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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 7~9장

글쓴이
자유주의 입문 독서토론모임 2026-08-03

일시: 2026년 7월 22일 21시
장소: 온라인
참여자: kdg, mori, 자유, g, 티베리우스, 벤치프레스

1. 위기 속 지도자의 선택: 권력의 해체와 집착이 가른 국운

19세기 말 서구 제국주의라는 거부할 수 없는 세계적 변화 앞에서, 조선과 일본의 운명은 위기 상황에서 지배층이 권력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일본의 유연한 체제 혁신 (대정봉환): 도쿠가와 막부는 내전으로 인한 공멸과 서구 열강의 개입을 막기 위해 260년 넘게 독점해 온 권력을 천황에게 스스로 반납했다.

사적 권력보다 국가 보위를 우선시한 이 선택은 메이지 정부의 신속한 중앙집권적 근대화로 이어졌다. 다만, 메이지 유신 자체가 내포하고 있던 군국주의적·국수주의적 속성은 훗날 제국주의적 폭주를 낳는 근본적인 씨앗이 되었다.

조선 고종의 이기적 권력 집착과 망국: 반면 조선의 고종은 입헌군주제적 개혁으로 자신의 절대 권력을 제한하려 했던 김옥균을 암살하고 부관참시하는 등 체제 혁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짓밟았다.

아관파천을 비롯해 외세에 의존한 행위들은 국가의 독립성보다 '황권' 보전을 우선시한 근시안적 처사였다.

나아가 이러한 고종의 '이중 외교 및 이권 판매 시도'는 일본이 조선을 단순한 보호령이 아닌 완전한 합병으로 선회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

합병의 역사적 맥락: 1910년의 한일병합은 러일전쟁이 준 자신감의 산물인 동시에, 당시 1908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이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례처럼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 방식이라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비극이었다.

다만 조선 말기 지배층의 부패로 자생적 개화의 기회가 차단당한 것은 뼈아픈 역사적 한계였다.


2. 러일 전쟁과 제국주의 팽창의 딜레마

정신력의 차이와 군 사기: 러일 전쟁 당시 명확한 목표 의식으로 단결한 일본군과 달리, 3,000km 떨어진 낯선 땅에서 왜 싸우는지 몰랐던 러시아군은 사기 저하로 패배했다. 이는 국가 안보와 명확한 주적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팽창의 역설과 파시즘의 대두: 러일 전쟁 이후 한반도와 만주를 병합하면서 국경선이 길어졌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모순은 끝없는 팽창(중일·태평양 전쟁)을 강제했다. 전쟁 후 늘어난 세금, 관동대지진, 대공황이 겹치며 하층민 경제가 파탄 났고, 이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무너뜨리며 군부 전체주의로 쏠리게 만들었다.


3. 통제 불능의 군국주의: 나치·독일제국·북한과 다른 일본의 구조적 특수성

일본의 체제가 군국주의적 일반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나, 이를 막을 수 없었던 요인은 단순한 민중의 지지나 테러리즘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나치 독일, 독일제국, 북한 등 비교 대상 체제들과 비교할 때, 일본은 폭주를 막을 안전장치가 아예 부재했다는 결정적 특수성을 지녔다.

상하 통제 시스템의 붕괴: 나치나 북한 등은 1인자나 최고 권력자가 군부를 완벽히 장악했으나, 일본은 군부의 상부조차 하부를 통제하지 못했다.

만주사변 당시 대본영과 육군참모본부가 관동군을 전혀 통제하지 못한 것, 노구교 사건 당시 일개 연대장의 난리를 수습하지 못하고 전쟁으로 끌려간 것이 대표적이다.

천황을 통한 통제라는 명분은 있었으나, 실질적 실권이 없는 천황 뒤에서 군부는 무력화되었다.

합법적 항명과 내정 장악 구조: 군인이 수상을 맡는 형식을 넘어, 육군성·해군성 장관 추천권을 통해 내각 조각과 운영을 합법적으로 무산시킬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가졌다.

쿠데타가 아닌 '제도화된 항명' 앞에서 천황의 명령권마저 무력화되었고,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정치사에 뿌리 깊게 박힌 암살·테러 문화와 결합해 군부 폭주의 토양이 되었다.


4. 패전의 원인과 공산화 공포

육해군의 파벌 싸움과 패전: 조슈번(육군)과 사쓰마번(해군) 간의 극심한 예산 경쟁과 정보 단절은 진주만 공습이라는 무리수를 불렀으며, 내분과 전선의 이중화가 패전의 핵심 원인이 되었다.

적화 공포와 천황제 수호: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몰살당한 사건은 '만세일계' 천황제를 유지하던 일본 지도부(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등)에게 공산화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주었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일본의 정신적 근간인 천황제 붕괴를 뜻했기에, 패전보다 '본토의 공산화'를 더 두려워했으며, 이는 전체주의적 총동원 체제로 이어졌다.

전후 처리와 현대 일본: 패전 후 맥아더는 통치의 편의를 위해 천황제를 유지했고, 요시다 시게루는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 성장에 매진하는 '요시다 독트린'으로 현대 일본의 기반을 다졌다.


5. 식민 지배와 역사 인식을 바라보는 시각

조선 말기 지배층의 부패로 자생적 개화의 기회를 차단당한 뼈아픈 역사 속에서, 일각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철저한 수탈과 폭력에 기반해 자생적 발전을 꺾은 불법적 침탈이라는 시각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존재한다.

1차 대전 후 켈로그-브리앙 조약 이전에는 전쟁과 병합이 국제법상 완전히 불법이 아니었다는 제국주의 시대의 세계사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사과와 배상 요구 속에서 과거의 과오를 냉철히 직시하는 동시에, 100년 전의 역사를 소모적 감정의 영역으로만 소비하는 태도를 경계하며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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