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대중문화 한류의 발판은 88올림픽과 2002월드컵이었다?

이문원 / 2020-08-18 / 조회: 8,720

줄곧 민간이 일궈낸 한류성과를 놓고 호시탐탐 숟가락(?) 얹으려 하는 공적개념을 경계해야 한단 얘기만 해왔는데, 이번엔 공적개념 차원에서 할 수 있는 한류 부흥책도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네임드’ 국제스포츠경기 유치다. 그 효과에 대해선 대부분 '국격 상승’ 같은 애매한 차원으로만 설명되곤 하는데, 그중 콕 집어, 하여간 대중문화 한류 차원으론 늘 효과를 내왔고, 상당부분 '결정적인 효과’를 내줬다고도 볼 수 있다. 차례로 살펴보자.


88올림픽은 한국문화 세계 진출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일본에서 사용하는 '뉴커머(new comer)’란 용어가 있다. 특별히 법률적으로 규정된 용어는 아니고, 주로 미디어 상에서 언급된다. 한때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에 정착한 한국인들을 가리키는 용어란 해석이 있었지만, 실제 용례들과 너무 달라 요즘은 다른 식으로들 해석한다. 1980년대 후반 한국의 해외여행자유화 이후 일본에 건너간 한국인들을 가리킨단 것이다. 그런데 이 역시도 설명하기 애매한 기준이다. 해외여행자유화가 이런 식의 구분에 대체 무슨 영향을 끼친단 말인가?


실제로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한 한국인들을 가리킨단 해석이 맞다. 그럼 왜 88올림픽이 기준이 될까. 단순하다. 올림픽이란 행사 자체를 '어느 정도 경제력 있는 국가에서만 유치할 수 있는 행사’로 보는 까닭이다. 특히나 일본에선 1964년 도쿄올림픽을 일본경제 큰 분기점으로 여기고들 있기에 더 그렇다. 결국 '뉴커머’는, 한국이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는 조건이 됐을 때 넘어온 이들이니, 그야말로 '못 먹고 못 살아서’ 넘어온 올드커머들과는 다른 식으로 취급하겠단 차별적 용어라고도 볼 만하다.


그럼 이런 88올림픽 기점 시각은 문화적 차원에서 어떻게 드러났을까. 가장 먼저, 이 시기를 중심으로 한국 음식 붐이 일본에서 일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엔 이전부터도 재일교포 거주지 중심으로 한국식당들이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그 지역’을 벗어나진 못했다. 재일교포들이 불고기를 변형시킨 야키니쿠 정도만 대중화 단계였고, 당장 곱창을 가리키는 호르몬구이만 해도 재일교포 거주지에나 가야 먹어볼 수 있는 메뉴였다. 이게 달라졌단 얘기다.


1983년부터 대형출판사 소학관 계열잡지 빅코믹스피리츠에서 연재를 시작한 요리만화 '맛의 달인’만 봐도 알 수 있다. 1986년이 되자 갑자기 일본 내 '한국요리 붐’을 거론한다. 처음엔 '김치’ 편으로 시작해, 1988년 서울올림픽이 막을 내리자마자 곧 본격적인 '한국요리’ 편을 시작하며 '한국요리 vs. 일본요리’란 배틀(결과는 당연히 무승부다)까지 선보인다. 한국에서 올림픽을 연다는 사실이 홍보되고, 그 전초전 격으로 서울아시안게임이 1986년 열릴 시점부터 갑작스레 한국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 코리아타운의 한국요리들도 하나둘 '굿파(국밥)’ '비빈바(비빔밥)’ 등 이름을 달고 시부야 등 중심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는 것.


당연히 일본만의 얘기도 아니다. 1986년 오우삼 감독 영화 '영웅본색’엔 한국가수 구창모의 ’희나리'가 BGM으로 쓰였다. 이에 한국에서도 당시 화젯거리가 됐지만, 정작 홍콩 측 입장은, '얼마 전부터 홍콩 번화가에서도 한국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정도였다.


미국의 경우는 더 극적이었다. 서울올림픽 바로 다음 해 등장한 유니버설영화사 제작, 스파이크 리 감독 영화 '옳은 일을 해라’에 아예 한국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재미교포 캐릭터가 등장하고, 대사 중 서울올림픽까지 언급된다. 아카데미상 주요부문에 노미네이트된 할리우드 메이저스튜디오 영화에 '한국’과 '한국인’, '한국의 사정’이 6·25전쟁 이외의 이슈로 거론되기 시작한 첫 사례 중 하나가 됐다.


결국 흐름은 이런 식이다.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나라’인 일본부터 88올림픽 기점으로 한국과 한국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극적으로 변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까지도 매년 그해 최고시청률을 기록하는 공영방송 NHK 연말가요프로그램 '홍백가합전’에서 뜬금없이 한국가수를 처음 초청한 게 바로 서울올림픽 직전, 1987년이었다. 조용필이 출연해 '창밖의 여자’를 한국어로 불렀다. 이어 1988년엔 조용필과 계은숙으로 한 명이 늘었고, 서울올림픽 다음해인 1989년엔 조용필, 계은숙, 김연자, 패티김 등 4팀이 출연, K팝이 일본열도를 뒤흔들고 있는 지금도 깨지 못한 최다초청기록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렇게 한국문화도 음식→음악→영화 순으로 일본에 퍼지기 시작한다.


이어 올림픽을 개최해본 적 없는 아시아 각국으로 한국문화가 서서히 뻗어나가기 시작, 1990년대 후반엔 한국 TV드라마의 인기를 바탕으로 대만에서 처음 '한류(韓流)’란 용어가 탄생되기에 이른다.


서구도 사실상 비슷한 맥락이다. 한국영화가 세계 3대 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본상을 차지하는 사건이 1987년 일어났다. 베니스영화제에서 배우 강수연이 영화 '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건이다. 당시 강수연은 수상 자체를 예상하지 못해 아예 시상식에 참석하지도 않았던 일화가 있다. 그만큼 '뜬금없는’ 관심이었던 셈이다. 이후 한국영화는 1989년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1990년대부터는 세계 3대 국제영화제 '본선진출’만큼은 어렵지 않게 이뤄내는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한편 한국영화감독의 미국진출도 1987년 할리우드 B급 영화사 뉴월드 픽쳐스에서 '침묵의 암살자’를 찍은 이두용 감독을 필두로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다.


모든 일이 1987~1989년 사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 '트리거’를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보는 시각은 딱히 어색하지 않다. 전 세계 40억 이상이 지켜보는 스포츠축제 개최국, 그것도 '일정수준 이상 경제력을 지닌 나라’란 표식이 되는 개최국 이미지가 '분명히’ 작동했으리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국문화 홍보에 결정적인 방아쇠 역할을 했던 2002 한일월드컵


2002 한일월드컵도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늘 한국문화 '얼리어답터’ 역할을 하던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 측 반응이 훨씬 격렬했단 점이 더 붙는다. 한일 '공동개최’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일본과 한국이 그 어떤 의미에서건 '동급’이 돼버린 순간이었기 때문.


2000년대에 이르면 이미 아시아 전반을 한류가 장악해가던 시점이다. TV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사랑이 뭐길래’ 등을 비롯해 트렌디드라마, 가족드라마 가리지 않고 시장을 침투해갔고, 1세대 아이돌 H.O.T.가 중국공연 대박을 이루는 등 K팝 초기 침투에도 성공하고 있었다. 곧 스타TV 등 아시아 엔터테인먼트 케이블채널은 K팝 일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만은 예외였다. 여전히 한국드라마는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고, K팝 역시 뚫고 들어갈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한국영화가 일부 유통돼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일본서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핫’한 소재, 즉 북한 관련 블록버스터들만이 성공을 거뒀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등이다.


그러던 것이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나고, 사실상 국가홍보 차원에서 완벽한 한국 측 승리(?)로 마무리되고 난 후, 상황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가수 보아는 200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초반 반응은 형편없었다. 심지어 일본 측 매니지먼트를 맡은 에이벡스 관계자로부터 “일본에서 콘서트를 열려면 10년은 걸릴 것”이란 악담까지 받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2002년이 되자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돼 급작스런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2002년 발매된 정규앨범 1집 'Listen to M Heart’가 100만 장 가깝게 팔리는 이변을 낳았다. 그리고 한일월드컵이 막 종료된 2002년 8월 발매한 싱글 'Valenti’로 보아는 첫 일본 오리콘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지금은 당연한 듯 여겨지는 일본 내 K팝 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TV드라마 쪽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들이밀어 봐도 교포대상 케이블채널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2003년 KBS '겨울연가’가 위성방송 BS에서 현상적 인기를 얻고, 여세를 몰아 2004년 NHK에서 방영되면서 비로소 신드롬이 일었다.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같은 윤석호 감독 전작인 '가을동화’가 훨씬 호평을 받고 있었지만, 일본에선 한일월드컵 이후 소개된 '겨울연가’가 튀어 오른 것이다. 이후 '아름다운 날들’ 등 수많은 한국드라마가 일본 지상파방송에서 방영돼 일종의 문화현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영화 쪽도 TV드라마 영향을 받은 측면이 강하다. 일단 6·25 내지 남북관계 소재를 벗어나서 히트작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겨울연가’ 인기를 등에 업은 배용준 주연 '외출’이 현상적 인기를 누렸고, 다시 정우성과 손예진 주연 '내 머리 속에 지우개’, 전지현 주연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등등 트렌디드라마풍 연애영화들 인기가 거세졌다. 와중에 6·25 소재 영화 인기도 여전해 '태극기 휘날리며’가 대히트하는 분위기를 낳기도 했다.


최소한도 일본한류는 '정확히’ 2002년 한일월드컵을 거치며 비로소 '메인스트림’으로 거듭났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른 식으론 사실상 해석 자체가 안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금은 미심쩍은 나라’ 이미지에서 갑자기 '일본과 함께 국제스포츠경기를 유치할 수 있는 나라’가 됐으니, 그것도 축구는 일본에서도 당시 야구를 누르고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가 돼있었으니, 그 영향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여타 아시아권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축구 열기는 '이쪽’이 더 열렬하다고 볼 수 있다. 그 개최국이자 가장 뜨거운 응원열기로 관심을 모았던 한국에의 신뢰가 더더욱 깊어졌다. 월드컵 직후부터 한국드라마는 홍콩과 대만 등 동남아시아 및 중동까지도 넘어가기에 이른다. 2004년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은 아시아 각국에서 '역대 시청률 1위’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다. 한류상품이 '인기 있는 상품’에서 '시장 최정점에 선 상품’으로 거듭나게 된 순간이다. 한국영화와 K팝도 차례로 아시아권을 휩쓸며 주류화 되는 수순을 밟았다.


미국과 유럽 등 서구지역에선 사실상 2002 한일월드컵이 아시아에서 '한국’이란 나라의 고유 이미지를 알린 계기로 다수 언급된다. 88올림픽이 '한국도 먹고사는 나라’ 정도의 신뢰를 줬다면, 2002 월드컵은 '아시아 중에서도 한국은 뭔가 또 특이한 이미지’란 인상을 남겼다는 것. 특히 응원열기 등이 곳곳에서 화제가 되면서 서구 언론에선 한국인들을 가리켜 “아시아의 라틴계”란 별칭까지 붙였다.


이전까지 동북아시아인들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는 '일본’이 지닌 이미지 중심으로 이뤄져있던 상황이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며 조용한, 성실하게 일하는 민족 정도. 그런데 갑자기 그런 고정이미지를 박살(?)내는 면모를 보게 되면서, 이쪽의 문화는 엄연히 차별적이란 인상을 심어주게 됐다는 것.


이후 '그런’ 문화상품들이 서구권에서 각광받기 시작한다. 2004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이후 2019년 '기생충’ 직전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영화’로 자리매김했던 '올드보이’부터가 그랬다. 강렬하고 처절한 복수극이며, '살인의 추억’ '악마를 보았다’ '추격자’ '똥파리’ 등 그렇게 거칠고 열정적인 분위기 콘텐츠들 중심으로 계속 서구권에서 각광을 받아왔다. 다시 말하자면, 단순 아시아국가 일부란 차원이 아니라, 콕 집어 한국만의 '고유 이미지’가 성립되던 시점이다.


'쿨 재팬’ '쿨 브리타니아’도 엄밀히 '이 같은 속성’을 인지한 국가사업


그리고 이제 2020년이다. 한류는 이미 더 설명해봤자 입만 아플 만큼 글로벌화 돼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국제스포츠경기 유치’는 여전히 역할을 하고 있다. 올 초 K팝 열풍을 언급하던 프랑스 등 유럽 언론에서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언급하면서다. TV인터뷰 중에도 유럽 내 K팝 열풍 진원지로 이른바 '한국의 마카레나’였던 2012년 '강남스타일’ 열풍과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언급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아시아권에선 딱히 열광적이진 않지만, 동계스포츠가 생활스포츠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북반부 유럽사회 입장은 또 다르단 점이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한 마디로,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해 한국이란 나라의 이색적인 면모(주로 개막식과 폐막식 이벤트 중심으로 이미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를 알게 됐다는 반응들이 많았다.


이제 논의는 다시 본래 화두로 넘어간다. 지금껏 공적개념이 한국대중문화산업에 '직접’ 개입해 효과를 발생시킨 경우란 '사실상 전무’하다. 문화란 애초 그런 식으로 육성되는 분야가 아니란 얘기다. 어디까지나 경제부흥을 통한 자국민들 왕성한 소비력을 바탕으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퀄리티가 올라가 마침내 국제경쟁력을 얻게 되는 구조다. 여기에 공적개념이 개입할 지점은, 엄밀히 말해 각종 관련규제 완화 및 철폐 외에 다른 게 없다.


그러나 '국제스포츠경기 유치’만은 다른 얘기란 것이다. 흔히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네임드’ 국제경기 유치는 전반적 국가이미지 향상에 도움을 준단 전제가 깔려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빠르게 효과를 내는 분야가 바로 문화 분야다. 애초 스포츠와 문화는 같은 '여가산업’으로서 기능하는 부분이 있어 연결되기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속성은 해외에서도 모두 인지하고 있다. 예컨대 2010년 일본문화의 달라진 이미지를 해외에 알리자는 취지로 경제산업성 산하에 설치시킨 '쿨 재팬(Cool Japan) 사업’은 정확히 일본의 올림픽 유치운동과 '동시에’ 이뤄졌다. 그런 국제스포츠경기 유치와 문화산업 부흥은 정확히 일치한단 차원에서 비롯된 전략이다. 그리고 2013년 마침내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가 결정되면서 '쿨 재팬’ 무브먼트도 급격히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간 한류에 밀렸던 J팝, 재패니메이션 등 일본대중문화를 세계에 알리겠단 취지였다.


그리고 이 '쿨 재팬’은 일본만의 고유 전략도 아니었단 점이 중요하다. 그 원전은 영국 토니 블레어 정권이 추진하던 '쿨 브리타니아’ 사업이었고, 이 역시 2012년 런던올림픽을 바라보며 기획된 사업방향이었단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니, 적어도 현재까지는, 바로 '이 지점’만이 공적개념이 자국 문화산업 육성에 실제적 효과를 내줄 수 있는 유일한 방향이란 얘기가 된다. 상황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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