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4000으로 보는 시장경제 : 코리아 디스카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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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민석 202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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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코스피가 사상 처음으로 4,000선을 넘어섰다. 필자는 현재 국민연금공단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최근 사무실에서 가장 큰 화제는 단연 ‘주식’이다. 비록 코스피가 잠시 조정을 받았다가 회복되었지만, 4,000이라는 숫자가 주는 설렘과 환호는 잊을 수 없다.
시장은 언제나 기대와 정보, 그리고 자율적 선택의 집합으로 가격을 만든다. 코스피 4000은 바로 그 가격 신호의 압축된 표현이다. 한동안 한국 증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지정학적 불안과 폐쇄적 지배구조, 잦은 규제와 정책 급선회는 투자자의 신뢰를 앗아갔다. PER과 PBR 같은 지표는 그 불신을 수치로 보여줬다. 많은 기업의 PBR이 1 이하로 거래된다는 것은 장부가치조차 시장에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시장경제에서 가격은 정보이자 약속인데, 우리는 그 약속을 설득하지 못했다.
그런데 무엇이 달라졌을까.
첫째, 금리라는 ‘자본의 가격’이 낮아지며 선택의 지형이 바뀌었다. 예금의 매력이 줄자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자금이 기업과 주식으로 이동했다. 같은 이익을 내는 기업이라도 자금 조달 비용이 낮아지면 미래 현금흐름의 가치가 높아지고, 그 기대가 PER에 반영된다. 돈은 수익률과 위험을 저울질하며 더 나은 곳으로 흘러간다.
둘째, 미·중 무역 갈등이 완화되며 ‘경쟁의 무대’가 다시 넓어지고 있다. 무역장벽이 높을 때 기업은 불확실성 비용을 가격에 전가하거나 투자를 미룬다. 반대로 장벽이 낮아지면 새로운 공급망과 시장이 열리고, 생산성 향상의 여지가 커진다. 경쟁은 비효율을 밀어내고, 남겨진 효율은 기업 가치로, 더 나아가 지수의 상승으로 축적된다.
셋째, AI라는 기술이 생산함수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데이터와 반도체, 소프트웨어에 대한 수요가 동시다발적으로 늘면서 엔비디아 등 선도 기업의 이익 전망이 급격히 개선됐다. 국내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시장을 리드했고, 이는 코스피 상승으로 이어졌다. 물론 숫자만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완전히 해소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신뢰는 한 번에 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뢰를 키우는 방법을 알고 있다. 투명한 공시, 책임 있는 이사회, 예측 가능한 정책, 그리고 투자자가 손쉽게 비교하고 선택할 수 있는 정보 환경이다. 정보의 대칭성이 높아질수록 시장은 더 안정되고, 안정된 시장은 충격을 흡수하는 쿠션이 된다.
국민연금에서 일하며, 같은 제도 아래에서도 개인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연금의 추납·반납, 수령 시점, 투자 병행 여부가 모두 다르듯, 시장도 각자의 판단이 결과를 만든다. 제도는 틀을 제공하지만, 가치는 결국 선택이 만든다. 정부는 규칙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기업은 약속을 지키며 장기 가치를 설명해야 하며, 개인은 금융 문해력을 높여 스스로의 선택을 책임져야 한다. 투자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단순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와 원칙이다.
시장경제도 이와 같다. 정부, 기업, 개인이 각자의 책임을 다할 때 자본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고, 그 신뢰 위에서 혁신이 자란다.
코스피 4000은 결승선이 아니라 이정표다. 숫자 너머의 신호를 읽고 제도를 다듬고 배움을 확산시킨다면, 오늘의 4,000은 내일의 기준선이 된다. 시장은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는 힘을 갖고 있다. 우리가 그 힘이 온전히 작동하도록 투명성과 자율성을 지켜낼 때, 코리아 디스카운트 대신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불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숫자를 대하는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 오늘 하루의 수익률보다 기업의 본질가치와 지속가능한 성장에 집중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투명한 시장은 투자자에게 신뢰를 제공하고, 그 신뢰는 다시 기업의 혁신과 성장으로 이어진다. 이 상식이 개인의 포트폴리오에서, 기업의 의사결정에서, 정부의 정책 설계에서 동시에 구현될 때, 코스피 4000은 우연한 파도가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체력으로 증명될 것이다.
시장은 오늘도 가격으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