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보수정당(한민당)의 계보

권오중 / 2018-09-27 / 조회: 430

일본의 패망이후 미군정 시기(1945.8.15.~1948.8.15.)에 38선 이남의 미군정 지역인 현재 대한민국 지역에서는 단독정부 수립까지 정치적으로 혼란이 지속되었다. 일본의 패망직후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1945년 9월 6일에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고,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미군의 한반도 진주 이전에 이미 전국적인 조직을 구축하면서, 친 공산주의 세력이 남한 사회를 장악해가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준비를 계획하던 미군정에게는 남한 사회를 장악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반발한 민족진영은 모든 세력을 하나로 통합할 것에 합의했고, 9월 16일에 천도교 회관에서 100여명의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였다. 당시 영수로서 이승만, 김구, 이시영이 추대되었고 수석 총무를 송진우가 맡게 되었다. 한민당 출신의 주요 인사들은 이승만, 김구, 이시영, 문창범, 서재필. 권동진, 오세창. 송진우, 김성수 원세훈, 백관수, 김도연, 허정, 백남훈, 조병옥, 장덕수, 윤보선, 윤치영, 이활, 김약수, 백낙준, 곽상훈, 이철승, 유진산, 이인, 성낙훈, 양주동,  김병로, 이기붕 등이었다.


특히 신탁통치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민주적”인 한국의 시민과 사회단체들을 포함시켜야 했는데, 당시에 소련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들 외에 미국에 동조하는 자유민주주의 계열 단체들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러자 친일세력은 '반공’과 '친미’라는 기치를 내걸고 다시 사회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친일 지주세력이 주류인 한민당은 사회주의 세력의 확산을 우려했던 미군정 장관 하지 중장의 후원으로 미군정에 적극 참여했다. 그래서 한민당은 미군정에서 실질적인 여당적 지위를 차지했다. 이들이 이승만, 김구, 이시영 등을 영수로 추대했던 것도 반공이라는 공동의 이해관계에서 이루어졌지만, 사실은 이들을 통해 정치활동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한민당 구성원들의 친일 전력은 반공과 친미로 포장되면서, 해방이후 정국에서 보수 세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친일 지주계열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한민당은 즉각적인 정부이양을 주장했던 김구 등 임시정부 계열과 마찰이 불가피했으며, 1945년 12월 송진우가 암살당하자 한민당과 김구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민당은 이승만과 가까워지며 공동으로 단정수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한민당은 29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며 이승만의 '독립촉성회’ 55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의원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무소속으로 당선된 우파 의원들을 흡수하여 정치활동 면에서는 오히려 주도권을 쥐고 여당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하는 공생관계로 출발하였다. 이 밀월관계는 제헌의회에서부터 틀어지게 된다. 헌법 제정 당시 이승만은 기존의 내각책임제 대신에 대통령 중심제를 강력하게 요구했고, 한민당은 이를 수락했다. 한민당은 이승만 대통령에 김성수 총리, 그리고 내각의 절반(6인) 이상은 한민당이 갖는 조건으로 이승만과 합의했다. 수정된 헌법에서 실권은 여전히 국무총리가 갖는 구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자 한민당과의 약속을 어기고,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했다. 이에 격분한 한민당이 이윤영 안을 부결시키자, 이번에는 이범석을 지명했다. 결국 한민당은 이범석 지명에 동의했지만, 이범석 역시 한민당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장관 한명만을 한민당의 몫으로 할당하였다.


제2대 국회에서 이승만은 대통령 권한 강화를 시도하였고, 한민당은 이에 맞서 의원 내각제안을 제시하였다. 이 대립 속에서 이승만은 자유당을 결성하고 발췌 개헌을 강행하면서 한민당과의 공생관계를 정리하였고, 이에 한민당은 조병옥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을 결성하게 되었다. 한민당이 처음부터 주장했던 의원내각제는 1960년 4.19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면서 마침내 실현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에서의 의원내각제는 단지 9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친일계열은 민족주의계열과 한민당이라는 한 배를 타고 출발했지만, 이내 임정계열이 이탈하였고, 제2대 국회에서는 이승만과도 결별하면서, 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향후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보수정당을 표방하면서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모태가 되었다.


5.16 군사정변이후에 민주당(한민당의 후신)은 30여 년간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야당으로 정치활동을 이어 나아갔다. 한편 자유당 계열 인사들 중 일부는 군사정권과 손을 잡고 공화당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1960~1970년대 민주당에게 의원내각제는 더 이상 목표가 아니었다. 이 시기에 민주당은 신민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군사독재 타도를 당의 목표로 삼고 끊임없이 정권교체를 위해 투쟁하였다. 하지만 반공과 친미라는 당의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집권여당인 공화당, 민정당과 보수적 성향에서 차이가 없었다. 1970대 후반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신민당과 그 후신인 통일민주당은 여당이었던 공화당, 민정당에 맞서는 지역주의 정당으로 변모하였기 때문에,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점점 요원해져갔다.


하지만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그리고 '6.10항쟁’ 등을 통해 폭발했고, 이는 군사독재를 점차 끌어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민주당 계열은 김영삼과 김대중 계열로 양분되었고, 김영삼 계열은 민정당(노태우), 신민주공화당(김종필)과 합당하며, 민자당으로 통합되었고, 김대중 계열은 민주당의 전통을 고수하며 야당으로 남으며, 민주당 계열은 분열되었다. 보수정치세력이었던 민주당 계열은 2000년대 이후, 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등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자유당-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진 신 보수세력과 대립각을 세우는 “진보”세력으로 당의 가치를 탈바꿈시켰다.


한민당의 반공과 친미(1940~1950년대), 민주당의 독재타도와 민주화(1960~1990년대 초반), 그리고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진보(2000년대 이후) 등으로 한민당 계열의 정당은 시대에 따라 그에 부합하게 당의 목적을 변화시켜왔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진보라는 가치는 기성 정치세력이 아닌 새로운 정치세력의 유입으로 성립되었다. 새로운 정치세력은 바로 노무현과 소위 “친노”라고 지칭되는 세력으로서, 해방이후 지속된 기성 보수정치에 대한 도전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친노”라고 지칭되는 새로운 정치세력은 역시 지역주의에 의지하는 기성정치 세력인 김대중 계열과 결별하며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열린우리당에 아직 한민당 계열이 아직 남아있었고, 그 외에도 사회주의 계열 등 다양한 정치적 뿌리를 지닌 인물들의 정당이었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반공과 친미를 표방한 보수주의 정당이었던 한민당이나 군부세력과 무관한 새로운 정치세력이었다. 한민당 계열 정당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이들은 어쩌면 우리 정치사에서 정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역주의를 초월하여 기성 보수정치의 기득권에 반발하는 전국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더불어민주당은 내부적으로 노선의 차이로 인하여 “진보”의 완전한 단일대오를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열린우리당과 현재 더불어민주당의 집권은 민주당(한민당) 계열이나 군부세력의 기득권 정치에 실망한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정치세력이었다.


우리 국민은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그리고 6.10항쟁에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군사독재를 종식시켰고, 스스로의 의지로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해방이후 지속되었던 부패한 기성 보수정치에 대한 도전과 2000년대 이후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도 국민이 만들어냈다. 이는 우리 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과 정치의식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의 정치혁신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권오중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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