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민운동의 북한인권문제 무관심에 대한 고찰.pdf
김대중 정부 하 대북정책인 `햇볕정책’과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북한의 급속한 붕괴는 남한의 입장에서 결코 이롭지 않으니 북한을 경제 사회적으로 지원하여 개혁 개방의 길에 이끌어냄으로써 체제의 연착륙을 유도한다는 전망을 세워놓고 있다. 이는 `김정일 정권은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애초에 전제부터 잘못 되었다. 김정일 정권은 현 북한사회의 비극을 만들어낸 정치적 책임 때문에 개혁 개방의 길에 나설 수 없는 근원적 한계가 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경제개방이야 할 수 있겠지만 사회가 발전하려면 전면적 개방이 필수적인데 대외 정보가 물밀듯 들어와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게 되면 김정일 정권은 다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 버릴 것이다. 이렇게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북한체제와 정권은 어느 순간 급속히 붕괴될 것이라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전망이다. 따라서 북한의 붕괴를 피할 수 없다면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준비를 갖춰놓아야 한다.
한편 한국 정부의 대북유화정책은 북한문제의 복잡한 전개양상에 비추어 볼 때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으로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정부가 앞장서 북한정권과 체제붕괴를 노골적으로 시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북한 인권・민주화운동은 북한체제와 정권의 붕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도 꼭 필요한 운동이다. 북한의 인권개선과 민주화를 촉구하는 주장을 정부가 직접 하기는 어렵지만 시민운동은 그에 개의치 않고 원칙적인 주장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운동단체들은 북한의 인권문제와 체제의 비민주성 문제에 대해서는 불가사의한 침묵의 행렬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남한의 권위적인 정부와 맞서 싸우며 성장했던 지식인들이 주축이 된 진보적 시민운동단체들이 북한 인권문제에 침묵하고, 나아가 북한 인권・민주화운동 단체의 활동을 방해하기까지 하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진보 시민운동단체들은 △북한을 비판하는 것은 모두 극우 혹은 맹목적 반공으로 여기는 경향, △사회주의에 대한 우호적 태도, △민족주의적 성향 등으로 인해 북한인권문제에 무관심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북한을 비판하게 되면 우익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지만 자기 세력의 유지를 위해 명백한 반인권・비민주에 침묵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죄악이다. 또한 북한사회는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상상하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며 민족주의의 탈을 쓰고 있으나 진정한 민족주의적 입장에 서있지도 않다. 북한 사회는 수령의 1인 지배로 유지되는 절대주의 사회이며, 북한이 이야기하는 민족은 김일성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민족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의 민족주의는 통일전선전술의 한 방편일 뿐이다.
진보 시민운동단체들은 현 북한 체제를 옹호하면서 △북한의 군사적 무장 불가피론, △미국의 경제봉쇄론을 내세우고 △탈북자들의 증언을 불신한다. 북한이 막대한 예산을 계속 쏟아 부어 군사력을 강화한 것은 `자주국방’에 대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몰이해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자기 힘만으로 안보를 지키는 나라는 없다. 북한이 진정으로 현명한 생존전략을 구사했다면 인접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면 된다. 하지만 북한은 내내 중국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뒤늦게야 관계개선을 모색하고 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현재 북한의 `군사우선주의’는 실제 국방력을 통해 위기를 모면해보려는 어리석은 생각도 있지만 북한 내부적으로는 주민들에게 끊임없이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는 측면도 있다.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이 미국의 경제봉쇄 탓이라는 주장은 심대한 지적 사기이다. 미국의 대북경제봉쇄정책은 중국, 러시아와 같이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지 않은 나라들에게는 별 구속력이 없으며 유럽이나 중동의 국가들도 크게 얽매이지 않는 태도를 취해왔다. 그럼에도 북한의 대외경제교류가 많지 않았던 것은 폐쇄적이며 낙후한 경제체제와 대외경제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 게다가 미국의 경제봉쇄는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될 수 있는 물자의 수출입에 한정되어 있어 이를 이유로 북한경제가 무너졌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진보 시민운동 단체들은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탈출하였으니 부정적인 이야기만 할 것이라며 탈북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으려 하지만 탈북자들은 북한의 지극한 일반인들이다. 또한 남한에 이미 입국한 탈북자가 6,000여 명을 헤아린다. 이들의 북한에서의 직업, 나이, 거주지, 계층, 성향은 다양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일치하게 내놓는 주장을 믿지 않고 그것이 조작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진보 시민운동단체들은 탈북자들의 증언을 경청하여야 하며 참혹한 북한의 현실에 눈을 떠야 한다.
북한 인권・민주화운동에 있어서는 △현재 북한의 몰락을 김정일의 책임이라 할 수 있는가 △북한인권운동은 북한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운동인가 △북한 인권・민주화를 위해 외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는가 하는 몇 가지 쟁점이 있다. 김정일의 집권기는 최소 20년에서 최대한 30년까지 늘려볼 수 있다. 현재 북한 사회의 여러 질서와 체제를 만든 장본인은 바로 김정일이다. 따라서 김정일을 제거하여야만 북한의 인권개선과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으며, 북한 인권・민주화운동은 곧 `김정일 퇴진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 시민운동단체들은 “북한 인권문제가 북한 체제붕괴의 목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지만 북한의 인권문제는 여느 민주주의 사회와 같은 `소수자의 권리’ 문제가 아니다. 북한의 제반 인권문제는 살인적 체제와 정권의 문제에서 발생했으며, 필연적으로 북한 정권・체제 변혁운동과 일치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인권상황이 극히 열악해 내부적으로 민주화운동을 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외부의 지원은 절실하다. 북한 민주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국제사회에 많다는 것만으로도 북한 내부에 잠재된 민주화운동 세력은 큰 힘을 얻을 것이다. 그들에게 힘을 주기 위한 다양한 선전활동, 국제연대활동, 교육 및 캠페인 활동 등 북한 인권・민주화운동으로 할 일은 많다. 남한은 북한과의 혈연・언어상의 유대감, 경제적 우월성, 민주화 운동 경험 세대의 존재 등의 이유로 인해 북한 인권・민주화운동의 든든한 지원기지가 될 수 있다.
현재 북한 인권・민주화운동 단체로는 △북한인권개선에 중심을 둔 북한인권시민연합, 좋은 벗들,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북한인권정보센터와 △북한체제변혁에 중심을 둔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북한민주화운동본부, 북한민주화학생연대, △기타 탈북자단체 및 선교단체, 납북자 단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단체들은 북한 내 민주화운동에 대한 직접적 지원, 재중 탈북자 보호 및 지원, 남한 입국 탈북자 적응 지원,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적 여론을 환기하기 위한 활동, 조사보고 활동, 각종 캠페인 및 대중행사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 중에 있다.
북한 인권개선과 민주화를 위해 세계 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의 북한인권법안 통과 등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압박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진보 시민운동 단체들은 그 배후에 어떠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지 말고 북한의 현실을 직시하고 북한・민주화에 한 목소리를 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가치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고통받고 소외받는 인간과 함께 한다는 진보운동의 순리에 맞는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