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 없는 복지담론, 환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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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나영 201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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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열기가 뜨겁다. ‘새 시장’이 취임하면서 ‘따뜻한 서울’이라는 슬로건이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이다. ‘시민 모두가 누리는 품위있는 생활’, ‘사람이 사는 서울’이라는 말을 들어보면 일견 ‘맹자’(孟子)에 나오는 애민사상(愛民思想)을 떠올리게까지 한다. 그렇지만 남은 2년 8개월의 ‘따뜻한 서울’을 위해 전임 시장이 추진하던 ‘아름다운 서울’ 비전을 철저하게 부수는 모습은 과연 이것이 정책의 개선이라고만 보아야 하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위정자들이 화두로 삼고 있는 복지 논쟁의 이면에는 다른 것이 있다. 복지 담론의 양산으로 인해 정치인이 얻게 될 부대 이익과 스타일의 추구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위정자들이 발생시킨 논쟁은 ‘복지 정책 실행 이전’과 ‘실행 이후’에 대한 논의는 있으되 ‘복지 정책의 실행 과정’을 다루지 못한다는 비판을 듣는다. 한쪽은 ‘이론적으로’ 복지가 엄청난 시민 사회의 성숙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주장을 제기한다. 한편 다른 이들은 미래의 재정위기 초래라는 엄청난 공포 속에서 과도한 복지가 국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 지적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법 조항과 경제 정책의 효과와 같은 구체적인 지표로 검증하기 시작하다 보면 의외로 우리 주변의 위정자들이 ‘분석’보다 ‘감정’에 치우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 계획을 남발하다 지쳐 실행 프로세스에 대한 고민은 미처 생각지도 못해본 것이다.
안상훈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전략적 차원의 복지 정책 분석을 외면하는 이들은 시대가 밟고 지나갈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복지에 대한 막연한 공포나 미화가 아닌, 생산적으로 경영할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산적인 복지정책의 과정 관리를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복지의 ‘산출물’(Outcome)을 확실히 정하는 일이다. 일련의 반값 등록금/무상 급식 논쟁은 복지가 가져다 줄 ‘변화상’에 대해서만 주목할 뿐, 복지 정책이 겨냥하고 있는 경제/사회적 변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한다. 따뜻한 서울이 비전일지언정 그 조치로 인해 서울이 어떻게 국제경쟁력을 갖출 것인지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정계의 뉴 리더들이 정말 복지를 ‘건수’로 삼고 싶다면 자신이 추정한 복지 플랜이 어느 정도로 경제적/사회적 효과가 나는지 직접 설명해 주어야 한다.
두 번째로 복지 정책의 운영(Operation) 절차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어마어마한 세금이 들어간다는 ‘공포심’과 ‘최저생활이 보장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은 있지만 복지 정책의 프로세스 관리나 성숙도와 관련된 지적은 없다.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가 ‘수도의 재정을 말아먹었다’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3선을 거듭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과감한 복지/교육 실험을 감행하더라도 그 관리 절차는 꾸준히 기자회견과 공청회를 통해 보고하는, 감각을 갖췄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옵션(Option) 관점을 취하라는 것이다. 일찍이 제프리 로이어(Jeffrey Reuer) 오하이오 경영대 교수가 ‘최악의 위험을 대비한 전략’(Downside Risk Strategy)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학계/재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어떤 정책이든 국면에 따른 ‘선택적 감각’이 필요하다. 스웨덴처럼 성공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처럼 ‘본전을 까먹는 복지’가 될 수도 있다. 지금처럼 전문가/관료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철저히 의심하면서, NGO들의 꿈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는 행태로는 언젠가 최악의 리스크를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유학자인 주자(朱子)는 위정자가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명분을 바로 해야 하고, 그를 위해 또 다시 치열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복지는 ‘내가 내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남에게 내 삶의 일부를 제도적으로 위탁할 것인가’의 이슈다. 지금 복지 정책으로 ‘먹고 사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당신의 복지 플랜은 과정과 실행을 책임질 수 있는가?’ 결국 우리의 복지 전략은 기본을 재검토하는 작업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따뜻한 정치가, 카리스마적인 리더라는 스타일을 추구하기 위해 내일의 곳간을 염려하지 않는 위정자들에게 엄중히 경종을 울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