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안 고등학생들의 특별한 시장

조민아 / 2023-11-29 / 조회: 240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강원도 횡성 깊은 산골짜기에 우뚝 서 있다. 학교에서 정한 공식적인 정기 귀가는 2주에 한 번 이지만 각종 시험과 모의고사, 수행평가들로 한 달쯤은 집에 안 가기 십상이다. 기숙사에 오랫동안 갇혀 지내는 우리는 기숙사 바깥세상을 '속세라 부르며 집에 가는 주말마다 온갖 컵밥과 라면과 과자들을 한 아름씩 안고 온다. 한 학년에 150명씩, 전교생 450명이 남짓한 학생들만이 존재하는 우리 학교는, 그 아무도 모르는 우리만의 특별한 시장경제와 함께하고 있다.


우리 학교에는 새 물품이나, 중고 물품을 팔 수 있는 페이스북 페이지가 있다. 이 페이지는 '999’라 불리며 학교가 생겨난 28년 이래로, 가장 오랫동안, 거의 모든 학생과 졸업생이 거쳐 간 우리들의 '시장이다. 사용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단순히 팔고자 하는 물건을 판매자가 적절한 가격을 책정해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이후 선착순으로 학생들이 그 게시물에 댓글을 달아 해당 물품을 사는 방식이다. 이러한 단순한 방식으로 이곳에서는 아주 다양한 상품들이 팔리고는 하는데, 이를테면 문제집과 과자, 라면, 컵밥과 같은 지금 더 이상 자신이 사용하지 않는  물품들을 자유롭게 사고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들의 시장은 지난 28년간 게시물의 가격이나 상품에 대해 제재하는 관리자가 없었으며, 정말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시장이다. 나는 학교에 들어온 이후로 줄곧 우리들의 시장을 대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고민해 왔다. , 어쩌면 우리가 경제학적으로 효율적이지 못한 방식을 채택하지는 않았는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면 마트나, 학원, 음식점 등으로 구성된 '속세의 시장은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은 시장경제 하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떠올릴 것이다. 사고자 하는 사람과 팔고자 하는 사람이 시장에서 만나 어느 한 지점에 마침내 도달하는 것. 하지만 이때 이야기하는 시장경제는 시장 내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질이 동일하고,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을 무수한 수요자와 공급자가 수용하게 되는 '완전경쟁시장이어야만 가능하다. 완전경쟁시장에서는 다수의 공급자가 동질적인 재화를 생산하고, 재화의 품질과 판매 조건, 서비스까지 동일하기 때문에 수요자는 특정 공급자나 상품을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존재하는 시장은 다르다. 하늘 아래 같은 떡볶이는 없듯, 떡볶이를 먹어도 누구는 학교 앞 포차의 고추장 떡볶이를, 누구는 납작 당면이 가득한 국물 떡볶이를, 또 다른 누구는 차돌박이가 듬뿍 올라간 카레떡볶이가 좋을 수도 있다. , 시장경제 안에 우리는 다양한 선택지 안에 놓이게 되고, 그 안에서 개개인은 특정 재화나 서비스에 선호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시장의 형태는 '독점적 경쟁시장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대부분의 우리들은 경제주체로서 가격 수용자의 역할을 착실히 해나가는 중인 셈이다.


기본 시장경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면, 우리 학교의 특별한 경제 생태계는 기본 시장경제의 원리를 축소화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우리들의 특별한 시장은 특정 개개인이 가격을 정하고 판매자 역할을 수행하며, 선호도에 기반한 소비자들의 선착순 경쟁이 빈번히 일어나는 독점적 경쟁시장과 유사하다. 한편 우리 학교의 시장은 공급자의 가격결정 과정과 소비자가 재화를 소비하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시장 경제와는 차별화된 특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특별한 특성을 설명하는 데에는 일명 '희귀템한복 교복을 사는 것도 한몫한다. 매년 신입생이 들어올 때마다 새로운 디자인의 교복이 3가지씩 나오는 우리 학교에는 분홍색, 하늘색, 검은색 등 각양각색의 교복이 존재한다. 그리고 매 기수마다 생겨나는 교복들은 후배들에게 팔리거나, 물려주며 전교생들은 아주 다양한 디자인의 교복을 입곤 하고, 이 교복들을 거래하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 학교의 유일한 시장인 '999’만의 가장 큰 역할이다.  이 때문에 전교에 딱 하나 남은 교복이 거래되기도 하고, 반면 국가에서 무료로 나누어 주었던 교복이 거래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교복의 가격은 무료 나눔부터 4만 원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런데도 시장에서 통상적으로 거래되는 시장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대체로 여름 교복은 3만 원, 겨울 교복은 3 5천 원, 희소한 교복은 4만 원에 거래되곤 한다.


올해 초, 한 학생은 우리가 거래하던 시장 안에서 3만 원 정도로 팔리는 여름 교복을 갑자기 4만 원에 팔겠다는 글을 썼다. 그 교복은 희소성이 크지 않았지만, 새로운 디자인의 교복을 원하는 신입생들은 가격에 대한 의구심 없이 구매했다. 이 판매자가 나타난 이후 통상적으로 거래되던 교복의 가격 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어떠한 가격 제재도 없는 시장이었지만, 우리들의 암묵적인 약속이 존재했던 우리들의 시장은 어느 순간 판매자가 우위에 서 교복 가격이 무차별적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학교 대나무 숲에는 이 현상을 지적하는 익명의 글이 올라왔다. 이에 따라 판매자들은 다시 교복의 가격을 낮추어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는 제한된 시장에서 소비자 의견과 공유된 정보에 의해 이루어진 시장 가격의 조정을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우리 학교의 시장경제는 보면 볼수록 특이하고 또 신기하다. 통상적으로 시험 기간에 판매되는 에너지 음료의 가격은 비싸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어느 시기든 늘 2,000원 위아래를 웃돈다. 이는 공급자의 양심일 수도, 소비자에 대한 존중일 수도, 시장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는 노력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누구도 이 시장의 강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규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롯이 시장경제만의 경쟁과 자율성 안에서 존재하는 우리들만의 시장은 앞으로도 수많은 변주를 만들어 내며 우리 학교 학생들의 유일무이한 시장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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