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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직구를 누르자, 시장이 움직였다

글쓴이
최유진 2026-05-27

스마트폰을 들고 앱 하나를 켰다. 500원짜리 줄자, 800원짜리 주방 집게. 배송비는 무료다. 알리익스프레스 이야기다. 처음 이 앱을 켰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했다. 설마 이 가격이 진짜야? 그런데 며칠 후 택배가 도착했다. 진짜였다. 그 순간, 무언가가 바뀌었다.

그 앱이 단숨에 11번가와 G마켓을 제쳤다. 수십 년 쌓아온 국내 플랫폼의 아성이, 초저가 배송 하나에 흔들린 것이다. 2024년 한국 쇼핑 앱 다운로드 순위에서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는 나란히 1위와 2위를 차지했고, 중복 이용자를 제외한 두 앱의 순 이용자 수는 약 886만 명에 달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배송이 느리고 품질을 믿기 어렵다는 이유로 외면받던 플랫폼이, 어느새 수천만 명의 한국인이 매달 들여다보는 쇼핑 창구가 되었다. 소비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더 나은 선택지를 찾아갔다. 국경 따위는 처음부터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재앙으로 읽었다. 값싼 중국산이 쏟아지면 국내 유통업계가 무너진다는 공포였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진 일은 달랐다. 위기를 느낀 국내 기업들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CJ와 신세계는 쿠팡과 중국 이커머스(C커머스)의 공세에 맞서 전격 물류 제휴를 선언했다. 오프라인 유통 공룡들도 변했다. 롯데·현대백화점은 온라인이 흉내 낼 수 없는 체험과 문화를 앞세워 복합쇼핑몰로 탈바꿈했고, 이마트는 신선식품과 프리미엄 델리 코너를 강화하며 C커머스가 넘볼 수 없는 영역을 파고들었다. 외부의 경쟁이 없었다면 이 변화들은 훨씬 더 느리게, 혹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시장경제다. 알리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경제학자 슘페터는 이를 창조적 파괴라 불렀다. 낡은 질서가 무너지는 자리에 더 나은 것이 들어선다. 경쟁자가 없을 때 기업은 굳이 더 잘할 이유가 없다. 소비자가 진짜 대안을 손에 쥐는 순간, 기존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혁신한다. 알리와 테무는 국내 시장을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체된 시장에 혁신의 불씨를 던진 셈이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국경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물론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서울시 조사 결과 알리·테무에서 판매되는 어린이 제품 71개 중 41%가 안전 부적합 판정을 받았고, 가품 유통 문제도 끊이지 않는다. 소비자가 선택할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지만, 그 선택이 안전을 담보해야 한다는 전제는 흔들릴 수 없다. 유해 제품을 걸러내고, 가품을 차단하며, 피해 발생 시 소비자를 구제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 바로 그것이 정부가 해야 할 진짜 역할이다. 가격 경쟁에서 뒤처진 기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2024년 5월, 정부가 내놓은 대응은 방향이 달랐다. 소비자 안전 강화를 명분으로 150달러 이하 직구 면세 한도를 낮추고, 일부 품목의 직구를 전면 금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소비자들의 반발은 즉각적이었다. 선택권 침해라는 비판이 쏟아졌고, 논란이 거세지며 해당 방안은 사실상 시행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씁쓸함이 남는다. 그 규제가 진짜 보호하려 했던 것은 소비자가 아니라, 경쟁에서 밀리던 일부 국내 유통업계였기 때문이다. 소비자 보호라는 명분 뒤에 경쟁 제한이 숨어 있었다.

알리와 테무가 없었다면 지금의 쿠팡이, 지금의 이마트가 이토록 빠르게 변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경쟁을 막는 규제는 결국 그 비용을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한다. 더 비싼 가격, 더 좁아진 선택지, 더 느린 혁신이 그 결과다. 반면 경쟁이 살아 있는 시장에서는 기업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내놓는다. 500원짜리 줄자 하나가 이미 그 답을 보여줬다. 보이지 않는 손을 막는 것은, 결국 소비자 자신의 손을 묶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