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법원 조정안을 받아들여 강정마을 불법집회에 대한 손해배상책임 청구를 포기했다. 포기한 손해배상액이 무려 34억 5000만원이다. 경찰 개인들이 백남기 유족에게 살수차 지휘 조종의 과실로 총 6천만원을 배상하기로 했다.
집회의 자유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예외인 '비상’수단이므로 큰 보호를 받는다. 이미 우리나라는 집회에 대한 자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있고, 집회 허가 거부에 대해서도 법원의 신속한 가처분판단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 틀을 갖추고 있다. 집회는 다수의 군중을 전제한다. 폭력집회 등 불법집회가 가지는 위력을 생각하면, 불법집회를 억제하거나 집회의 질서를 경찰병력으로 유지케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정부는 명백히 패소가 예상되는 사안을 제외하고 통상 조정안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1심결과에 승복하는 경우도 별로 없고, 3심까지 가는 경우도 다반사다. 청구권을 포기하거나 상소를 포기하는 결정을 임의로 내리는 것은 불공정한 행정행위로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권리는 공무원 개인이나 정치인 개인의 권리가 아니기에 법원의 법리에 따른 판단을 따르는 것이 가장 공정하다. 정부는 이미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 등에 의해 발생한 공사방해 행위에 대해 시공사에게 275억원을 배상한 상태였다. 그 원인을 제공한 강정마을 주민 등에게 구상금을 청구한 것인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국고가 그대로 손실된다.
이것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무엇일까? 아무리 불법적인 행위를 하더라도 불법적인 행위의 주체에게 우호적인 상황으로 바뀐다면, 그 불법은 면책된다는 점을 알려준다. 무엇보다 법원의 강제조정에 정부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방안으로 처리한 행위는 서로 견제해야 할 법원과 행정부가 자신의 역할을 방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에 따라 소송의 결과가 달라진다면, 앞으로 정부의 소송은 유권무책임, 무권유책임이 된다.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라고 번역하는 Democracy는 원래 '다수의 지배’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헌법 제1조 1항에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것은 단순히 '다수의 지배’가 아닌 국민을 위한, 국민이 주인되는 국가를 의미한다. 정부의 자산은 어느 정치세력의 지지자들에게만 징수된 세금이 아니라 국민들 모두에게 징수된 고혈이다. 특정 세력에 이끌려 손해배상청구를 포기하는 것은 모든 국민이 일부 세력을 위해 존재하는 꼴이 된다. 이는 민주공화국이 나아갈 길이 아니다.
불법적인 집회로 발생하는 손해를 청구할 수 없다면, 집회가 불법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는 질서유지는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백남기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찰 개인이 백남기 유족에게 배상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지금 공권력에 대한 법원의 평가는 마치 인간에게 신이 되지 못했음을 비난하는 것과 같다. 급박한 사정이나 상황들이 있다. 그때마다 예상할 수 있는 모든 대안을 고려한 판단을 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그것을 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경찰 개개인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어떻게 경찰들이 치안을 유지하려고 할까. 경찰을 무리한 잣대로 민사 배상의 위험에 빠지게 하면, 일선 경찰들이 선택할 방법은 복지부동뿐이다.
이미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11월 22일 유성기업의 임원은 노조원들로부터 집단폭행 당해 전치12조의 중상을 입었고, 출동한 경찰은 피해자를 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현행범으로 체포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지켜보기만 했다고 한다. 경찰이 가해자를 저지하다가 가해자가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어떻게 될까. 경찰은 급박한 사정에서 신이라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이해찬 대표는 경찰의 행위를 비판했지만, 애초 경찰의 소극적 행위를 조장한 것이 현 정부가 아니었는지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는 한 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고, 눈을 가리고 있다. 권력에 따라 법의 잣대가 흔들리고,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공권력의 행위에 인간이 아닌 신에게나 들이댈 만한 잣대를 들이 댄다면,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저울을 들고 있을 이유는 없다. 내편과 남의 편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법 질서가 바로 서기를 다시 한번 기대해 본다.
원영섭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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