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일관성 훼손의 치명적 결과

권혁철 / 2019-07-22 / 조회: 16,560       브릿지경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을 가능케 했던 경제 정책의 근간은 발터 오이켄(W. Eucken)으로 대표되는 질서 자유주의에 있다. 질서 자유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시장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은 공정한 경쟁질서의 틀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일에 한정되어야 하며, 시장경제의 과정 및 민간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에는 개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이켄은 자신의 저서 『경제정책의 근본원리』 (Grundsaetze der Wirtschaftspolitik)에서 경쟁질서의 틀을 구성하는 6가지 구성(構成) 원칙을 제시했다. 최우선 정책목표로서의 통화 안정, 개방적 시장, 사유재산제도, 계약의 자유, 자기책임의 원칙,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책의 일관성을 제시했다. 나아가 그는 이 원칙들은 상호보완적인 것들로서 전체가 통일적으로 이루어져야만 경쟁질서가 확립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여섯 가지 구성 원칙들 중 우리나라에서 요즘 특히나 문제시되고 있는 것이 정책의 일관성 결여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교육제도는 1년도 지속되지 못하고 수시로 뒤바뀌고 있다. 최근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자사고와 외고 등, 특목고의 폐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특목고 폐지를 앞장서서 주장하고 이행에 나서고 있는 현 정부 고위층들의 자제들이 대부분 특목고 출신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뻔뻔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이런 도덕적 비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정책의 일관성 훼손으로 인한 부작용이다. 교육제도가 이렇게 수시로 바뀌게 되면 정부의 정책을 믿고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노력하던 수십만 수백만 명의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특목고 관계자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또 학교 설립자들의 사유재산이 이런 식으로 침해되어도 되는 것인가?


'고졸 성공시대’를 외치며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직업계 고등학교 제도도 한순간에 변질되었다. 한 학생이 현장실습 중 안전사고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정책이 바뀌면서 많은 젊은 학생들을 좌절에 빠뜨리고 있다. 정부가 고졸 취업의 관문 역할을 하던 현장 실습 참여 기업의 요건을 대폭 강화하고 사후관리 절차도 엄격하게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실습학생을 뽑아도 실제 근무에 투입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학습’만 시켜야 한다. 게다가 현장실습 기간에는 최소 4-5차례 교사와 노무사로부터 안전검사까지 받아야 한다. 또 자유롭던 채용기간도 10월 이후로만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현장실습 참여기업이 줄어들고, 고졸 채용 역시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다. 50%가 넘던 취업률은 올해에는 34%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학생들의 직업계 고등학교 지원도 당연히 줄어들면서, 이제는 이 제도의 존립 자체마저 의문시되고 있다. 정책이 불과 몇 년도 지속되지 못하고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의 일관성 결여 문제는 교육 부문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부동산 정책을 비롯한 경제 정책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지난 해 '9.13 부동산 대책’ 이후 조용해 보였던 주택시장이 최근 다시 상승세를 보이자 정부는 주택시장 분양가 상한제를 민간택지까지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최저임금 설정 자체가 자의적 판단인데다, 그마저도 정치적 상황과 여론의 향배에 따라 널뛰기를 한다. 정부의 정책이 언제 어디로 튈지 가늠조차 힘들다. 


이렇듯 정책의 일관성 결여는 우리나라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지만, 그 부작용과 피해는 통상 잘 드러나지 않고, 따라서 간과되기가 쉽다. 그런데 정책의 일관성 훼손이 엄청난 폐해를 몰고 온다는 것을 구체적이고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바로 현재 한창 진행 중인 한일 간 '경제전쟁’이다. 대법원의 징용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로 불거진 한일 간 '경제 전쟁’도 결국은 정책의 일관성 훼손에 따른 부작용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사태가 벌어진 데에는 다른 여러 가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도 1965년 한일협정 이래 50여 년 간 유지되어 왔던 한국 정부의 입장, 즉 '1965년 한일협정과 더불어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의 종결’이라는 입장이 이번 정부 들어 180도 뒤집혔기 때문이다. 일본은 반도체 핵심부품으로 쓰이는 3개 소재의 수출허가를 엄격히 관리하고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겠다고 하면서, 앞으로 수출 규제 품목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사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할 한국 정부와 정치권은 '이순신 장군의 12척’ '동학(東學)의 죽창가’ '21세기 항일 의병과 국채보상운동’ 운운하면서 반일 감정 고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가게 되면 한일 양국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수출입 의존도가 높고, 대부분의 소재와 주요 부품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는 한국 경제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일본은 수출입 의존도가 매우 낮다.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한 이유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된 사회에서 개인과 기업은 미래를 제대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없다. 미래는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 그런데 이러한 불확실성 외에 정부 정책이 쉽사리 그리고 급격하게 변경될 수 있다면 개인이나 기업이 감당해야 하는 불확실성은 크게 증가하게 된다. 특히 기업들이 장기투자에 소극적이 되고, 현재와 미래 간의 자원배분이 왜곡되며,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는 낮아진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감소시켜주어야 할 정부가 오히려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는 나라에서 무엇이든 온전하게 발전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정책의 일관성이란 하이에크(Hayek)가 강조하는 관습과 관행 등 일종의 '자생적 질서의 중요성’과도 연계된다고 할 수 있다. 이성, 합리(合理) 또는 정의라는 명분하에 기존에 존중되던 자생적 질서를 정부가 일거에 뒤집는 것에 대해 하이에크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정책의 일관성이 사라지고, 정책이 조삼모사 식으로 변덕을 부릴 때 개인과 기업은 혼란스럽고 불안하며 경제는 침체되거나 무너진다. 


정책의 일관성이 자유로운 시장경쟁질서 확립의 구성 원칙 중 하나라는 점, 그리고 구성 원칙들은 전체가 통일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권혁철 자유기업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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