 대상으로 보는가, 아니면 섬멸과 척결해야할 대상으로 보는가? 그들에게서 조선시대 사대부, 특히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환영을 느끼는데 사실 그들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유교적 이분법에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고, 유교를 털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가지는 관념적 정의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릴 때가 많다.
그리고 관념적 정의의 세계에 빠져 사는 그 병만이 문제가 아니다. 고유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지조에 끌리고 과거사를 통해 피아를 규정하려고 하는 문제도 있다. 그런 사고의 문제도 유교적 사고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닌데 이분법적 세계인식, 유연하지 못한 인식의 틀, 그런 사고와 인식의 관성이 아직도 우리에게는 너무도 강하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에게 실사구시와 입체적 분석의 세계로 가라고 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한다. 기존의 사고방식과 인식의 틀이 득이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세계인식과 사고방식의 경직성은 우리에게 손해만 주지 조금도 이득을 주진 못한다.
관념적 정의, 다른 말로 하면 명분에 함몰된 지적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립주의적 세계 인식과 더불어서 한국병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병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한비자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은 어떨까? 법가적 사고로 무장하면 어떨까 말이다. 늘 사실의 기초 위에 서려고 하고 입체적 분석의 자세를 늘 가져가려고 해야 할텐데.
사실 유가와 법가는 상극의 정신세계다. 유구한 세월 동안 치열하게 서로 사상 투쟁을 벌였다. 그런데 유가적 세계관에 장시간 살아왔고 아직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인들에게 법가적 사고로 무장하라?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이제라도 관념적 정의의 세계, 경직된 사고의 틀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어떨까?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 내일은 지금보다 잘 살아야하니까. 아직 이르지만 다가오는 새해는 한국병에서 탈출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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