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전제 자체가 낯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송 및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이런저런 미디어비평 등을 통해 지난 십 수 년 간 지겹도록 들어왔을 얘기다. 예능프로그램을 중심으로 KBS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들은 '베끼기’로 악명 높다. 전반적으로 KBS 프로그램들 시청률이 지난 십여 년 간 급락하게 된 건, 미디어 다변화 흐름 탓도 있지만, 이 같은 '베끼기’를 비롯해 전반적 크리에이티브 차원 저하 탓이란 해석들이 많다. 근본적으론 과거 수 십 년에 걸쳐 '패권’을 쥐고 있던 지상파방송, 즉 올드미디어 특유의 안일함 탓이란 해석들이다.
먼저 상황이 어디까지 왔는지 살펴보자. 아래는 스포티비뉴스 2020년 2월 14일자 기사 '“KBS는 왜 베껴서 만드냐?”...'구라철’, 팀킬도 감수한 '연쇄질문마’’ 중 일부다.
“먼저 김구라는 KBS 예능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이훈희 제작2본부장과 만났다. 이훈희 본부장에게 타 방송 인기 프로그램과 KBS 간판 예능프로그램의 유사성을 지적했고, 이훈희 본부장은 “일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만했다. 그런 이미지를 불식해야 한다고 한다”고 인정했다. 이재우 KBS 예능센터장에게도 김구라는 “KBS는 왜 이렇게 프로그램을 베끼냐고 한다”며 '무한도전’과 '1박2일’, '나는 가수다’와 '불후의 명곡’,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을 예로 들며 질문을 쏟아냈다. KBS엔 예민하고 뼈아플 수 있는 질문이지만 '구라철’과 김구라는 질문을 쏟아내는 폭주기관차였다.
이 센터장은 “어디서 본 듯한 것을 하지 말자고 해서 김구라가 한 '아이를 위한 나라는 있다’를 했었던 것”이라고 대꾸해 웃음을 자아냈다. KBS2 '아이를 위한 나라는 있다’는 '구라철’ PD와 김구라가 의기투합했던 프로그램으로 지난해 7월부터 4개월가량 방송됐으나 1~2%대 시청률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참고로, 위 거론된 '구라철’은 유튜브채널 스튜디오K를 통해 공개되는 KBS 웹 예능프로그램이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비록 웹 기반 프로그램으로나마 KBS 스스로도 자신들 '베끼기’ 오명에 대해 자조하는 시점이란 얘기다. 그 정도로 만연하고, 또 수없이 비판받아왔다. 어떤 의미에선 지난 십 여 년 사이 한국대중문화계 '스테디셀러’에 가까운 화두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그럴 만도 했다. 특히 예능프로그램 차원에서 그랬다.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난 '공개망신’만 담아 봐도 꽤 양이 많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언급해보자.
국정감사에서까지 지적되는 KBS '베끼기’ 문제, 왜 '예능’만 유독 심할까
일단 KBS 예능프로그램의 '베끼기’ 문제가 처음 언론을 통해 불거지기 시작한 건 대략 2013년경부터다. 위 언급된 '1박2일’ '불후의 명곡’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이 사실상 타 방송사 프로그램 콘셉트 표절로 지탄받으면서다. 그러다 2015년경에 이르면 이제 그런 불만과 질타의 수준이 걷잡을 수 없는 상태까지 간다.
“KBS 조대현 사장이 KBS의 타사 베끼기 논란에 입을 열었다. 1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KBS 신관 국제회의실에서는 수신료 현실화 추진 관련 KBS 조대현 사장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이날 조대현 사장은 본격적인 기자회견에 앞서 “오늘 아침 홍보실에서 전달한 기사를 봤다. KBS와 관련된 기사도 있었고, 미디어 업계 전반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특별한 날이라 다시 한 번 봤다”며 KBS 2TV '어 스타일 포 유’를 언급했다.
조 사장은 “KBS 관련해서 칭찬도 있었지만, 타사를 베끼기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공영방송 KBS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일이다. KBS는 KBS다운 길을 가야한다는 촉구의 말씀인 것 같다”고 말했다. '어 스타일 포 유’는 이날 오후 1시 인터넷 생방송을 시작했다. '글로벌 스타일쇼’를 표방한 '어 스타일 포 유’의 인터넷 방송은 최근 화제를 모은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따라하는 것 아니냐는 '베끼기 논란’을 만들어냈다.” (마이데일리 2015년 6월1일자 기사 'KBS 조대현 사장 “KBS의 타사 베끼기 논란, 부끄러운 일”’ 중)
수 십 년째 KBS의 '숙원’과도 같았던 수신료 인상안 관련 기자회견에서 드디어 이 '베끼기’ 문제가 거론되는 순간이다. 수신료 인상 반대논리로 '타사 프로그램 베끼기나 하면서 왜 수신료 올려 받으려 하느냐’는 여론이 증폭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담당CP, 잘해봤자 예능국장 차원에서나 사과의 말씀이 등장하던 KBS '베끼기’ 문제가 드디어 사장 입에서까지 나오게 된 시점이다.
그런데 이후론 이런 일이 점점 더 잦아진다. 다음은 2018년 상황이다.
“19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이화 과방위) KBS-EBS 국정감사는 사실상 지난 3월 열렸던 KBS 사장 후보자 청문회의 재탕이었다. (중략) 그나마 일부 의원들이 KBS의 포맷 베끼기, TV 수신료 징수 체계, KBS 소속 작가 처우 문제 등을 꺼내면서 양승동 사장도 의미 있는 발언을 내놓는 모습이었다.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M.net <프로듀스 101>나 JTBC <한끼줍쇼> 등이 방영된 후 KBS에서 <더 유닛>이나 <하룻밤만 재워줘> 등 유사 프로그램을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양 사장은 “공영방송으로서 본분을 다 하기 위해 창의적으로 실험적인 프로그램 제작에 책임을 다 하겠다”고 답했다.” (PD저널 2018년 10월19일자 기사 'KBS 국정감사, 현안 뒷전 '면박주기’ 구태 반복’ 중)
여기서부턴 이제 국정감사에까지 등장하는 비판요소가 된다. 그리고 뭔지 모르게 거론되는 '베끼기 의혹’ 프로그램들도 늘어있다. 지속적으로 개선이 안 되고 있단 얘기다. 그러다 2020년 '구라철’까지 간다. 2년 뒤에도 당연히 개선은 안 돼있단 방증이다. 거기다 이젠 자사 프로그램을 통해 자사 임원들에게 '베끼기’ 상황을 묻는 촌극까지 펼쳐진다. 사실상 임계점을 넘어선 논란에 가깝단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여러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 그 외에 각종 교양 및 시사보도 프로그램들까지 망라해서도 유독 '예능’ 프로그램에서만 KBS의 '베끼기 의혹’이 극심하게 드러난단 점이다. 예컨대 같은 엔터테인먼트 부문인 드라마 장르만 해도, 절대 KBS가 '베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사실상 지상파방송 전체, 즉 '올드미디어’ 전체가 질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나아가 KBS는 드라마 부문 '베끼기’ 차원에서 오히려 양호(?)한 편이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펼쳐진 숱한 드라마 '베끼기 의혹’에서 MBC는 '질투’ '남자셋 여자셋’ '세 친구’ '태왕사신기’ '의가형제’ '청춘’ '로망스’ '러브레터’ '앞집 여자’ '원더풀 라이프’ 등이 일본드라마나 미국시트콤, 만화 등을 베꼈단 의혹을 크게 받았다. 그리고 드라마 '베끼기 의혹’에서 선두주자는 사실상 SBS다. '별에서 온 그대’ '꿈의 궁전’ '해피 투게더’ '로펌’ '명랑소녀 성공기’ '별을 쏘다’ '불량주부’ '건빵선생과 별사탕’ '49일’ '야왕’ '용팔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내의 유혹’ '쩐의 전쟁’ '왕과 나’ 등이 할리우드영화, 일본드라마, 만화, 추리소설 등 다양한 미디어 작품을 베꼈단 의혹을 받았다. KBS는 상대적으로 단촐하다. '아이리스’ '왼쪽으로 가는 여자,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 정도가 일본소설과 일본드라마 등에 '베끼기 의혹’이 일었었다. 오히려 선방사례다.
그럼 대체 왜 KBS는 '예능’만 그토록 십 수 년에 걸쳐 '베끼기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너무나도 악명 높은 나머지 수신료 인상 기자회견이나 국정감사에서까지 사장이 직접 해명해야 하는 지경으로 치달았느냐는 것이다.
'절반은 공무원, 절반은 민간기업 직원’ KBS 정체성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
일반적으론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서두에 언급했듯, 올드미디어 특유의 안일함과 나태함이 지적되곤 한다. 그런데 그럼 드라마 부문에서의 선방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회사 자체가 그야말로 '지상파 3채널’ 시절 다소 쉽게 장사하던 체질에서 벗어나지 못해 '베끼기’에 무감각하다면 드라마 부문도 마찬가지여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좀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와 예능의 속성 차이부터 따져보는 게 순서다. 예능은 알고 보면 드라마와 상업논리가 약간 다르다. 예능은 그 자체로 '유행’이 중심이다. 시대 분위기와 밀접하다. 물론 드라마도 시대를 반영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예능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능은 해당시점의 유행어, 이런저런 풍속도, 좀 더 극단적이고 선정적인 세태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야 인기가 좋다.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단 것이다. 불행히도 KBS는 '그런 콘셉트’를 있는 그대로 반영해 만들면 안 되는 특이한 회사라서다. KBS는 다들 알다시피 공영방송이고, 공기업이다. 그런데 그 매출구조가 좀 특이하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해 6월 발표한 '방송사업자 재산상황 공표집’에 따르면, 2018년 기준 KBS 전체매출 가운데 수신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46.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광고소득과 재송신 수수료 등 각종 사업소득이다.
그러니 KBS 직원들은, 적어도 재원 차원에선, '절반은 공무원, 절반은 민간기업 직원’이 되는 셈이다. 이런 복합적 스탠스가 방송, 그중에서도 엔터테인먼트 차원으로 넘어가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그저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자체가 공익적이자 상업적이기도 한 여타 공기업들과 달리, 엔터테인먼트는 그 둘이 명확히 갈리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KBS에서 상업성 강한 프로그램이 등장해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곧바로, 이런 식이면 민영방송사와 대체 뭐가 다르냐는 비판이 쏟아진다. 국민 혈세로 운영되는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것. 그러면서 공익성 차원 의문이 제기되고, 심하면 수신료 납부 거부 무드까지 조성된다. 반면 공익성에 치중한 프로그램이 등장해 낮은 시청률을 기록해도 문제가 된다. 이번엔 아무도 보지 않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왜 내 세금이 동원돼야 하느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보다 분발해 전기료에 합쳐져 부과되는 수신료 값을 하라는 비난, 대중이 재밌게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라는 비난이 일게 된다. 어느 쪽이건 머리채를 잡힌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면 결국 KBS란 조직 자체도 여타 민영방송사들과는 전혀 다른 체질로 바뀌어버린다. '욕 안 먹는 게 능사’인 공무원 식 복지부동 체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본능을 필요’로 하는 민간기업 체질이 뒤섞여 오히려 최약체가 되기 쉽다. 생존을 건 도전과 모험을 하기엔 이미 몸이 뻣뻣해있고, 공익적 가치 기준으로 만사를 결정하기엔 당장의 상업성을 놓기가 어렵다.
이러면 생각할 수 있는 방법론은 하나밖에 안 나온다. 이른바 '게으른 상업성’ 노선이다. 무리한 상업적 도전을 피하면서 수신료 가치도 방어하는 방법. 이미 여타 민영방송사들에서 나와 있는 성공모델을 캐치한 뒤 거기서 너무 자극적인 접근만 빼버리고 내놓는 방법이다. 이는 사실상 예능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표절 논란까지 불거지진 않았어도 스타일 카피 내지 트렌드 따라잡기 정도 차원에서 이런 식 방법론은 KBS 내 곳곳에서 드러난다. 트렌드성이 강조되는 예능 분야에서 보다 빈번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일 뿐, 그런 상황의 바탕이 되는 '골격' 자체는 어느 분야에서건 똑같이 벌어질 수 있도록 탄탄히 마련돼 있단 얘기다.
해결방안은 있지만 가능성은 극히 희박한 어이없는 현실이 같은 KBS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논의는 물론 이전부터 있어왔다. 그런데 아무리 논의해봤자 결국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단 결론만 나온다. 온전히 경쟁논리에 기반한 민영방송사로 민영화를 이루든지, 아니면 온전히 수신료로만 운영되는 구조로 나아가 상업성 자체로부터 탈피해야 한단 두 가지 방향.
문제는 사실상 '둘 다’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까운 방향이란 점이다. 일단 후자부터 보자. 2018년 기준 46.0% 수신료 비중을 100%로 올려주려면 당연히 수신료 인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KBS 수신료 문제는 2000년대 들어 그 어느 정권에서건 꾸준히 거론돼온 '고질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해결은 안 된다. 1981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40년째 2500원으로 그대로 동결돼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KBS는 사장부터 정권에서 임명하는 식으로 정권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방송사이기 때문이다. 공영방송 운명이다. 이러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어느 한 정권에서 수신료 인상을 거론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야당에선 반대하고 나선다. 그러다 그 야당이 정권을 잡아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결국 정치논리에 의해 수신료 인상은 최소 20여 년째 '문젯거리’로만 남아있지 해결은 늘 요원한 상황이다. 미래해결조차 전망이 어둡다.
전자의 민영화 방안 경우도 논의 자체는 꽤 예전부터 있었다. 엔터테인먼트 중심 상업적 채널 KBS2TV만 매각해 민영화하잔 방안이다. 그리고 KBS1과 EBS 등 각종 공영방송을 합쳐 보다 작은 규모의, 오직 수신료로만 운영되는 공영방송을 만들잔 발상이다. 현재 전체매출 46.0%밖에 안 되는 재원만으로도 충분히 운영될 수 있는 규모 공영방송. 그럼 모델은 일본 NHK나 영국 BBC가 아니라 미국 PBS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이 방안은 공기업 민영화 자체가 대대적 정치쟁점사안이 돼있는 현 상황에 사실상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지경이다. KBS2 민영화보다 더 논리가 간명하다는 MBC 민영화, YTN 민영화조차 거론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 자체로 '악의 논리’처럼 호도된다.
결국 KBS 예능 '베끼기’ 근본적 해결도 어렵단 얘기다. 비단 예능 차원에서 벗어나 KBS '체질’ 자체의 해결이 어려워진다. 곧 '베끼기 의혹’ 대상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국정감사 등에서 해당문제가 거론되는 일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늘 '체질’을 바꿔야 모든 문제가 해결된단 식 프로그램을 내보내던 방송사가 왜 이런 일은 눈 가리고 아웅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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