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美-英에 이용당하는 척하며 되레 잇속 챙겨▼
참석자들은 러일전쟁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전쟁이었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한반도는 결국 주권을 상실하고 말았다며, 그에 따른 정치·군사·외교적 의미와 교훈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입을 모았다.
최문형(崔文衡) 한양대 명예교수는 “러일전쟁 때 일본은 ‘강대국에 이용당하는 외교’를 했다”며 “이용당하는 척하면서 거꾸로 강대국을 이용해 국익을 챙겼다”고 평가했다. 온창일(溫暢一)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는 “우리나라가 또다시 ‘사자의 먹이(A Lion’s Share)’가 되어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안토니 베스트 영국 런던 정경대 교수 등 외국 학자들도 “미국이나 유럽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은 한반도 자체가 아니라 자신들한테 어떤 이익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지적했다.
21세기 동아시아에 평화체제가 구축될지 여부에 대해선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렸다.
우철구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은 “나라와 나라 관계는 국가이익에 따라 대립과 협력의 순환성을 보여주고 있다”며 “동아시아에서 대립이라는 불행한 과거를 딛고 협력의 시대를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6가지 주제별로 심도 있게 진행된 발표와 토론을 3개 분야로 재구성한다.
▼동-서양 연결된 전쟁… 유럽 국제관계까지 파급▼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러일전쟁이 일본의 한국병합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연구가 없다. 전쟁의 쟁탈 대상은 한국과 만주였다. 일본 뒤에는 미국 영국이 있었고 러시아 뒤에는 독일 프랑스가 있었다. 동서양이 연결된 전쟁이었고, 그 결과는 유럽의 국제관계에도 큰 영향을 줬다. 전쟁 후 한국은 열강의 만주문제 해결을 위한 카드로 전락했다. 일본은 미국 영국에 이용당하는 것 같았지만 이들을 이용했다. 대독포위망의 일원이 되어주고 그 대가로 한국을 집어먹었다. 일본 외교가 정당했다는 것은 아니나 그런 점에서 외교의 한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러일전쟁은 20세기 주요 강국의 첫 전쟁이다. 일본은 현대적 무기와 장비, 서구적 군사조직과 전략 전술을 갖고, 300년 동안 우세했던 서양세력을 이겼다. 영국과의 동맹으로 일본은 전적으로 전쟁에만 신경을 쓸 수 있었다. 러시아로서는 국내 혁명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은 전쟁’이었으나 일본으로선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쟁기념관에는 ‘자유는 무료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경구가 있다. 러일전쟁의 악몽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안토니 베스트 영국 런던 정경대 교수=영국이 러일전쟁에 크게 개입했고 한일합방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돼 있는데 영국은 중립을 지켰다. 당시 영국에 있어 한반도는 중요한 전략적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을사조약때 美-英 누구도 한국편에 서지 않아▼
▽석화정(石和靜) 세종대 교수=러일전쟁 후 일본의 한국 정책은 ‘보호’에서 ‘합병’으로 바뀌었다. 미국 외교관들은 이미 1907년 한국의 자주권은 끝났다고 얘기했고 영국 정부는 만주에서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한일합방을 인정했다. 한일합방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는 한 인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장기적 계획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이우진(李愚振) 중앙대 교수=1882년 한국과 미국은 수호조약을 맺었으나 1905년 을사조약 때 미국은 한국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가장 먼저 영사관 문을 닫고 주재원을 본국으로 데려갔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것이 맞다”는 태도를 취했다. 루스벨트는 “선진 문명을 보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쓰라-태프트’ 메모는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은 필리핀을 넘보지 않는다’는 밀약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식 외교 문서가 아니었고 ‘거래’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나바 지하루(稻葉千晴) 일본 메이조대 교수=러시아와의 전쟁이 발발했던 1904년 당시부터 일본 이 한국을 병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단지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 위협에 맞서 러시아 군대를 몰아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1907년 1차 러일협약으로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지자 그때부터 한국 병합을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벨라 박 러시아 과학원 박사=당시 러시아의 입장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전적인 식민 지배를 막는 데 있었다.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 후 일본은 한국에 대한 우위권을 갖게 됐지만 한국 내에서의 항일운동 등으로 인해 완전 병합을 하게 되기까지는 5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自主는 힘 없으면 보장안돼… 美를 적절히 활용해야▼
▽김기정(金基正) 연세대 교수=향후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결정할 가장 중요한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이 배타적 동맹관계를 중심으로 한 안보체제를 유지할 경우 동아시아에선 상당기간 대립과 갈등의 질서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향후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일본이 미국과의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의 정책을 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지역의 군비경쟁, 상호 불신 등은 평화와 안정의 걸림돌이다. 그러나 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 능력, 의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신념 등에 의해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샤리핑(夏立平) 중국 상하이 국제문제연구소 박사=2050년까지는 중국이 경제성장을 위해 미국과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본다. 동아시아 지역 내 국가들과도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역안정과 평화정책을 추구할 것이다. 중국이 경제발전을 이루면 이 지역의 경제통합에 앞장설 것이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은 지속될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낙관적으로 본다.
▽이춘근(李春根) 자유기업원 부원장=러일전쟁은 한국이 강대국에 각축장을 제공했을 뿐 아무런 영향력을 못 미친 비극적 전쟁이었다. 한국의 역할은 전혀 없었고 전쟁을 막을 방법도 없었다. 한국이 당시 힘을 조금이라도 갖고 러시아나 일본 어느 한편에 서서 균형을 깰 수 있었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중국과 일본이 갈등을 벌일 경우 한국이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균형이 바뀔 정도로 우리 해군력을 보유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이 날 경우 첫 포성은 바다에서 날 것이라는 분석이 각종 세미나에서 나온다. 실제로 이 지역 국가들은 해군력 증강 경쟁에 나서고 있다.
▽전재성(全在晟) 서울대 교수=최근 논란이 되는 ‘자주’의 개념을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변화에 따라 규정해야 할 것 같다. 자주나 주권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조선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속국이었지만 실제는 자주국가였다. 그러나 서양세력이 들어오면서 무정부적 상태에서 균세(均勢)와 자강(自强)만이 존재하는 질서로 바뀌었고, 결국 자주는 ‘힘이 없으면 보장되지 않는다’는 부국강병으로 인식됐다. 냉전기에는 미국과 소련이 민족자결주의와 약소국의 주권 보호를 내세우며 세 불리기에 나섰다. 탈냉전기 우리나라는 미국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대외적인 자율성을 제고시키는 쪽으로 자주와 주권의 개념을 세워야 한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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