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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규제의 배신, 중고 서점만 배부른 출판 시장

글쓴이
정혁수 2026-05-27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대학생들이 가장 먼저 치르는 통과의례는 다름 아닌 전공 서적 구하기 전쟁이다. 수만 원에 달하는 전공 서적을 정가에 구매하기보다, 중고 거래 플랫폼을 뒤지거나 선배들에게 책을 물려받을 길을 찾는다. 도서정가제라는 획일화된 가격 통제 앞에서, 학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비싼 가격을 우회하는 것은 합리적인 경제주체로서 내린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다.

도서정가제란, 책의 정가를 정하고 할인을 금지 또는 제한하는 제도이다. 이는 대형 서점의 할인 공세로부터 동네 소형 서점을 보호하고, 출판 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취지와 달리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았고, 시장 전체의 수요가 증발해 버렸다. 우리는 이 모순적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현상을 경제학에 대입해 보면 그 해답이 명확해진다. 도서정가제는 단순한 문화 정책이 아닌 시장 균형점보다 높은 곳에 가격의 마지노선을 긋는 가격 하한제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음(-)의 경제적 결과를 초래한다. 우선, 초과 공급의 발생이다. 가격이 인위적으로 비싸지면,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인 공급자는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해 공급을 늘린다. 반면, 소비자들은 비싸진 가격에 부담을 느껴 수요를 줄이게 된다. 그 결과, 시장에는 팔리지 않는 책들이 재고로 쌓이게 되고, 이는 보관 비용 증가나 폐기와 같은 비효율로 이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재고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만일, 가격 통제가 없었다면 시장 균형점에서 소비자와 생산자가 서로 거래하며 이익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높은 가격이 고정되면서 일부 소비자는 구매를 포기하고, 생산자 역시 판매 기회를 잃는다. 당연하게도 거래량 또한 줄어들 것이다. 이처럼 가격 통제로 인해 사라진 거래와 그로 인해 줄어든 사회 전체의 이익을 경제학에서는 ’자중손실‘이라고 부른다. 결국, 도서정가제는 거래 자체를 위축시키며 시장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비효율은 실제 시장에서 더 심각한 문제로 나타난다. 도서정가제는 개인 소비자뿐만 아니라 국가 기관인 국공립 도서관과 학교 도서관의 도서 구매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도서관의 한 해 예산은 정해져 있는데, 책 가격이 높게 유지될수록 새로 확보할 수 있는 도서의 권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결국, 취약 계층이나 일반 시민, 학생들이 공공 도서관을 통해 다양한 최신 지식을 접할 수 있는 공공의 혜택이 줄어들게 된다. 이는 단순한 소비 위축을 넘어 사회 전체의 문화적, 지적 접근성을 낮추는 문제로 이어진다.

또한, 기형적인 중고 시장의 팽창과 창작자의 빈곤화라는 부작용도 나타난다. 신간 도서의 가격이 인하되지 않자, 가격에 부담을 느낀 소비자들은 알라딘과 예스24 같은 대형 중고 서점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중고 도서가 아무리 많이 팔려도 그 수익은 중고 서점 유통사에 집중될 뿐, 저자나 출판사에는 단 1원도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도서정가제가 동네 서점과 창작자를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으나, 정작 신간 시장의 수요를 중고 시장으로 쫓아낸 꼴이 되어, 오히려 숨통을 조이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도서정가제는 착한 의도로 출발했지만, 그 결과는 시장의 자율성을 왜곡하고 있다. 이는 정부의 선한 개입이 얼마든지 역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소비자와 생산자를 동시에 돕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가격을 통제하는 것이 아닌 시장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도서정가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해 자유롭게 가격 경쟁을 펼칠 수 있게 된다면, 도서 가격은 더욱 합리적인 수준으로 낮아지고, 그동안 구매를 망설이던 소비자들의 수요도 다시 시장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는 전체 도서 판매량을 증가시켜 출판 시장의 규모를 키우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것이다.

동네 서점 역시 보호에 의존하기보다 큐레이션과 독서 모임 등 차별화된 서비스로, 가격이 아닌 경험과 가치로 경쟁하는 자생력을 갖춰야 한다. 시장을 살리는 길은, 결국 시장에 맡기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