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지체 너머, 규제 진화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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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수만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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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속도는 파괴적이다. 생성형 AI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체하고, 사물인터넷과 빅데이터가 산업의 경계를 허무는 융복합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대전환기는 우리에게 거대한 시장을 제공하는 동시에, 저출산과 성장 둔화라는 복합적 위기를 돌파할 핵심 열쇠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산업의 최전선에 선 혁신가들은 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에 부딪히고 있다. 바로 '규제 지체’의 벽이다.
저서 《AI 대전환기, 규제는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규제를 단순히 철폐해야 할 악(惡)이나 장애물로 보지 않는다. 반대로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사회적 위험을 관리하는 최소한의 규칙으로서 규제의 순기능을 인정한다. 다만, 과거의 고착된 사전 규제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혁신을 가로막는 정부 실패를 야기할 뿐이라고 본다. 낡은 지도로는 AI라는 새로운 바다를 항해할 수 없다. 이제는 규제의 양을 줄이는 '규제 완화’를 넘어, 시대의 흐름에 맞춰 규칙을 개혁하는 '규제 합리화’로의 대전환이 필요할 때이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통찰은 규제의 프레임을 '포지티브’에서 '네거티브’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이다. 법에 명시된 것만 허용하는 포지티브 방식은 변화가 느린 과거의 산업 사회 구조에서는 유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쏟아지는 AI 시대에 포지티브 규제는 그 자체로 강력한 진입 장벽이 된다. 법전에 'AI 비대면 진료 중계 허용’이라는 문구가 없다는 이유로 혁신적인 스타트업의 서비스를 일단 불법으로 간주하는 행태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저자는 "원칙 허용, 예외 금지"의 네거티브 규제 철학을 강조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위험 요소만 금지 리스트로 묶고, 나머지는 시장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다. 혁신은 국가가 허락한 온실 속이 아니라, 민간의 창의성과 R&D가 자유롭게 부딪치는 야생에서 탄생한다. 자율과 사후 책임을 동시에 추구하는 민관 협업형 자율 규제 환경이야말로 신산업 성장의 자양분이다.
그러나 책은 단순히 이상적인 제도적 대안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 속의 뼈아픈 난맥상을 가감 없이 짚어낸다. 대한민국은 OECD 규제 정책 평가에서 상위권을 차지할 만큼 '규제 영향 분석’이나 '규제 샌드박스’ 같은 서류상의 제도는 훌륭하게 갖추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현장에서 작동할 때 '무늬만 혁신’으로 변질된다는 점이다.
첫째는 공무원 조직의 보수성과 면책 제도의 부재다. 사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공무원 개인이 책임지는 구조에서는 아무리 네거티브 체제를 도입해도 본능적으로 사전 원천 금지라는 안전한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다. 둘째는 샌드박스의 한계다. 1~2년간 임시 허가를 통해 안전성을 실증해도, 정작 정식 입법으로 이어지지 않아 스타트업들이 특례 기간 종료 후 규제 절벽에 처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가장 공감했던 대목은 거버넌스의 비대칭성, 즉 이해관계자 갈등 문제였다. 원격의료나 모빌리티 사례에서 보듯, 강력하게 조직화 된 기존 기득권 직역 단체는 정책 결정 과정에 깊숙이 참여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면, 서비스를 이용하며 효용을 누리는 일반 국민들의 목소리는 파편화되어 정책에 반영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사후적 위험성에 대한 과도한 우려나 정치적 표심을 이유로 신산업 모델을 원천 차단해 버리는 악수를 두게 되는 것이다.
저자가 책 전체를 통틀어 내린 결론은 명확하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무조건적인 규제의 폐지를 뜻하는 '더 적은 규제’가 아니라,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발맞추어 유연하게 학습하고 진화하는 '더 좋은 규제’다.
이를 위해 정부는 불필요한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고, 형식적인 이해관계자 수렴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국민의 편익을 측정할 수 있는 증거 기반의 정책 결정을 내려야 한다. 공무원이 창의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유연하게 규제를 집행할 수 있도록 적극 행정에 대한 실질적 면책을 보장하고, 갈등을 양지로 끌어올려 해결할 수 있는 공론화 위원회의 법제화 같은 거버넌스의 혁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기술이 만든 거대한 기회의 문을 닫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위험을 슬기롭게 통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는 규제 진화의 본질이다. 시장 경제의 핵심은 자율성이며, 그 자율성을 뒷받침하는 규칙은 끊임없이 진화해야 한다. AI 대전환기라는 문명의 갈림길에서 대한민국이 글로벌 표준을 선도하는 혁신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이제는 정부와 입법부가 낡은 규제의 프레임을 깨고 위대한 진화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