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말 금융시장은 대규모 분식회계설로 한바탕 홍역을 치뤘다. '한 재벌그룹 지주회사격인 A사의 9조원대 분식회계 사실이 적발됐다'는 괴담이 퍼지면서 금융시장을 비롯한 경제계 전체가 술렁거렸다. 금융감독원이 "분식회계 대란설은 사실무근"이라며 공식 발표하면서 결국 이 괴담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 사건은 기업 투명성이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SK그룹의 분식회계와 같은 대형 악재가 또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시장에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들까지 경영화두로 '투명성'을 내세우고 있지만 시장은 아직 이를 신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업금융이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중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업 재무제표의 투명성이 확보돼 있지 않기 때문에 은행들이 적극적으로 기업대출에 나서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금융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기업 회계의 투명성을 개선하고 공시제도를 강화하는 한편 기업 스스로 지배구조와 투명성을 높이는데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 기업 투명성 여전히 문제 = 지난해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사태이후 기업들은 투명성 강화에 나서고 있다. 사외이사 제도, 감사위원회, 경영실적 공시 등 법 준수는 물론 임직원 윤리강령을 제정하는 등 투명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 아직 시장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지난 6월말 대규모 분식회계설과 같은 분식 괴담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금융감독원이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1년동안 감리를 벌인 1544개 기업 가운데 35%인 540개사가 분식회계를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거래소 상장기업들의 경우에도 전체 감사대상 724개사중 23%에 해당하는 165개사가 분식회계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에도 감리를 받은 55개 기업 가운데 30.9%인 17군데가 분식회계로 적발됐다. 감리 유형별로는 무작위 표본 추출 등으로 대상이 선정되는 일반 감리의 경우 41개 기업중 9.8%인 4개사에서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났다. 또 분식혐의가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특별 감리는 14개 기업중 92.9%에 달하는 13군데가 분식 회계로 적발돼 제재를 받았다. 지적 유형별로는 특수관계자와의 거래 등에 대한 주석 미기재가 41건으로 가장 많았고 ▲대손충당금 과소계상 10건 ▲자산.부채 과소 및 과대계상 10건 ▲ 투자유가증권의 평가 오류 10건 ▲ 재고 자산 과대계상 9건 등의 순이었다. 분식회계가 이처럼 끊이지 않음에 따라 기업의 윤리경영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100점 만점에 14.1점에 불과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전국 성인 남녀 1028명을 대상으로 한 기업호감지수(CFI)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이 기업에 대해 갖는 호감도는 100점 만점에 39.1점에 그쳐 낙제수준이었으며, 5개 평가항목중 윤리경영은 14.1점으로 최하위였다. 또 기업에 나쁜 감정을 갖는 이유로는 분식회계 등 비윤리경영이 35.4%로 가장 높았다.
◇ 은행 "투명하지 못하면 돈 못 빌려줘"= 기업금융의 가장 큰 장애요인도 '기업들의 투명성 결여'다. 은행들이 아직도 기업들의 재무제표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어 신용대출이 증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용도가 좋은 대기업들은 은행 차입금을 상환하고 있는 반면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은 돈을 빌리지 못하는 양극화가 기업금융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 26일 부도가 난 텔슨전자도 투명성이 문제가 됐다. 텔슨전자가 분식회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은행으로부터 재무제표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텔슨전자측은 부채비율이 150%에 불과한 등 견실한 재무구조를 갖췄는데도 은행들이 대출상환에 계속 나서 화의를 신청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은행 관계자들은 "텔슨전자의 부도 이유는 영업 악화때문이며, 투명성도 문제가 있었다"고 말한다. 즉 텔슨전자가 주장하는 부채비율 150%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 휴대폰 업체의 경우 기술변화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개발비 자산을 상각해야 하는데 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또 구형 휴대폰의 경우 자산가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재고자산으로 분류하는 등 자산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투명한 기업이라면 2~3년전 개발비를 계속 자산으로 분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영업이 악화되고 투명성이 문제가 되는 기업에 대해 대출을 해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지동현 금융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은행들이 신용대출을 해 주기에는 재무상태가 너무 허약하고 나쁜 기업들이 많다"며 "외환위기당시 기업대출로 막대한 피해를 본 은행 입장에서는 투명성이 갖춰지지 못한 기업들에게 돈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 투명경영은 생존의 필수= 전문가들은 이제 기업에게 '투명경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한다. 신뢰받는 기업은 자금조달과 자본시장 접근 가능성 등에서 차별적 우위를 누릴 수 있지만 투명하지 못한 기업은 자금조달에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고 파산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들 스스로 투명성을 친구로 삼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 나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기업금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은행들을 탓하기 전에 기업 스스로 투명성 강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기업들이 회계제도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회계보고서가 근본적으로 과거 재무결과를 측정하고 회사의 미래 전망에 대해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또 분식회계에 대한 처벌이 시장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자유기업원 박양균 책임연구원은 "정부가 SK사태를 계기로 경영진의 책임과 회계법인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회계제도를 개선하고 있지만 과거의 규제가 현재의 분식회계를 막지 못했듯이 현재의 규제 또한 불확실한 미래상황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미래의분식회계를 막지 못할 것"이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회계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가 매번 시장에 개입하기 보다는 분식회계에 대한 처벌이 시장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분식한 기업이 퇴출당하게 되면 다른 기업들은 보다 정직한 회계감사 보고를 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채원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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