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청년, 이승만과 함께 자유주의의 날개를 달다 <자유경제원 토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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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자유경제원 2015-03-31 , 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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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경제원 토론회 / 이승만 탄신140주년>
청년, 이승만과 함께 자유주의의 날개를 달다
우남 이승만은 만 29세의 나이였던 1904년 한성감옥에서
불후의 명저 『독립정신』을 집필합니다. 이 책은 한국인 최초의 외교사 저술서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대한제국의 국운을 걱정하며 자유와 책임, 통상, 근대화의 중요성과 함께
마음속에 독립정신을 굳게 가지고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는 근대정신과 국제질서를 이해한 선각자이자 목숨을 걸고 민권개혁과 국민의 계몽을
이루고자 노력했던 독립협회의 청년지도자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경제사상과 그가 펼친 정책들에 대해 한국의 청년들은
아직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배우고 아는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오랜 기간 많이 왜곡되고 폄하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자유경제원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생애 그리고 시장경제에 대한 사상과 정책에 대해 청년들이 함께 논의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탄신 140주년 기념 청년토론회일시 ▍ 2015년 3월 26일 목요일 오후 4시장소 ▍ 자유경제원 5층 회의실주최 ▍ 자유경제원문의 ▍ 자유경제원 정재청 연구원(02-3774-5024)■ 사회전희경 (자유경제원 사무총장)발제: 김규태 (경제진화연구회 청년위원)토론: 배예랑 (대한민국 건국회 청년단 회원)토론: 이건희 (인천대학교 무역학부)토론: 전계운 (충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토론: 정재청 (자유경제원 연구원)
<발제문>

20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박정희, 이승만, 김구, 김일성, 김정일 등
각 단어로 구글검색한 결과다.
입지는 박정희 김정일 김일성 보다 못하다.
총1220건이 나왔다. 학위논문 136건, 국내학술논문 522건, 단행본 514건, 연구보고서 48건이다. 박정희에 대한 연구 건수는 총 2047건, 김구는 743건, 김일성과 김정일은 각각 2197건, 2405건이다. 2015년 '우남 이승만’의 학문적 입지는 김정일, 김일성, 박정희의 절반에 불과하다.
우남에 대한 과소평가를 극복하고 우남의 입지를 널리 알리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있을 것이다. 오늘을 계기로 함께 했으면 한다.
이제부터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유는 우리가 그토록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해서 얻은 소중한 유산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전쟁과 경제적 궁핍이 있는 기간에도 손상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무엇보다도 우리는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했지만 자유에는 자유 그 자체를 파괴할 권리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공산주의는 자유의 반대개념이며 모든 자유와 개인 및 단체를 즉시 파괴하기 때문에
한국에는 공산주의자가 될 자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자유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 메시지 중에서 -
우남 이승만은 한국에 공산주의자가 될 자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자유는 결코 없을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5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종북을 표방하는 세력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우남의 자유주의 사상과 명백히 대립하는 존재다.
지난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 해산을 통해
우남의 자유주의(방어적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에 옮겼다.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는 조선노동당이 제시하는 정치 노선을 절대적인 선으로 받아들이고 그 정당의 특정한 계급노선과 결부된 인민민주주의 독재방식과 수령론에 기초한 1인 독재를 통치의 본질로 추구하는 점에서 우리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피청구인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민항쟁이나 저항권 등 폭력을 행사하여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모든 폭력적ㆍ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다수를 존중하면서도 소수를 배려하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기본원리로 하는 민주적 기본질서 에 정면으로 저촉된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 중에서 -
![1923년 <공산당의 당부당> 논문을 발표한 잡지 [태평양 잡지]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발간. 표지사진은 제주도 폭포.](http://data.newdaily.co.kr/data/photos/20150314/shp_1427712430.jpg)
(2) 하이에크 보다 20년 앞선 우남의 선견지명
자유주의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의 대표 저서는 『노예의 길』이다.
『노예의 길』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한 저서로 1944년 출간되었다.
우남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부당성으로 다섯가지를 지목했다.
첫째,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열심히 일한 자나 일을 하지 않은 자나 공평하게 나누어 갖게되면,
모든 사람이 일을 하지 않고 거저 얻어먹으려는 자가 나라 안에 가득 차게 된다.
둘째, 자본가를 없애자?
경쟁이 없어져 상공업 발달이 어려워지고 물질적 개명이 중지된다.셋째, 지식계급을 없애자?
인민의 보통 상식 정도를 높여서 지금의 학식으로 양반노릇 하는사람들과 비등하게 되자 하는 것은 가하거니와, 지식계급을 없이 하자 함은 불가하다.넷째, 종교를 혁파하자? 종교를 없애면 인류의 도덕상 폐해가 막대해 진다.다섯째,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이 하자?
이에 대하여는 공산당 속에서도 이론이 많을 뿐 아니라, 지금 공산당을 주장하는 러시아만 보아도 정부와 인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는 사정을 자기들도 모두 안다.
우남은 1923년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통제경제 방식이 실패로 끝나리라 예견했다.
이는 하이에크 보다 20여년 앞선 선견지명이다.
평온과 풍요를 구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1952년 전시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개혁을 단행할 때였다.
화폐 개혁 원안에는 “100 대 1환으로 통화단위를 내리면서, 통화량을 줄이기 위해 일정한도를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 2~3년간 사용을 동결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재산을 정부라고 해서 권력을 가지고 강제로 2년 또는 3년 동안 동결시켜 못쓰게 한다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자본주의의 가장 좋은 점은 사유재산제도를 엄격히 보호해 주는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국민의 재산사용을 마음대로 제한하면 누가 정부를 믿겠느냐”고
강조했다.
긴급금융조치법안과 대통령긴급명령 승인만이 통과되었다.
정당한 보상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940~1950년대 온 국민에게 자유주의 민주주의 재산권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
한반도에는 '사유재산을 철저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의지를 지닌 대통령이 있었다.
유일한 이유를 꼽자면, 경제발전 리더쉽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남은 진짜로경제에 무지했을까?
아래는 1953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이 덜레스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중의 한대목이다.
"브라운슨 씨는 한국 경제의 재건을 위해 5억1천5백만 달러가 배정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뉴욕, 도쿄, 서울에 수많은 직원을 고용하려면 당연히 엄청난 돈이 듭니다.
하지만 가장 긴요한 비료, 시멘트, 발전소 등 공장은 하나도 건설되지 않았습니다.
이들 프로젝트 중 일부라도 완성되어 한국 경제를 도왔다면 경제 상황이 이렇게 나쁘진 않을 것입니다.
일본 등지에서 비료를 수입하기 위해 매년 2천만 달러 이상의 돈이 한국에서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일본이나 다른 비료 수출국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한국 경제를 재건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됩니까?”“이제까지 미국이 준 기금은 의도된 목적을 위해 전혀 쓰이지 않고 낭비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돈은 일본에서 수입하는 소비재 구입을 위해 지불되어 한국의 산업 재건이 아닌 일본 경제 재건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 경제에 필수적인 공장은 하나도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미국경제협력국과 운크라 인건비는 때로는 지출의 16%에 달하고 때로는 9%에 달합니다.”
미국은 한국에 투입한 원조자금으로 한국이 국내에서 필요한 소비재를 수입하도록 몰고 갔다.
일본을 생산기지로 삼고, 한국을 수입 소비기지로 삼는다가 미국의 동북아 경제부흥 복안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 국내에 생산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으로부터 비료를 수입하는 데 들어가는 달러도 아까워했다.
이어 비료공장 유리공장 시멘트 공장을 건설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연료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석탄을 채굴했고, 채굴한 석탄 수송을 위해
강원도를 잇는 함백선, 영월선 열차를 개통했다.
원자력 개발을 시작한 것도 이승만 시절의 얘기다.

우리나라는 당시 얼마나 못 살았을까.
1941년은 일제 강점기 중 가장 경제가 좋았던 시기라고 한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 기준으로 따져서 1941년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26년이 지난 1968년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35달러. 1940년대 후반의 남한은 지구상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우남 이승만은 최빈국 나라를 이끌던 지도자였다.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황을 뛰어넘는 비전을 지니고, 감당하기 버거웠던 부국강병의 기초를
놓았다. 이 토대를 발판으로 박정희 정부는 가열 차게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다 잘 살도록 만들어야 될 것이니, 그러한 결심을 가지고 하면
영광스러운 역사를 만들게 될 것이다.”
외교는 잘했지만 경제는 무능했다는 비판 말이다.
하지만 세간의 오해와 달리 우남은 상업과 공업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수출을 독려하면서 무역입국의 중요성 또한 강조했다.
우리 한국은 특히 인구 증가율이 높기 때문에(연평균 증가율이 1.5%~2%)
우리 국민소득은 틀림없이 이에 비례하여 증가할 것입니다.그러나 토지의 비율이 불변인 상황에서는 노동요소를 더 높인다 해도 총생산에는 그리 큰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며, 설사 우리가 기계화된 농기구, 비료 및 농업용 살충제 또는 배수로, 관개수로, 농업용 도로 및 기타 사회간접자본시설 등의 고정자본시설을 통한 혁명적인 기술변화 등과 같은 광범위한 <직접자본투입방식>을 채용한다 해도 부족한 토지에 풍부한 노동력의 완전한 대체는 불가능합니다.따라서 우리는 산업화에 비중을 두어야 하는데, 이는 자본기금이 엄청나게 필요한 부분입니다. 만약 적절한 속도로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한국의 인구는 장래에 어려운 문제가 될 것입니다.한국의 개발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자본의 부족입니다.- 아이젠하워 정부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관계 등에 관하여 남긴 영어 연설’ 중 -
영어 연설의 요지는, “미국의 원조기금이 축소되면서 경제의 생산부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자본이 줄어들어 산업화의 발전 속도가 주춤해졌다”는 말이다. 우남은 해당 영어 연설을 통해, 아이젠하워 정부가 한미관계를 고려하여 미 의회에 증액 요청을 하기를 희망한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게든 자본을 끌어와 경제개발을 하려 했던 경제대통령 이승만의 고뇌가 느껴진다.

정치제도의 성패는 국민 수준에 달려있다”고 언급했다.
“민주국가 국민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처럼 적에 결사항전하기 위해 하나의 세력으로 연합을 하지는 않습니다.따라서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개인들의 행동은 그들이 속한 국가의 힘을 약화시키는동시에 적에게 패배할 가능성을 높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편 우남은 일찍이 민주주의의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토로하기도 했다.
“민주주의 최대의 약점은 일반 선거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광범위한 대중의 인기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중의 지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이것이 그들을 소심하게 한다. 그들은 어떤 코스가 옳은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대신 어떤 프로그램이 최대의 득표를 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국가의 정책은 의지할 것이 못된다.
지도자들은 오늘 약속한 것을 형편에 따라 내일 포기할 수도 있다.”
(2) 한국의 '떼법’ 민주주의, 우남의 통찰력
그런데 정치인은 자신들을 뽑은 국민의 수준을 그대로 대변한다.
결국 남 탓은 금물이고 국민들 스스로 자신의 미개함을 탓해야 한다.
'천민민주주의’가 도래하고 있다.
우남이 지적했던 민주주의의 딜레마가 지금 우리 곁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1904년 한성감옥에서 러일전쟁 소식을 듣고 몰래 저술한 옥정저서 [독립정신] 현대판 표지.](http://data.newdaily.co.kr/data/photos/20150314/shp_1427711780.jpg)
대한민국. 모든 것의 시작은 1904년 한성감옥에서였다.
29살 이승만은 옥중에서 [독립정신]을 썼다.
토론회에 참석한 우리와 엇비슷한 연배 시절, 사형수 이승만이 죽음을 앞에 두고 밝혔던
우리나라의 근본정신이다.
“설령 남의 도움을 받아 형편이 좋아지게 될 기회가 있거나 먹고사는 것이 좋아지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같은 도움을 거절해야 한다. 독립심을 가지고 지식과 기술을 배워 높은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본받으려 한다면 그들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지난날 사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이 차츰 변하여 자립정신을 가지고 사회에 기여할 것이다.”
통상과 교류는 이로운 것이다 中
“오늘날 세계에서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들은 서로 통상하면서 교류하는 가운데 이렇게 발전된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개명한 시대를 맞아 우리나라도 잘만 한다면 그들처럼 발전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 (중략)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무엇을 빼앗으러 오는 것이 아니다.통상하고 교류하여 서로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들을 막을 수도 없고 막을 이유도 없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옛날보다 몇 배 더 열심히 일하여 그들이 하는 것을 배우고 본떠서 그로부터 이익을 얻어 그들처럼 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그 나라가 누리는 영광과 번영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더라도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은 모두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재산을 한푼이라도 빼앗아 가는 사람이 없다. 그들의 자유와 권리는 보호되며, 아무도 그것을 침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행복해지고,
서로 돕고 위로하는 가운데 인정과 우애가 커진다.
상업과 무역을 권장하여 다른 나라로부터 재물과 금은보화를 벌어들이고, 공업과 농업을 진흥시켜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사람의 가치도 매우 소중히 여긴다. 기계는 편리하고 빨라서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며, 모든 사람이 골고루 교육을 받게 되고, 도덕과 신의를 소중히 여긴다. 누가 신사숙녀인지 자연히 드러나며, 순리가 통하고 법률이 공평하게 적용되어 나쁜 사람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약한 사람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
“독립심, 책임감, 자립정신을 지닌다. 통상과 교류를 통해 서로를 이롭게 한다.
재산을 포함한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며 아무도 이를 침해할 수 없다.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위로한다. 도덕과 신의,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순리가 통하고 법률을 공평히 적용한다.”
우리 세대가 아직 이루지 못한 미래라고 말할 수 있다.
![1941년 출근한 영문 저서 [일본의 내막] 표지. 일본 천황주의 정체를 폭로하고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을 정확히 예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http://data.newdaily.co.kr/data/photos/20150314/shp_1427712761.jpg)
김용식 전 외무장관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1955년 진해 휴양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나눴던
대화 한 토막을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자네,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 줄 아는가?
나는 늘 하나님께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들 못지않게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올 때에, 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네.”“각하, 언제쯤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겠습니까?”“한 30년 걸릴 걸세. 그 때까지는 지금처럼 바쁘게 지내야 할 걸세.”
60여 년 전 이야기가 사진 속에 펼쳐졌다. 부서진 교회 안에서 동생을 업고 기도하던 소녀,
폐허가 된 거리를 헤매던 고아, 강추위에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다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
그로 인해 태어난 지 2년이 채 되지 않던 대한민국은 아무 것도 없는 '무’ 에서
자생적 질서를 전제로 한다. 자유주의는 여기서 드러나는 인간의 한계와 세상의 어리석음에 대해 전한다. 자유주의의 요점은, 개인의 선택과 충동은 누군가로부터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의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 존엄 뿐 아니라 종국에는 생명까지 말살하려 한다.
우리 모두는 부모세대가 피와 땀으로 열었던 생명의 길 한복판에 서있다.
자유주의는 남들에게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삶의 준칙이다.
자유주의는 나를 자유케하는 원동력이자 생명의 길을 지키려는 노력의 원천이다.
무상복지, 포퓰리즘 민주주의의 폐해, (사회적경제 공유경제 경제민주화 마을공동체 등으로
나타나는) 사회주의적 생활방식과 이를 주창하는 꼬뮤니스트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경계해야 할
이 땅 모든 이들의 자유와 생명,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해야 한다.


배재학당은 조선시대의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이자, 국제학교로 다양한 사고와 지식, 그리고 문화를 접할 수있는 장소였다. 특히 미국에서 막 돌아온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토론식 수업을 펼쳤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접한 이승만은 대한민국에도 자유와 평등이 꽃피는 사회를 꿈꿨다. 나랏님을 위해 존재하는 국민이 아닌, 나라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즉,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꿨다.
이승만은 왕족출신에양반신분이었다. 그러나 벼슬조차 받지 못하는 몰락한 왕족이었고, 양반이지만 가난한 평민과 섞여 살았다. 누구보다 평민들, 그리고 천민들의 고통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꿈꾸는 양반은 꿈을 위해 움직였다.
이승만의 모든 사상과 그 사상에서 비롯된 정책들은 기독교 정신을 담고 있다.
즉 이승만의 청년시절 한성감옥에서의 회심이 본질적으로 그를 움직이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회심은 한 사람의 생명과 가치를 소중히 여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타고난 탁월함과 천재성에 결합된 애민정신과 애국정신이 지금의 대한민국 발전에 초석을 놓은 셈이다.
토지의 공평한 분배가 모든 국민을 자유와 평등으로 이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각자의 재산으로 열심히 일해서 각자 먹고 사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로의 첫 걸음이었다. 국가가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할 때, 보호를 받은 개인은 마음 놓고 자신의 자본을 갖고 더 노력하고 계발해서 더 높은 차원으로 자신을 이끈다. 국가는 결국 개인의 집합체이다. 각자가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면, 국가의 위상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진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제정헌법 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농민들은 소작농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승만은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을 취했다. 가난하고 불쌍하다고 퍼주기 식이 아니었다. 노력을 통해 자신이 성취할 수가 있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열심히 돈을 벌어 자신의 땅을 샀다. 직접 돈을 벌고, 내서 산 땅인 만큼 더 열심히 가꾸려 노력했다. 즉 개인의 경제 자립을 도운 셈이다.
이 토지개혁이 우리나라 지금의 시장경제의 토대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토지개혁 이외에 이승만의 애민, 애국리더십으로 빛나는 또 다른 한 가지는 교육혁명이다.
이승만은 개인의 교화와 교육이 나라를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1904년 11월 <신학월보>에 실린 글을 보면 이와 같은 그의 신념을 잘 볼수 있다.
“나라가 나라 노릇하자면 사람이 먼저 사람 노릇을 하게 되어야겠고
사람이 먼저 사람 노릇을 하자면 가르치고 배우는데 있으니
대저 학교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요 또한나라를 만드는 곳이라고도 하겠사외다.”
해방 전,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아본 사람은 14%에 불과했으며, 문맹률은 80%가 넘었다.
건국 헌법 16조는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 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라고 명시되었다. 이승만이 실시한 의무 교육제는 모든 국민을 평등으로 이끌었다.
첫째로 무상으로 제공하는 교육이었기에 경제력으로 인해 학교를 못 들어갈 수는 없었다. 부모의 뜻이나 가정환경과는 무관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둘째로는 남녀차별을 철폐한 모두에게 적용되는 교육권이었다.
이승만이 물러날 당시, 대한민국의 대학생 비율이 영국보다 많았으며 여대생도 이승만 집권 초기에 비해 17배나 늘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유학, 연수 등의 다양한 형태의 외국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했고, 자그마치 2만여 명이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보냈다.
또한 문맹퇴치 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성인들에게도 교육의 장이 열렸으며 80%가 넘던 문맹률은 그가 물러날 때엔 20% 이하로 감소했다.
덕분에 꿈을 꾸고 도전 하면 이룰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토지개혁과 더불어 국민 한 사람을 자립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을 키우는 보조 장치의 역할을 만들어 준 셈이었다.
이렇게 키워진 인재들은 박정희 대통령 때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다.

토지개혁은 농민에게 토지가 돌아간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땅을 판 자본가는 기업인이 될 수 있었고, 자본가들이 기업인이 되면서 상업과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교육혁신으로 인해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늘어나면서 상업과 공업의 양뿐만 아닌 질도 개선되었다. 이렇게 발전한 상업과 공업을 통해 무역을 하면서 국가 경제가 발전했다.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 8대 무역대국이 되었다.
그는 개인의 자립정신과 책임감을 통해 국가를 이끌 수 있는 국민을 키우고자 했다.
그러한 국민을 키우기 위해선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주고 권리에 알맞은 정책이나 제도를 제공하는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이렇게 세워진 국민들이 결국은 나라를 세우는 애국자임일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당장 맺혀지는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지금의 희생으로 빛날 후대의 열매를 위해 자신의 욕심을 비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국가를 이루는 개인은 탐욕에 눈이 멀어 이기적으로 국가가 아닌 자신의 사유재산만을 위해 살아간다. 언젠가부터 개인의 권리만 중요시되었고 책임이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더 나아가 국가가 모든 것을 제공 해주길 원한다.
예를 들면 지난 2월, 연예인 김제동은 방송에서 '청년들의 데이트 비용도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발언을 했다. 물론 논란이 있었고,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영향력이 큰 연예인의 발언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의 민주주의 의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이 처음 꿈꿨던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이승만은 올바른 개인의 집합체가 올바른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청년 시절 한성감옥의 이승만은 종교를 통한 개인의 교화가 민주주의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했다. 즉, 개인의 성품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주장했다.
아무리 경제적 자립이 주어지고, 교육을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먼저 되어야 이 또한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유익이 된다.
우리는 국가를 탓하고 역사를 탓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죽었다”라고 말하기 전에,나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인지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들과 씨름한다. 분별력과 통찰력은 오늘날 청년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요소다. 그렇기에 청년들은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청년 이승만의탁월함도 결국은 겸손한 배움에서 나온 자산이다.
뭘 알아야 싸우지 않겠는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청년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여건을 만들었다. 그저 남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보고 '좋아요’를 누르며 공감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분별력과 통찰력을 키워야 한다.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청년들이 깨어있는 생각을 세상 곳곳에 뿌릴 때 세상에 찌들어 앞을 보지 못했던 국민들을 깨워 나갈 거라 확신한다.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이자 건국대통령은 바로 우남 이승만이다.
우남 이승만의 업적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빛난다고 할 수 있다.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뒤, 혼란 속에 빠져있는 정국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되지 않았다면, 후대 대통령들이 이룰 수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을 건국하지 않

38선 이북에는 김일성이 버티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38선 이남에도 오히려 사회주의를 원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1946년 미군정청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건국되기란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투표나 여론조사를 반영한 건국이 이루어졌다면, 대한민국은 북한과 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우남은 한민족을 위한 길이 시장경제라는 것을 일찍이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남이 공산주의자들과 타협을 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과 같은 번영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우남의 뛰어난 통찰력과 지력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당시의 여론대로 시장경제가 아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인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면, 지금의 풍요는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점점 그 풍요의 빛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중이다.
다름 아닌 과잉입법에 찌든 국회의 과잉규제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기업의 활동을 점점 옥죄고 있는 정부와 국회의 모습이 대한민국 경제의 빛을 잃게하고 있다.
안착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지도층들은 오히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남이 목숨 걸고 지키려고 했던 시장경제를 '경제민주화’, '무상복지’ 그리고 '동반성장’이라는 칼로 난도질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서는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3.4%로 하향조정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경제를 살리려고 애를 쓰지만, 효과가 신통치 않다.
한 나라의 자생적 질서가 개입으로 인해 혼란스럽게 된다면, 그 나라의 경제는 뒤흔들리기
경제전문가들도 여러 가지 처방을 내놓고 있다. 정치인들도 대통령도 경제살리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대한민국의 정부와 국회가 오히려 대한민국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한국의 청년들은 계속 취업을 하려고 노력하고 삶을 향해 발버둥치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이
국회의원들에게 해결해달라고 애원하면 이 땅의 청년들이 과연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일자리는 기업들이 만드는 것이다.
정부는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서 포퓰리즘에 현혹되지 않는 지력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반(反)시장적인 정책에 환호하면 안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밝혀졌듯이 경제성장은 친(親)시장적인 정책, 즉 자유주의적인 정책이 수행될 때
이루어진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자유주의의 가치를 깨달아야 자신들의 미래가 밝아진 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포퓰리즘 정책들, 반(反)시장적인 정책들에 완강히 맞서 싸워야 한다.
청년들은 자신에게 빵을 달라고, 보조금을 달라고 정부를 흔들면 안 된다.
청년들은 시장에 개입하는 정부와 국회를 보고 침묵하거나 동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이 아닌 해롭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개입주의는 곧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다. 사회주의는 퇴보의 길이다.
이미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시장경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자신들을 위한 길이며 더불어
대한민국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가슴 속에 새겨야한다.
국민들이 자신들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알고 그 길로 가려고 노력해야만 자신들과 국가의
국민들의 의식이 정부에 미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특히, 반(反)시장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이라면 하루빨리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
반(反)시장적인 사고로는 풍요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우남을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우남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청년들도 우남처럼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인지해야한다.
그 것만이 이 땅의 청년들이 미래에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초석을 다진 자유의 아버지(The Father of the Freedom) 우남 이승만대통령의 정치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자유주의의 흐름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원류를 찾고 연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사유재산을 강력히 수호해온 우남 이승만대통령을 연구하는 일은 한국에서의 자유주의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04년 한성감옥에서 출옥 후 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대서 수학(修學)을 한 뒤 YMCA에서 교육활동을 하다가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그해 1919년 4월 11일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추대되고 8월 25일 워싱턴 DC 구미위원회를 설치하면서 대통령직에서 하야 직전까지 미국과 끝없는 투쟁기를 보냈다.
(1) 미국정부에게 무기요구와 공산주의의 야욕을 경고
한국 사람들은 일본인으로부터 끊임없이 받아온 모욕과 부당한 처사들이
가슴 속 깊이 쌓여 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1905년 일본의 굴레에 자신들을 넘겨준 미국 정치가의 배신에 분개하고 있소. (중략) 당신은 미국 정치가의 그런 행동이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좋은 감정을 일으키고 미국과의 통상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또 그런 행동이 극동에서 평화의 대의(大義)를 증진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중략) 만약 미국이 한국 사람들이 제대로 싸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무기대여 원조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경우에도 한국국민들에게 공정함을 보여주기 위한 명분으로도, 몇 푼어치 안 되는 2,3천 발의 소총탄약만이라도 민주주의란 무기고에서 그들에게 선물로 제공하는 것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오.
오히려 한국은 공동 참전국 축에도 끼지 못하고 있소.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한국이 미국의 적이 되어 있는 셈이오. 왜 그리되어야 한단 말이오?- 1945년 4월 9일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내는 편지 중-1)
2차세계대전중에 한반도는 “일본의 특수 보호지역”으로서 사실상 일본인과 더불어 조선인(朝鮮人)도 미국의 적이었다. 종전 후 군사재판이 열린다면 한반도에 있는 조선인(朝鮮人)들은 전범국을 도운 죄로 처벌 받을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세계만방에 독립의 정당성을 외칠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이를 미리 꿰뚫어 본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인(大韓人)의 유구한 역사를 미국의 대중에게 알리는 운동2)을 하는 한편, 워싱턴 국무부에 로비를 적극적으로 펼치며 대한인(大韓人)들을 무장을 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기요구는 건국 이후 국군을 3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중무장을 시켜달라는 요구로 더욱 크게 발전한다. 그의 운동이 우리 모두를 살렸다.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선언합니다. -1948년 12월 19일 편지 중-자유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다. 이 두 가지는 합쳐질 수가 없다.
공산주의와 타협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기름과 물을 섞으려는 것과 같다.-1953년 휴전협약 조인을 앞두고 반대성명을 내며-
우남 이승만대통령은 일찍이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1923년도에 이미 <왜공산주의로는 안 되는가?>라는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을 쓴 뒤
1933년 그는 스위스 제네바와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모스크바로 방문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짧게 체류했지만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보고 느낀 점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유럽 농가와 비교했을 때
러시아 농가가 가장 빈약하다는 점이다. 기차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러시아 길거리에서 굶어 죽은 사람을 자주 보았다고 하였다.”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나 폴 새뮤얼슨(Paul Anthony
우리가 미군정을 지지하지 않으면 자기들은 철수하고 공산주의자들이 내려올 거라고 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소.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자신에게 알맞게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으나 당신네가 한국에 와 있는 목적은 오직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하였소. 그리고 우리 또한 우리들의 목적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 못지않게 그들을 위해서도 싸우고 있는 것이니 어떤 식의 공갈도 여기에서는 소용이 없소. 우리는 '만일 한국 사람들이 복종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자기들이 힘을 행사하겠노라’는 식의 성명서로 미군정이 공갈을 치는 일에는 우리는 이제 신물이 나고 피곤합니다. 그리고 여러 번에 걸쳐 자기들이 미국으로부터 '쏴 죽이라’는 명령까지 말한 적이 있소. 3)-1948년 3월 2일자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내는 편지 中-
우남 이승만 대통령이 친미파(親美派)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무색해지는 대목일 것이다.
사실, 조금 더 시간을 뒤로 돌아 이야기를 한다면 하지의 미군정은 우남이 환국 전부터 한반도에 들어오지 못하게 방해공작을 하기도 했다.
미군정의 입장에서 이승만은 '타협 따윈 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 늙은이’라 소련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한반도 내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 분명하므로 중도 좌파인 여운형과 중도 우파인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통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으로 추진해나가고자 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맹렬히” 반대했다. 연립정부는 결국 공산주의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것이며,
미국이 또 다시 한번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재현한다고 끝없이 미군정과 워싱턴 국무부 관리들을 괴롭혔다.
1947년, 좌익과 연립정부를 세웠던 동유럽은 모두 공산화되었다.
이후에 1952년 전쟁 중 직선제 개헌과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 대통령을 체포하고 한국을 다시 미군정하에 두는 계획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세웠을 정도로 미국과의 갈등은 첨예하였다.
과거시험 준비생 이승만으로 하여금 위정척사에 집착하는 보수적 유교 사고와 결별하게 만들었다4)는데 여기서 이승만이 배운 자유는 인위의 자유(Liberty)가 아닌 천부의 자유(Freedom)이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재산권)를 보장 받는 로크의 권리이론과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애덤 스미스 고전경제학의 인식을 가지고, 헌법에도 이를 골자로 하여 사망하기 직전까지 그 흐름은 계속 유지했다.
내용이 매우 가관이었다. “건국 초기의 혼란 속에서 6 ·25전쟁을 겪고 난 정부로서는 전후복구
날조와 부정으로 점철된 역사교육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그의 쓸쓸한 말년을 생각해서라도 진실을 바로잡아 이승만대통령의 명예를 회복해야한다.
민족주의가 한국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인 경제적 자유의 보장을 함으로써 눈부신 번영을 이루어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이러한 번영을 계속해서 구가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뛰어 넘는 청년 자유주의자들이 많이 나와야한다. 먼저,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을 탈피해야 한다.
이것은 자유주의로 가는 첫걸음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글로벌 시대, 하루하루가 혁신과 변화로 일렁이는 시대다.
사해동포주의를 지향하며 경제적으로도 자유주의적인 움직임을 끊임없이 취해야 한다.
또한 비자유주의적 정책과 행태에 대해서는 절대 묵인해서는 안 된다.
이승만대통령은 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인해 국군의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 이런 말을 남겼
우남 이승만은 알면 알수록 대단한 인물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하다못해 그가 29세에 한성감옥에서 썼던『독립정신』이라는 책의 존재 여부는 물론 그 책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나 개인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좌익들의 온갖 왜곡과 선전선동에 의해 그의 모습을 다르게 보는 것이다.
지금은 최고의 에너지자원이 된 석유도 그것의 가치를 알지 못했던 시절에는 그저 냄새나는 액체에 불과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남 이승만을 제대로 알리려면 그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청년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키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필자의 주관적인 예측이다.)
[매일신문]이라는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무지몽매한 일반 백성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세계와 문명에 대해 소개하고 정체제도를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한 것이 특징이다.
그의 정치철학은 나라의 독립을 수호하고 이를 위해 민주적인 제도로 개혁,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자유롭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근대적이고 개혁적이다. 6)
사실 우남 이승만은 '대통령’이라는 호칭보다 '박사’라는 호칭으로 더 자주 언급 되었었다. 국민들은 그를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한국인 최초의 국제정치학 박사, 그것도 미국 동부 8대 명문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물론이고 지금의 기준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스코틀랜드는 약소국으로서 강대국 잉글랜드의 식민지(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처지와 묘하게 흡사하다)였지만 자유와 교육의 발상지이자 자유주의 사상의 본고장이었다. 자유주의 사상가이자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는 스스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의 자유주의를 계승한다고 자처한다.
즉 이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과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 이승만에게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라는 공통분 모가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 모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미국 국제정치학 박사 이승만이라는 건국대통령을 통해 선진적인 사상과 이념을 바탕으로 한 근대국가를 건국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근대화의 초석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 근대화, 문명화를 모두 이룬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8)
좌익 선동가들의 선전선동에 그만 속고 그의 진면목을 알아볼 때가 되었다.
그리고 허치슨, 흄, 스미스, 리드 등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알렉산더 해밀턴, 벤저민 프랭클린, 존 위더스푼 등 미국의 건국세력이 우남 이승만과 공유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하루 빨리 눈을 뜨는 계몽의 시대가 실현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