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당제의 환상

박재민 / 2020-01-23 / 조회: 12,721

지난달 확정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대한민국의 정당체계를 다당제로 유도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선거구 다수대표제 방식의 선거제도는 양당제를 유도하고, 비례대표제 방식의 선거제도는 다당제를 유도한다는 뒤베르제의 법칙에 따라, 우리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높임으로써 다양한 정당이 국회에서 경쟁하는 다당제로의 전환을 꾀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다당제는, 오랫동안 정치개혁의 방향으로 제시되어 왔다. 다당제를 통해 새로운 정당이 등장하면 부패한 거대 양당의 카르텔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제3지대의 존재로 타협과 화합의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많은 학자와 정치가들이 주장하였고, 기성 정치에 불신을 가지고 있던 국민들 역시 다당제를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의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으나, 2016년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나름의 성공을 거둔 것 역시 국민들에게 자리 잡은 다당제로의 욕구의 발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국민의당의 성공은 정치개혁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국민의당은 당내 정쟁에 매몰되어 정치적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기성 정치권과 다르지 않은, 오히려 더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존의 거대 양당 역시 제3지대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정당 간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고 입법부의 교착은 전혀 해소되지 못하였다. 국민들이 국민의당을 선택하면서 기대했던, 다당제의 긍정적 효과는 하나도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그 원인으로 국민의당의 정치가들 역시 기존의 부패한 정치권에 봉사하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국민의당이 이념이나 계급에 기반한 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민의당은 그 처음부터 안철수와 문재인을 중심으로 한 정쟁에 기반하여 등장한 정당이었고, 안철수의 '새 정치’라는 모호한 비전만 가지고 있었을 뿐, 그 어떤 이념도 제시할 수 없는 정당이었다.


이 지점에서 다당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 정착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단지 정당의 수가 많아진다고 성공한 다당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이념이나 계급이익을 대변하는 다양한 정당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지지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형태가 되어야만 다당제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국민의당의 사례처럼 뚜렷한 이념이 없거나, 타 정당과 차별성 없는 이념을 가진 정당들로 다당제가 정착한다면 오히려 기존의 양당제에 비해 정쟁이 격화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다양한 이념 기반의 정당들이 경쟁하는, '성공한 다당제’가 적실성을 갖는지는 의문이다. 이는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이념 기반의 정당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들 역시 정당의 이념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전국 단위에서 한 명만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의 특성상, 그리고 대통령 선거의 보상이 매우 크기에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정당의 이해관계상, 정당은 이념을 잘 대변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범국민적 인기가 있어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는 후보자를 내세우게 된다. 대통령에게 부여된 권한이 막강하여 대통령 선거의 보상이 더욱 큰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제와 이념정당 간의 부조응은 더욱 심화된다.


이러한 문제는 결선투표제의 도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대통령 선거에 결선투표가 도입된다면 1차 투표에서는 각 정당의 이념을 대변할 수 있는 후보자들이 나오고 상위 득표자 2인이 경쟁하는 2차 투표에서는 후보자 간 협상 과정에서의 거래를 통해 정당의 이념기반도 유지하면서 대통령 선거의 보상도 일정 부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의원내각제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의 정당 간 거래와 유사한 형태로, 이렇게 되면 상술한 대통령제와 이념정당의 부조응은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의 본질적인 차이의 몰이해에 기반한 잘못된 기대다. 의원내각제에서의 정당 간 거래는 수상의 임기 중에도 정당이 지지를 철회할 수 있고, 이는 수상의 정치적 존립에 위기가 된다는 점에서 수상에게는 약속을 충실히 이행할 유인이 존재한다. 그러나 대통령제에서의 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을 기반으로 선거 과정에서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고, 임기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정당으로서는 약속 파기에 대한 적절한 제재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대통령에게는 약속을 충실히 이행할 별다른 유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대통령제는 본질적으로 선거 과정에서의 후보자 간 거래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없는 여건인 것이다. 결국 결선투표제를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제와 이념정당 간의 부조응은 해결되지 않는다.


또 대한민국의 대통령제에서 대통령과 행정부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이념정당의 등장을 가로막는다. 의원내각제의 다당제 하에서 소수정당은 연립정부에 참여하고 감시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국정에 반영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면서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도 독자적으로 다양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세력이 작은 소수정당은 자칫 정치에서 소외당하기 쉽다. 따라서 이들은 야당으로서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 정국에서 정의당의 행태와 유사하게 여당의 들러리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 한다. 이는 건강한 정치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당의 들러리를 서는 소수정당의 입장에서는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이념기반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 대통령 선거 과정뿐만 아니라, 국정 운영 과정에서도 대통령제 하에서 이념정당은 그 존립을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이는 곧 특히 대한민국의 대통령제 하에서 '성공한 다당제’가 적실성을 갖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대통령제와 다당제 간의 부조응성과 과거 국민의당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들은 다당제를 지지하고 있다. 국민들의 이러한 다당제에 대한 환상은 높은 정치불신과 정당불신을 고려할 때, 기존 양당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갈망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 정치권이 반성하고 해법을 찾아 나가야 할 부분이나 국민들의 여론을 단편적으로 해석하여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등, 다당제로의 전환을 꾀하는 것은 정치권의 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거나 정치적 목적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당제가 분명 나름대로 장점을 가진 제도임은 부정할 수 없으나, 절대적 이상향과 같은 존재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이념이나 계급에 기반을 두지 않고 단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다당제가 자리 잡는 것은 갈등의 정치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고, 대통령과 국회 간의 교착은 강화되어 원활한 국정 운영을 가로막게 될 것이다. 이미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국회를 통과한 상황은 어쩔 수 없으나, 대한민국은 하루빨리 다당제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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