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다뤘던 모든 대중문화 관련 통설들 중 가장 근거가 희박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대중적으로 폭넓게 알려지며 사실상 '정설’처럼 둔갑해버린 기가 막힌 사연이다. 당장 2020년 3월 한 달 동안만 해도 문화일보, 한국일보, 서울신문 등 중앙일간지와 연합뉴스, 미디어오늘, 오마이뉴스 등 매체 기사에서 이 '3S 정책’을 실제 존재했던 정책인양 거론하고 있다. 사실상 좌우논조를 가리지 않고 등장하는 셈이다.
각 포털사이트를 통해 쉽게 만나볼 수 있는 두산백과와 위키백과 등에서도 이 '3S 정책’은 버젓이 등장한다.
“3S, 즉 스크린(screen: 영화), 스포츠(sports), 섹스(sex)에 의한 우민(愚民)정책. 대중을 이와 같은 3S로 유도함으로써 우민화하여, 대중의 정치적 자기 소외,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함으로써 지배자가 마음대로 대중을 조작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말한다. 식민지정책에 있어서 순치(馴致)정책의 한 전형이다.” (두산백과)
“대한민국에서는 12.12 군사반란, 5.17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거쳐 집권한 제5공화국 정부가 국민들의 관심을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돌려서 반정부적인 움직임이나 정치사회적 이슈 제기를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시행한 여러 우민화 정책들을 묶어 이르는 표현이다.” (위키백과)
이렇게만 보면 뭔가 굉장히 구체적인 음모처럼도 여겨진다. 무엇보다, 실제로 어딘지 그럴싸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상황을 알아보면, 애초 '3S 정책’이란 개념 자체가 근거도 없을뿐더러, 논리부터 앞뒤가 안 맞고 모순덩어리에 불과한 허상의 개념, 실제적으로 '도시전설’에 가까운 개념이란 점을 알게 된다. 상황을 하나씩 살펴보자.
'3S 정책’ 실체는 실제적으로 '사회문화적 자유’ 확충 노선
먼저, 대체 전두환 정권의 어떤 정책들이 '3S’를 이루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당연히 '3S’란 식으로 명명된 건 없고, 그 어떤 식으로나마 '연결성’을 보여주는 형식도 존재하질 않는다. 그저 전두환 정권 당시 이런저런 문화/스포츠 정책들을 놓고 제3의 '주장’을 하는 구조란 점만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 '3S 정책이었다’고 '주장’되는 정책들도 보는 시각에 따라 어떤 문서에선 끼어 있다가 다른 문서에선 또 빠지기도 하는 등 엉망진창이다. 아래는 각종 언론보도에서 거론된 당시 '3S 정책’들을 망라한 내용이다.
* 스크린(영화, screen):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전국적으로 시작('80)
* 스포츠(sports): 1988년 하계올림픽 서울 유치('81), 1986년 아시안게임 서울 유치(’81), 프로야구 출범('82), 프로축구 출범(’83), 프로씨름 출범('83), 농구대잔치 출범(’83), 한국배구슈퍼리그 출범('84)
* 섹스(sex): 야간통행금지가 시행 37년 만에 해제('82)
그냥 보기만 해도 뭔가 이상하단 점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저게 왜 우민화 정책이 될 수 있는지 자체가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스크린’에 해당하는 컬러텔레비전 방송부터 보자. 당시 한국은 이미 컬러텔레비전을 생산하고 있었다. 한국나쇼날이 1974년 첫 생산에 성공하고, 1977년부턴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대규모 생산에 나선 바 있다. 아직 '방송’만 나가지 않고 있던 셈인데, 이는 박정희 정권 시절 과소비 조장과 계층 간 위화감 조성 등을 이유로 미뤄왔던 것에 불과하다.
그러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혼란과 내수부진, 그로 인한 '10년 만의 마이너스 성장’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컬러텔레비전 방송 논의가 다시 시작됐다. 이미 화신전자, 정품물산, 동남전기, 오림포스전자, 울트라전자 등 중견전자업체들이 부도를 내고 이에 따라 중소부품업체 줄도산이 예상되고 있어 시급히 타개책이 필요하던 시점이었다.
확실히 효과는 컸다. 1980년 12월 1일부터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자 불과 8개월 뒤인 1981년 7월까지 100만 대가 넘는 컬러텔레비전이 팔려나갔다. 이에 따라 1981년 전자산업 총생산 규모는 1980년에 비해 생산 33%, 수출 11%가 성장하는 쾌거를 거뒀다. 그러니 사실상 '경기부양책’이 맞지 '우민화’와는 거리가 먼 얘기란 것. 아니 그 이전,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놓고 '우민화 정책’이라 평가하는 나라 자체가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스포츠’ 부문도 좀 황당한 얘기다. 올림픽, 월드컵 등 국제스포츠경기는 '지금도’ 많은 나라들이 하고 싶어 난리인 행사다. 그 자체로 국가브랜드 상승효과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특히 올림픽의 경우 개최국 선정 자체만으로 이제 선진국 반열에 서있거나 그에 다가서고 있단 표식이 된다. 재일교포 차별이 꽤 오래 존재했던 일본만 해도 88올림픽 기점으로 그 이후 일본에 온 이들을 '뉴 커머(new comer)’란 식으로 따로 부르기까지 한다. 자기나라가 웬만큼 먹고살만해진 시점 이후 온 사람들은 '다르게’ 취급하겠단 의도다.
그 외에 프로야구, 프로축구 등 각종 프로스포츠 조성정책은 일정수준 이상 경제성장에 따른 국민여가 제공 일환이라고 보는 게 맞다. 아니, 사실상 '어느 나라’라도 그렇게 본다. 오히려 한국은 박정희 정권 시절 놀지 말고 일만 열심히 하자는 사고에 입각해 그와 같은 국민여가 조성 배려가 다소간 떨어졌단 평가까지 받는다.
마지막, '섹스’ 항목에서 야간통행금지 해제를 거론하는 건 실소를 넘어 이게 과연 제정신으로 작성된 문서가 맞는지조차 의아해질 정도다. 한편, 1980년대 에로영화 붐을 거론하며 이 부분을 강조하는 문서들도 존재하는데, 어디까지나 민간에서 만들어진 트렌드를 놓고 국가정책이라 우기는 것도 한계가 있거니와, 이 같은 현상은 텔레비전수상기 보급이 가속화되는 시점에 극장용 영화가 차별성을 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택하는 전략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일본서도 1960년대 당시 니가츠 영화사 중심으로 에로영화에 해당하는 핑크무비 붐이 있었다. 그러다 일본도 한국도 결국은 영화산업 이노베이션을 통해 정상화된 순서다.
이렇듯 저 '3S 정책’ 실체는, 실제적으로 '사회문화적 자유’ 확충에 가깝다. 어디까지나 '자유’를 확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이를 두고 '우민화 정책’이라 부르면 달리 할 말도 없어진다. 문화 콘텐츠 속 '정치적 견해 자유’는 철저히 차단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한다면, 1980년대 내내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 '바보선언’ '과부춤’, 임권택 감독의 '안개마을’, 장선우 감독의 '서울황제’ '성공시대’ 등 사회비판 및 정치풍자 영화들은 아예 보지도 않고서 하는 얘기들이다. 영화검열은 1980년대 내내 전반적으로, 그리고 전 방위적으로 풀려갔다. 그게 1980년대 '3S’의 실체다.
'3S 정책’ 개념의 원조는 20세기 초반 반유대주의 음모론?
그럼 이 '3S 정책’이란 허상은 대체 어쩌다 튀어나오게 된 개념일까. 문서로서 확인할 수 있는 건 경향신문 1983년 5월 25일자 '여적’이 최초다. “흔히 스크린, 스포츠, 섹스의 두문자(頭文子)를 따라서 현대를 3S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말한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그러다 비로소 '우민화 정책’ 개념으로서 등장하는 게 1983년 11월2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김정수 민권당 의원 질문 내용이다. 당시 프로스포츠 상황을 지적하며 “전형적인 3S 우민 정책이 아닌가”란 의문을 던진다. 동아일보 1984년 5월 24일자 기자칼럼 '홍보의 불균형’까지 가면, “백성들에게 최면을 거는 수단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현대국가에서는 이른바 3S 정책이 이용되고 있다.”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기 좋은 호시절을 비판하는 데 사용되기에 이른다.
뭔가 갑자기 등장한단 인상이다. 이에 대한 배경설명으론, 1980년대 초반 당시 이미 대학가, 특히 운동권 대학생들 사이에서 '3S 정책’은 그럭저럭 빈번하게 거론되던 개념이란 내용이 존재한다. 그럼 그 운동권 대학생들은 또 어디서 '3S 정책’ 개념의 힌트를 얻어왔을까.
국내 문서들을 보면 포르투갈 총리이자 독재자였던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시행했다는 '3F 정책’에서 개념을 빌려왔으리란 내용만 등장한다. 여기서 3F는 Futebol(풋볼), Fatima(가톨릭 성지), Fado(민속음악)를 가리킨다. 즉 스포츠, 종교, 문화예술로 국민들을 우민화시키려 했단 얘기다. 뭔가 어색하다. 특히 당시 포르투갈은 의원내각제를 통한 독재구조였기에 한국과는 조건이 전혀 달랐단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보다 설득력 있는 논리는 다른 곳에서 나온다. 바로 옆 나라 일본서 이미 '3S’란 개념이 나온 바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절 사상가로서 영향력을 떨친 야스오카 마사히로 입에서 바로 이 '3S’가 등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GHQ(Geneal Headquarters), 즉 더글러스 맥아더를 최고사령관 삼은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일본서 점령정책을 실시하면서 “일본을 완벽히 무력화시키는 3R, 5D, 3S 정책을 실시했지만, 일본인들은 오히려 이를 기뻐했다”고 비판하고 나선 바 있다.
여기서 3R은 기본원칙으로서 Revenge(복수), Reform(개편), Revive(부활)를 가리키며, 5D는 중점시책으로 Disarmament(무장해제), Demilitarization(군국주의 배제), Disindustrialization(공업생산력 파괴), Democratization(민주화), 그리고 3S가 보조정책으로서 쓰였다는 것. 그런데 이것도 사실상 음모론에 가까운 게, 야스오카는 이를 GHQ의 가디너 참사관이란 인물로부터 전해 들었다면서도, 이 이름은 어디까지나 '가명’이란 걸 명시했단 점이다. 요즘 말로 '뇌내망상’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3S’는 또 야스오카 마사히로의 창작물조차 아니다. 놀랍게도 그 원전은 독일 나치당 성립과 히틀러 부상에까지 닿아있다. 1903년 러시아에서 첫 발행된 후 1920년대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번역돼 화제를 일으킨 반유대주의 음모론 서적 '시온 장로 의정서’에서 유대인의 세계지배전략 중 하나로 소개된 게 바로 이 '3S’다. 당시 미국 할리우드를 지배하고 있던 유대계 자본을 견제하며 나온 대목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이 '시온 장로 의정서’는 1923년 일본서 전국중학교교장협회 이름으로 교육계에 배포된 바 있다.
'시온 장로 의정서’는 결국 독일 나치당의 유대인학살에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준 역사상 최악의 위서로 평가된다. 그리고 흐름상, 이 서적이 일본교육계에 널리 배포된 1920~1930년대 무렵 동양사상연구소, 긴케이학원, 일본농업사학교 등을 설립해 교육계에 침투한 야스오카 마사히로 등 당대 사상가에 영향을 줘 '3S’란 개념이 널리 설파되고, 이 사상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 내 반미(反美)사상 기반이자 좌익혁명이론 중 하나로서 응용된 것을 다시 전공투, 민민투, 연합적군 등 당시 일본좌익혁명운동을 벤치마킹하던 한국 운동권에까지 전달된 순서란 게 설득력 있다. 결국 반유대주의 음모론부터 거슬러 내려온 사고를 이어받은 것에 불과하단 얘기다.
사회문화적 자유로 우민화를 꾀한다는 게 상식적인 발상이 맞나
물론 그 '시작’이 어디가 됐든, '3S 정책’이란 이론이 실제적으로 '먹혀들어가는 것’이 맞기만 하다면 문제없단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한국 운동권들이 영향 받았을 일본 좌익혁명운동사로 봤을 때부터도, '3S 정책’이란 개념은 예상과 정반대 효과만 내왔단 점이다.
전후 1950년 프로야구를 출범시키고, 1960년대 내내 각종 예술적 표현의 자유와 성적(性的)자유까지도 내준 일본사회 결과는 무엇이었느냐 말이다. 1960년대 전학련으로부터 시작된 일본 좌익혁명운동을 낳게 됐다. 사실 당연한 얘기다. 사회문화적 자유란 궁극적으로 현 지배체계에 대한 도전까지도 이어내게 하는 '사고의 전환점’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국의 1980년대는 비단 문화예술 분야와 스포츠만 육성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 야간통행금지 해제 및 중고교생 두발자유화, 교복폐지 등 다양한 차원에서 사회문화적 자유를 실험하던 시기다. 1970년대 미니스커트 단속, 장발 단속 등등을 포기한 건 물론이다. 이런 식이면 진즉부터 사회문화적 자유를 기반으로 삼아온 서구 선진국들은 모조리 우민화 정책 원조들이 된다. 더 있다. 그럼 북한이나 이런저런 중동국가 등 '진정한 우민화’를 꾀하는 국가들에선 왜 '3S 정책’조차 안 하느냐는 것이다.
애초 '3S 정책’에 영향을 줬다고 '주장’되는 포르투갈 '3F 정책’을 봐도 그렇다. '3F’ 중 문화예술 부분에 속하는 Fado(민속음악)만 해도, 여기서 길러진 파두가수들이 결국 1970년대 반독재투쟁 선봉에 서고, 1974년 카네이션 혁명 때도 라디오방송에서 파두가수 주제 아폰수 곡을 틀며 대중을 독려한 역사가 남아있다. '문화육성’은 결국 어떤 식으로건 정치사회적 '대중 각성’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그 이전 수 십 년에 걸쳐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 흐름을 '우민화 정책’으로서 벤치마킹한다? 어불성설이다.
궁극적으로 '3S 정책’이라 불리는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당시 일련의 정책적 흐름은 국민 소득성장에 따른 대중의 사회문화적 자유화 요구를 수용한 정책들로 볼 수 있다. “6.29 선언은 궁극적으로 1인당 GDP 3,000달러 시대가 열었다”는 말로 잘 표현된다. 진정한 우민화 정책은 사회문화적 자유와 문화예술/스포츠 육성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교육’을 억누르는 방향으로서 이뤄진다. 앞선 포르투갈 독재시대만 해도, 이를 가능케 한 건 실제적으로 '3F 정책’ 같은 게 아니라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초등교육만 강화했을 뿐 중·고등교육은 의도적으로 소홀히 한 정책 흐름 탓이란 설명이 더 붙는다. 그런데 한국은 전후 그 어느 시대건 교육 가치에 최정점을 두고 이를 육성해나간 흐름이다.
어찌됐건 이 같은 점에서 오히려 주목해야할 건, '3S 정책’이란 개념이 대중적으로 그럴싸하게 받아들여졌던 당시 대중의식이라 볼 수도 있겠다. 연예인을 '딴따라’라, TV를 '바보상자’라 부르며 문화예술적 가치들을 폄하하던 시절. 먹고 살기 힘들던 시대, 이런저런 문화여가들을 배부른 소리인양 한심하게 바라보던 당시 시각이 지금까지 이어져올 필요는 없다. '3S 정책’이란 망상도 이제 그럴싸한 음모론으로서조차 폐기돼야 할 시점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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