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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기술을 지배한다… 기업가의 진정한 역할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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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수단, 시장은 목적’ 혁신의 본질 / 기술 우선주의의 함정, 성장 이끈 건 시장의 발견 / “시장이 가치 결정”… 수요 있는 곳 찾아야


자동차를 구성하는 기술은 수백 가지다. 내연기관, 변속기, 전기모터, 배터리, 제동장치 등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그러나 이 기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조합해 소비자가 기꺼이 돈을 내는 제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기술의 목록에서 시장의 가치를 읽어내는 것, 그것이 기업가의 몫이다.


현대자동차가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수많은 기술과 인력을 모으고,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부품 생태계를 조직하며, 세계시장을 개척했다. 자동차의 혁신은 엔진의 발명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소비자가 살 수 있는 제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좋은 기술이 있었으니 시장이 열린 것이라고 잘못 해석한다. 인공지능, 반도체, 로봇처럼 눈에 보이는 첨단기술이 등장하면 곧바로 "혁신의 시대"라고 말하고, 기술에 집중하면 성장이 따라온다는 명제가 자명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인과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불안정하다. 기술이 앞서면 시장이 열린다는 것은 성공한 사례를 역으로 읽은 결과일 뿐이다. 살아남은 기술은 시장의 선택을 받은 기술이다. 기술이 시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기술의 방향과 가치를 결정한다.


여기서 기술개발과 혁신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혁신을 기술혁신과 같은 말로 사용한다. 그러나 혁신의 핵심은 기술의 발명이 아니라 새로운 결합이다. 기술과 자본, 노동, 조직, 유통, 소비자 수요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결합하여 시장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혁신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가능성에 머물 뿐이다.


하이에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어떤 제품이 팔릴지는 중앙에서 설계할 수 없다고 했다. 정보는 수많은 시장 참여자들의 선택 속에 분산되어 있다. 기업가의 역할은 그 분산된 신호를 포착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요를 찾아내는 것이다. 기술 축적이 아니라 시장 발견이 기업가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다.


기술혁신 우선론은 이 순서를 뒤집는다. 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앞세우는 것은, 결국 시장의 자율적 판단 기능을 믿지 못하고 기술자나 정책 입안자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나온다.


이 원리는 한국의 고도성장 경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잘살게 된 것은 공장을 짓고 기술을 쌓아서가 아니었다. 팔 곳을 먼저 찾아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조선소가 완공되기도 전에 해외 선주로부터 수주를 따냈고, 배를 만드는 기술은 그 주문을 채우는 과정에서 쌓았다. 현대자동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엔진을 먼저 만든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가격과 품질의 교차점을 찾아 시장을 넓혀간 것이다.


기술은 수단이고, 시장은 목적이다. 이 순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창고 안에서 멈추게 된다. 우리가 진짜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떤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수요 있는 시장을 찾아낼 것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