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에 155인의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 법안'은 줄곧 논란들을 불렀다. 이 법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하고 시급한 일을 다루었다고 믿고,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큰 문제들을 여럿 안았다고 여긴다. 친일 행위가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이 괴로운 역사적 사건이고, 자연히, 우리로선 차분히 마주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그러한 논란들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냉정하게 따져서 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이 법안을 살피는 데서 우리가 꼭 인식해야 할 점은 이 법안이 규정한 일들이 본질적으로 범죄들에 대한 재판의 성격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진상을 정부차원에서 규명하기 위하여 특별법을 마련하고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의 진상을 조사한 후 그 결과를 사료로 남겨둠으로써 왜곡된 역사와 민족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 이를 후세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것임"이라는 '제안 이유'의 구절에서 이 점이 또렷이 드러난다. 친일 행위들을 한 사람들이 이미 거의 다 죽었으므로, 그들에게 신체적, 재산적 벌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 법안에 따라 한번 '반민족행위자'라는 판정을 받으면, 그는 "후세의 교훈"의 대상이 되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치욕을 안게 된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도 물론 큰 괴로움을 받을 터이다. 따라서 이 법안은 명목적으로는 "반민족행위의 진상을 조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민족행위'들에 대한 궐석 재판을 목적으로 삼은 셈이다.
실질적으로는 재판이지만 명목적으로는 그저 "진상 규명"을 목적으로 내걸었다는 데에 이 법안의 본질적 문제가 있다. 정식 형사 재판에선 기소된 피고들의 권리를 최대한으로 보호하기 위한 장치들이 마련된다. 무엇보다도, 피고는 스스로 또는 소송대리인을 통해서 자신을 변호할 수 있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재판에 관한 법안이 아니므로, 이 법안은 그러한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무고한 사람들이 시달림을 받고 큰 오욕을 뒤집어쓸 가능성에 대한 걱정이나 그런 걱정을 줄일 규정은 마련되지 않았다.
이 법안의 타당성에 대한 판단을 떠나서, 이 법안이 일단 절차적 정의에 너무 소홀했고 따라서 최소한의 절차적 정의를 확보할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만일 이 법안에 따라 '반민족행위'를 했다고 여겨져서 "진상 조사"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을 대리해서 변호할 사람들을, 예를 들면 한국 근대사에 정통한 학자들을, 정부가 자신의 자금을 들여 찾아준다면, 이 문제의 심각성은 상당히 누그러질 터이다. 여기서 우리는 절차적 정의가 분쟁 해결에서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마틴 골딩(Martin P. Golding)의 표현을 빌리면, "공평의 표준들의 준수는 분쟁들의 조정을 돕는다 (adherence to standards of fairness promotes the settlement of disputes)."[법철학 (Philosophy of Law)] 많은 논란이 있고 공정성과 타당성에 대한 이의들이 끊임없이 제기된 친일 문제의 처리에선, 절차적 정의의 확보는 사회적 논란을 줄이고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특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어 우리는 이 법안이 1948년 9월에 공포된 '반민족행위처벌법 (반민법)'과 실질적으로 아주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이 점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드물지만, 이 점은 근본적 중요성을 지녔다.
먼저, '반민법'과 이 법안은 목적이 동일하다. 둘 다 '반민족행위'들을 처벌함으로써 사회 정의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웠다. 다르다면, 이제 처벌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이 법안은 당사자들의 명예에 벌을 준다는 점뿐이다.
다음엔, 대상이 동일하다. 이 법안은 25 가지 행위들을 '친일반민족행위'들로 규정했다. 그것들 대부분이 1948년의 '반민법'에서 '죄'로 규정한 행위들이다.
1항 "우리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토벌하거나 토벌하도록 명령 또는 권유한 행위", 2항 "우리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한 단체나 개인의 활동을 방해한 행위", 3항 "독립운동자 및 그 가족을 체포. 살상. 학대. 처형하거나 이를 지휘한 행위", 그리고 4항 "독립운동을 저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에서 간부 및 직원으로 활동한 행위"는 '반민법' 제3조 "일본 치하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와 제4조 5항 "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 간부로 활동하였던 자"를 부연한 것이다.
5항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저해한 행위"는 '반민법' 제4조 5항 "밀정 행위로 독립 운동을 방해한 자"와 같다.
6항 "을사조약. 한일합병조약 그 밖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한 조약의 문서에 조인한 행위"는 '반민법' 제1조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와 같다.
7항 "한일합병의 공으로 왕위 또는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 21항 "일본정부. 일본군부 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우리민족의 탄압에 앞장선 공으로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행위", 8항 "일본제국의회의 귀족원의원 또는 중의원의원으로 활동한 행위" 그리고 9항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는 '반민법' 제2조 "일본 정부로부터 작을 수한 자 또는 일본 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 제4조 1항 "습작한 자" 및 2항 "중추원 부의장, 고문 또는 참의 되었던 자"와 내용이 같다. 다만 7항에서 "왕위"를 추가해서, 조선조 왕실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 눈길을 끈다.
10항 "일본제국주의 군대에 장교 또는 하사관으로서 침략전쟁에 협력한 행위"와 20항 "경찰관리. 헌병 또는 헌병보조원으로서 우리 민족의 탄압에 앞장선 행위"는 '반민법' 제4조 6항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를 부연한 것이다.
11항 "학병. 지원병. 징병. 징용 또는 공출을 권유하거나 강요한 행위", 12항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부녀자를 제공한 행위", 13항 "창씨 개명을 주창하거나 권유한 행위", 14항 "신사를 세우기 위하여 조영위원으로 활동한 행위", 15항 "언론. 예술. 학교. 종교. 문학. 그 밖에 문화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찬양하고, 내선융화.황민화운동에 앞장서거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행위", 18항 "사법부내의 판사. 검사. 서기. 집달리 또는 형무관리로서 우리 민족의 탄압에 앞장선 행위" 그리고 22항 "일본제국주의 통치기구의 각종 외곽단체의 간부 또는 직원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행위"는 '반민법' 제4조 9항 "관공리 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 10항 "일본 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 본부의 수뇌 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 그리고 11항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를 부연한 것이다. '반민법'에서 포괄적으로 "관공리 되었던 자"로 규정했던 것을 이 법안에선 사법부 종사자들을 따로 적시한 것이 눈길을 끈다.
16항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을 생산하고 자원을 제공한 행위 또는 이를 위하여 거액의 금품이나 비행기 등을 헌납한 행위"는 '반민법' 제4조 7항 "비행기, 병기, 탄약등 군수 공장을 책임 경영한 자"에 헌납 행위를 더한 것이다.
17항 "부. 도의 자문. 결의기관 의원, 읍면회의원 또는 학교평의회원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행위"는 '반민법' 제4조 8항 "도, 부의 자문 또는 결의 기관의 의원이었던 자로서 일정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적 죄적이 현저한 자"의 범위를 하급 기관까지 확대한 것이다.
19항 "주임관 이상의 관리 또는 군경의 판임관 이상 관리나 고등계 형사 등으로서 우리 민족의 탄압에 앞장선 행위"는 '반민법' 제4조 3항 "칙임관 이상의 관리 되었던 자"와 제5조 "일본 치하에서 고등관 3등급 이상, 5훈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등 경찰의 직에 있던 자"와 성격이 같고 내용이 비슷하다.
따라서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된 25가지 행위들에서 새로 들어간 것들은 23항 "은행. 회사. 조합. 산림. 어장. 공장 및 광산 등의 간부 또는 직원으로서 우리 민족의 재산을 수탈한 행위", 24항 "조선사편수회 등에 소속하여 우리민족의 역사를 왜곡하거나 말살한 행위" 그리고 25항 "토지조사사업 그 밖에 여러 식민통치사업에서 일본제국주의의 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민족에게 경제적인 고통을 가한 행위" 셋 뿐이다. 이 셋은 추가한 것이 설령 타당하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친일반민족행위'들에서 중심적 자리를 차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법안은 '반민법'과 내용이 실질적으로 같다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이 법안이 목적과 내용에서 '반민법'과 실질적으로 같으므로, 이 법안은 '반민법'이 안았던 문제들을 그대로 안게 되었다.
먼저, '반민법'은 소급 입법이었다. 그래서 행위 당시 분명히 합법적이었던 행위들이 죄로 규정되었다. 이 법안에 따른 "진상 규명"에서도 그렇게 합법적 행위들이 소급적으로 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엔, 헌법에 보장된 3심 대신 단심을 택했다. 이것은 심중한 위헌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러한 절차적 정의에 대한 소홀은 이 법안에서도 이어져서, 이 법안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판정을 받으면, 그 사람들은 재심을 받을 길이 없다.
셋째, '반민법'에 규정된 범죄들은 그 피해자들이 명확하지 않다. '반민법'에 규정된 범죄들은 본질적으로 민족이 그 피해자들이다. 이름부터 "반민족 행위"라는 표현이 들어갔고, 곳곳에 "민족에게 해를 가한"과 같은 표현들이 나온다. 그러나 민족은 실체가 또렷하지 않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범죄는 구체적 개인들에 대해 저질러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민족과 같은 추상적 집단을 피해자로 보면, 여러 가지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나온다. 이 법안도 같은 문제들을 맞을 수밖에 없다.
'반민법'에 의한 공소 시효는 1949년 8월 31일로 완성되었다. 1949년 9월 22일엔 '반민법'을 집행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를 폐지하는 법안이 의결되었고, 그때까지 '반민특위'가 해온 일들을 대법원과 대검찰청에서 이어받아 1950년 3월말까지 재판을 끝냈다. 이렇게 식민지 경험을 씻어내는 정화법(lustration law)의 성격을 지녔던 '반민법'을 만들고 집행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일단 공식적으로 친일 문제에 대처했다.
이제 '반민법'과 목적이 같고 내용이 실질적으로 같은 법안을 새로 만드는 일은 '반민법'의 효력을 부정하고 그 법에 의한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결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이 법안의 발의자들이 의도했든 아니했든, 실제로는 그렇다. 이 법안을 제안한 사람들이 무슨 근거를 내세우든, 이러한 일이 정당화되기는 어렵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애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막 세워진 대한민국이 정상적 국가처럼 움직이기는 어려웠으므로, 당시 여건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여러 모로 제약했다. 그러나 정화법의 성격을 지닌 '반민법'의 취지가 아주 꺾였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반민특위'의 활동이 부진했던 것은 아니었고, '반민특위'에서 벌인 일들은 대한민국 법원에 의해 적법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 활동의 부진을 들어, 그 기구의 성과와 '반민법'에 따른 재판 결과를 아예 부정하는 사조가 줄곧 우리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었다. 심지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계속 '친일파'나 '반민족행위자'로 간주하는 일이 당연한 처사로 통해왔다. 그래서 '반민특위'에 의해 일단 기소된 사람들은, '반민법'에 따른 재판의 결과와 관계 없이, '친일파'나 '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 법안도 '반민법'에 의한 '반민특위'의 활동과 사법부의 재판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만들어졌다. '반민법'을 만들었던 국회가 다시 이 법안을 법으로 만든다면, 국회는 자신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이 법안의 내용은 상당히 큰 기구를 만들어서 상당히 오랫동안 여러 가지 일들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이 법안에서 '반민족행위'의 유형으로 새로 들어간 "은행. 회사. 조합. 산림. 어장. 공장 및 광산 등의 간부 또는 직원으로서 우리 민족의 재산을 수탈한 행위"만 하더라도, 그 작업이 얼마나 큰 일이고 얼마나 많은 자원이 필요할지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반면에, 그렇게 큰 일을 벌여서 나올 사회적 혜택은 분명하지 않다. '반민족행위'들을 밝혀내는 것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실제로 이득이 되는지 아직 누구도 시원스럽게 밝히지 못했다. 설령 그러한 활동으로 "왜곡된 역사와 민족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거기서 나오는 혜택이 비용보다 크다 하더라도, 지금 그 일에 많은 자원을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냐 하는 물음은 그대로 남는다.
이제 친일 행위들은 역사적 사건들이다. 대부분의 친일 행위들은 반세기 이전에 일어난 일들이다. 따라서 친일 문제는 본질적으로 역사학의 영역에 속하며, 그것에 관한 논의는 과학적 방법론을 숙지한 역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념을 앞세우는 임의 단체들이나 정치적 이해 관계에 민감한 정부 기구가 이 일을 주도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복거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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