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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좌절케 하는 건 `격차`가 아니다

310 신보균 | 2017-01-04 | 조회수: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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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차는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우리가 보통 '격차’를 이야기할 땐, 경제적 격차 혹은 사회적 격차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최근 필자는 앞서 말한 복잡한 격차가 아닌 피부에 직접 와 닿는 격차를 직접 경험한 바 있다. 지난주 필자는 한 영화 시사회를 참석하게 됐다. 관계자들이 많이 참여하는 시사회였던 터라 소속사 연예인들이나 배우의 지인들이 곳곳에 자리했는데 이런 이유로 극장 내에 누가 들어오던 크게 술렁이는 것 없이 조용히 진행됐다.

 

 하지만 극장 내의 분위기는 일련의 무리의 등장으로 완전히 깨지고 만다. 갑작스런 술렁임에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엔 '태양의 후예’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배우 송중기씨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뒤를 이어 조인성, 김우빈, 유지태 씨가 뒤이어 올라오며 극장 내 분위기를 바꿔놓았고 마지막 피날레로 박보검 씨가 등장함으로써 그 말도 안 되는 행렬은 막을 내렸다. 더군다나 그 무리가 모두 한 자리에 자리함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한 곳을 향하게 되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필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격차를 느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아무 의미 없게 느껴졌고 어떻게 발버둥 치던 극복할 수 없는 큰 격차를 체감했다. 일반인인 나도 그렇게 느꼈는데 그 자리에 함께했던 수많은 연예인들은 오죽했을까. 어디 다른 곳 가서는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그들이었지만 사기스러운 조합의 등장에 그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그들이 만약 격차를 느꼈다면 분명 내가 느낀 것 보다 더한 것이었을거라 지레 짐작해본다. 이처럼 격차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격차는 나쁜 것이 아니다

 

 격차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필자가 시사회에서 배우들을 보며 격차를 느꼈다고 해서 누군가 나서서 그것을 극복시켜 줄 이유도 없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물론 필자를 안타깝게 여긴 어느 의사분이 내게 무료 시술을 권해준다면 감사는 하겠지만 과연 그런 방식으로 격차를 극복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애초에 태어날 때 다르게 태어난 것처럼 격차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격차가 필자가 느꼈던 외모적인 것이었던, 경제적 격차였던지 간에 특히 한국 사회의 근간인 자본주의에서는 개개인의 역량과 노력이 다르기에 격차는 부정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개인이 가진 특기를 발견하고 그 특기를 이용해 비교 우위를 점해 타인과의 격차를 벌려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지향되어야 할 바이다. 원시 사회처럼 사냥감이나 채집 가능한 열매들이 한정 되어있어서 개인의 뛰어난 경제 활동이 타인에게 돌아가는 재화를 뺏고 결국 부족의 안정성까지 해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원시 사회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시장 경제 체제 아래서 각 개인은 기존 재화를 놓고 경쟁하는 것을 넘어서 남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계발해서 새로운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부를 얻는다. 이러한 개개인의 활발한 경제 활동과 경쟁은 새로운 재화를 끊임없이 만들어 냄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이 더 많은 재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 즉,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은 타인이 누려야 할 재화를 빼앗아 왔기에 그들의 재화를 못 가진 자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경제적 격차를 극복해야된다 식의 논리는 원시 사회의 것이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 가진 자들의 부의 근원은 개인의 개척 정신과 능력을 통해 새롭게 창출된 재화에서 온 것이지 타인의 부나 그들이 누리고 있던 재화를 빼앗아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개인의 활발한 경제활동은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저렴하고 고품질로 제공함으로써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못 가진 사람들의 삶의 질 또한 향상 시켰기에 그 과정 중에 파생된 격차는 절대 나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격차는 현대 사회 발전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논의의 초점을 부자와 빈자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조로 보고 그 차이를 인위적 방법으로 극복하고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는 데 두는 것이 아닌 경쟁에서 도태된 구성원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시민으로 키워내고 각자의 특기를 살려 비교우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둘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진짜 문제는 격차가 아니라 성공의 기준을 획일화하고 모두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함으로써 각자가 개성을 갖고 특기를 살리려 노력하는 것이 아닌 동일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같아지려 노력하는 비정상적인 사회 분위기에 있다. 즉,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비교우위를 만들어 내기 힘든 사회 구조가 대한민국이 현재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아닌 '우리’라는 인식에서 모든 문제는 시작된다

 

 최근 우리 사회는 경제적, 사회적 격차에 큰 관심을 갖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경제 민주화, 무상 복지 등의 정책을 쏟아 내 왔다. 유독 대한민국은 격차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필자는 이유를 개인이 아닌 공동체 내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에서 찾았다. 우리는 보통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거주지, 나이, 소속 학교, 직업 등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러한 판단 기준 자체가 옳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문제점은 우리 사회가 이러한 판단 기준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기준들을 가지고 개인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 파악만 해도 될 것을 한국 사회는 더 나아가 이런 학교에 다니면 똑똑하겠지, 이곳에 살면 잘 살겠지 등의 가치 판단까지 더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유독 '타이틀’에 민감하다. 내가 나로서가 아닌 어느 타이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판단 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남들보다 좀 더 좋은 타이틀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더 좋은 학벌, 직장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노력이 궁극적으로 개인의 이상을 위해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의 이상과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수천 수만가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회가 정해놓은 '좋은’ 직장, 학교 등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나’의 능력 계발이 아닌 사회와 남들이 보기에 뛰어난 '공인된’ 능력 계발에 몰두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좋은 직장과 학교의 수는 제한적이기에 이 경쟁에서 뒤쳐진 다수가 몰락하는 현상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이들 중 운 좋게도 뒤늦게 자신의 적성과 가능성을 깨닫고 새로운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는 이들도 있으나 대다수는 자신의 적성을 찾는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채 사회가 정한 기준에 미달되어 그 기준을 넘어선 소수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해가며 살아간다.

 

 이런 인식은 우리 사회의 교육에서 비롯된다. 12년의 교육 과정동안 학생들은 개개인의 역량 계발이 아닌 우리라는 집단으로서 모두가 같은 기준으로 평가 받고 모두가 좋은 대학만을 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 중 누군가는 수능이나 내신인 아닌 예술, 기술, 체육 분야에 재능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그 능력 키우는 것을 장려하기보다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나 그런 것 한다며 평가 절하 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외국어 고등학교만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외국어’에 특화 된 학생들을 뽑아 양성해 내야 되는 데 오로지 성적 기준으로 학생을 뽑다보니 외국어 고등학교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발판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곳으로 전락해버렸다. 주변에 외고 나왔다고 하는 사람 치고 전공한 언어 유창하게 구사하는 학생을 본적이 없다. 이처럼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은 개인이 스스로 평가 기준을 만들고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닌 사회의 기준에 맞춰가는 연습을 하다 보니 개개인의 잠재력이 터져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충분히 남보다 내가 가진 출중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와 사회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내 자신을 사회적 기준에 맞춰 평가하다보니 그 기준에 미달됨은 곧 상실감으로 이어지고 이 상실감은 사회적 격차에 대한 반감과 부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애초에 내 스스로 만든 기준이 아니기에 사회가 만든 격차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그 격차를 부정적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격차를 발전의 가능성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격차 해소에만 주력하는 현상이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은 결국 획일화 된 인적 자원 평가 기준과 전체주의적 사고를 하게하는 교육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해결이 아닌 복지로써 문제를 덮으려 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학생들에게 수업 선택의 자율권을 줌으로써 개인의 특기와 역량을 찾게 함은 물론이고 예체능 부분도 모두가 같은 수업을 들으며 공을 몇 개 던지고 못 던지고 점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듣고 싶은 수업을 선택해서 수업에 참여하고 평가 또한 수행능력이 아닌 학기 중 참여도를 놓고 평가한다.

 

 이러한 교육 과정은 학생들에게 일찌감치 적성을 찾게 해, 학교에서 주로 들었던 수업이 대학 전공까지 연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대학 또한 학생을 선발할 때 점수만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닌 학생 개개인의 다양한 경험에 중점을 두고 뽑는다. 이는 학생 모두에게 동일한 평가 기준을 들이대지 않고 다양한 경험과 능력 계발을 하게 도움으로써 각자의 영역에서 최대의 잠재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개개인의 역량 차이를 깨닫고 이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가 나보다 뛰어난 것이 있으면 나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 즉, 개인의 정체성을 집단 내의 기준에서 찾는 것이 아닌 나 자신에서 먼저 찾게 되고 이는 곧 다수의 낙오자를 만들어내지 않고 각자가 사회 내에서 비교 우위를 점하기 위해 노력하는 긍정적인 사회 구조를 만들어 낸다.

 

 문제는 교육이다

 

 격차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격차를 악, 평등을 선으로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육 문제의 해결이 시급하다. 먼저 평등만이 사회가 추구해야 되는 정의라고 생각하는 편향된 시각부터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평등이 가져오는 해악은 조금씩 진행되므로 상황에 익숙해져 문제를 깨닫지 못하나 자유의 해악은 즉각적이기에 평등을 더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빵 두 개가 있고 그 빵을 먹고 싶어 하는 가난한 자와 부자가 있다고 해보자. 정상적인 시장 거래라면 빵 가격을 지불 할 능력이 있는 부자가 빵을 사 먹는 게 맞지만 이는 거지의 굶주림이라는 즉각적인 고통을 낳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를 줄이고자 지불 능력과 상관없이 빵 두개를 균등 분배하자고 주장한다. 이는 지금 바로 불쌍한 자를 도움으로써 사회 정의를 실현했다고 믿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된 사실은 이런 상황이 지속적으로 나타났을 때에 대한 결과다. 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빵을 균등 분배한다면, 가난한 사람은 더욱 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며 동시에 가진 사람들 또한 열심히 일해도 얻는 빵의 개수는 똑같으니 일하는 것을 포기할 것이다. 즉,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노동력이 저하되는 결과를 낳게 되고 결국 사회 전체의 경제력까지 저하시켜 우리 사회가 향유할 수 있는 전체 빵의 개수가 줄어드는 데에 이르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교육을 통해 격차를 없애고 평등으로 나아가려는 것이 사회 정의라는 인식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격차가 없는 세상은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어 함께 협력 할 수 있고 행복해 보이지만 평등이야 말로 사람들의 유대를 단결시키고 개인주의를 부르는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모두가 똑 같은 세상에선 타인에 대한 흥미가 줄어들게 마련이고 협력에 대한 필요성 또한 줄어들기 때문에 이는 곧 개인주의의 만연을 불러온다. 따라서 평등이 절대 선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격차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그 격차를 모두의 평등이 아닌 개인의 비교 우위 계발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긍정적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 과정을 통해 모두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업만을 향해 가게 하는 것이 아닌, 사회가 원하는 기준을 넘어서 내가 원하는 기준을 스스로 만들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공동체 안의 내가 아닌 내가 있고 공동체도 존재한다는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만 개개인의 격차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나만의 고유한 능력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세계 최고 대학으로 꼽히는 하버드, 예일 졸업생의 18%가 꿈꾸는 직장이 있다. 그 직장은 대기업 취직도 공무원도 아닌 빈민가 교사이다. Teach for America는 빈민가 자녀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비영리 단체로, 미국 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직장 톱 10에 들며 매년 신입사원의 15%를 명문대 졸업생으로 채운다. 하지만 이곳의 평균 연봉은 우리 돈으로 385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 비교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명문대를 가면 보통 돈을 많이 받고 남들이 우러러 보는 직장을 잡기 마련인데 미국은 달랐다.

 

 필자는 이 차이점을 교육에서 봤다. 만약 미국 학생들이 개인의 정체성을 '나’에서 찾기보다 사회가 인정하는 기준에서 찾고 남들과의 격차를 벌리고 혹은 줄이기 위해서만 몰두했다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좋은 학벌을 갖고 좋은 직장을 잡았을 것이다. 문제는 격차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격차에 매몰 된 사회 분위기다. 개개인이 자신의 이상과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자신의 가치를 사회가 아닌 자신에게서 찾는 사회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격차의 고통은 영원히 해결 되지 못할 것이다. 격차는 자연스럽기에 사라 질 수 없다. 하지만 그 격차를 극복하고 긍정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건 사회가 아니라 온전히 나 자신에게 달렸다.

 

 

신보균 │ 자유경제원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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