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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정’, 약산에 대한 약물타기는 끝내야 한다

19 최성환 | 2016-09-30 | 조회수: 2,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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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1898년 밀양에서 출생했다. 그는 3.1운동 이후 암살, 주요 시설 파괴 등의 무장 투쟁을 벌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섞인 단체였다. 그는 1938년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당 외에 3단체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이는 광복군보다 약 2년 앞서 조직되었다.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최초의 조선인군부대라는 의의가 있지만 실상은 중국군의 보조군 수준이었다. 조선의용대 내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왔으며,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무정을 사령관으로 하는 조선의용군 조직으로 넘어간다. 1)조선의용대의 수가 급감하자 그는 1942년 남은 조선의용대원들을 이끌고 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한다. 그는 일부에서 생각하는 뛰어난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자신의 세력이 약해졌기에 조선의용대라는 하나의 세력을 가졌던 그가 과거부터 마찰이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한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지낸 그는 해방 후 같은 해 12월에 귀국했다. 


 그는 귀국하기 3개월 전 1945년 9월에 한반도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인민민공화국에서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 2) 이듬해 2월 조선공산당이 좌익단결을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는데, 그는 2월 14일 민족주의민주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고 5인의 공동의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1948년 8월 좌우합작의 실패, 박헌영의 권유, 남한 내 김두한 세력을 비롯한 우익의 강세에 월북한다. 3) 다음 달인 9월에 그는 북한의 서열 7위인 국가겸열상에 오른다. 국가검열상은 국가검열성의 총책임자를 뜻한다. 국가검열성은 북한의 서열 1위 김일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색출하고, 북한의 국방전략을 짜는 곳이었다. 그는 그곳의 대표로 남침을 준비했던 자다. 전쟁이 일어날 때 즈음 중국에서 국공내전이라는 실전경험을 가진 3만 명의 조선의용군 합류에 그는 과연 아무 관련이 없을까?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954년 1월 대한민국의 경제혼란 및 선거방해 공작을 위한 간첩을 남파해 직접 지휘했다. 4) 1958년 그는 북한에 탄생 60주년을 기념한다는 노동훈장을 수여받았다. 5) 그는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김원봉은 1919년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의열단을 만들었다. 1923년 단재가 만든 조선혁명선언 다른 말로 의열단선언을 강령으로 삼아 외교론, 준비론, 문화주의 등의 독립운동을 비판했다. 외교론으로 독립운동을 하여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에 대한 영화는 만들지 않으면서 그에게 비난을 가하고 오직 민중혁명밖에 없다며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을 존중하지 않은 자에 대해 왜 후손들은 영화로 그를 재조명하는  것인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끝없이 통일전선을 만드는데 노력했다고 한다. 노력한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결과를 보자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정강으로 하는 의열단장인 그가 반공을 표방하는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 그 조선의용대의 다수가 얼마 뒤 중국팔로군의 회유에 자진 합류했다. 유일하게 갈 곳은 충칭의 임시정부였다. 이후 광복군 부사령관을 했음에도 귀국 때 김구와 달리 늦게 귀국했는가? 당시 충칭임시정부와 관련한 간략한 얘기가 있다. 


중국 관내에서의 좌우 충돌에는 세대간의 사상적 갭도 작용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의 지도층은 19세기 후반 또는 19세기 말경에 유년, 청년시기를 보내고 전통적인 지적 성장을 하여, 일면으로는 위정척사파적인 기질도 갖고 있는 원로들로서, 양반계급 출신이 많았으며, 근대교육을 적게 받은 편이었다. 그런데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고, 독립운동의 선배에 대해 어른 대접을 잘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측의 원로들은 김원봉 등이 나이가 젋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 있고 언행이 너무 편격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중요시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노인들한테 싫증을 내면서, 그들을 봉건영수, 민족 파시스트, 신비적 국수주의자로 간주하였고, 국수주의를 배격하자고 외쳤다.6) 


 쉽게 말해 받아줄 곳을 겨우 찾아 세들어 사는 신세에 이런 진술을 보며 과연 김원봉이라는 자가 인품이 훌륭하다고 볼 수 있는가? 영화 <밀정>에서는 의열단 시기의 활동만 나타나서 그의 리더십을 보여주곤 한다. 물론 영화에 나온 시기 이후 10여년 뒤 조직을 이탈한 부하들에 의해 뚜렷한 이념이 없으며, 현실에 대한 고려가 없는 극단적인 통일독립운동가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신세가 드러났지만 말이다.


 최근 영화를 통해 학계나 일부 단체 그리고 약산의 고향인 밀양에서 김원봉을 독립유공 훈장 서훈 추진 등에 앞장서고 있다. 심지어는 과거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 서훈 추진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단지 항일독립운동에 비중이 매우 크다는 이유 때문이다. 우선 대한민국이 김원봉에 대해 훈장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장투쟁론자들에 대해 일절 훈장을 수여하지 않는 그런 야박한 곳이 아니다. 심지어 김원봉의 부인인 박차정도 1995년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차정은 해방되기 1년 전인 1944년에 사망한다. 그녀는 남편과 달리 주적인 북한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산에 유공자가 서훈되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김원봉이 임시정부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이후 결국 자신의 국적을 어디로 선택했는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월북하여 권력을 누리다가 대한민국을 혼란하게 하려고 간첩도 보냈고, 결국 북한에서 훈장까지 받은 사람이다. 이미 그곳에서 훈장을 받을 정도로 충분히 대우를 받았는데 왜 싫다고 버림받은 대한민국 정부가 그에게 유공자의 대우를 해줘야 하는가? 


 얼마 전 올림픽이 끝났다.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영선수가 있었다. 그는 한국 선수 최초로 수영종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였다. 하지만 몇 년 전 '네비도’라는 약물을 복용하여 규정을 어겼다. 협회는 기존의 규정대로 그 선수의 리우올림픽 출전마저 거부했다. 그러자 그 선수는 스포츠중재재판소에 재판을 신청해 결국 올림픽에 나가게 된다. 이 와중에 그의 옛 스승, 소속팀인 인천시청과 관련해 인천시장까지 나서 그의 복귀에 힘을 썼다. 그 선수는 결국 천벌을 받았는지 올림픽에서 참담한 성적을 냈다. 결국 후배 수영 유망주들의 소중한 경험만 뺏은 셈이다. 인기 스포츠스타였으며, 과거 올림픽 당시 오심 앞에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 선수는 약물을 먹은 이후 올림픽 출전 앞에서 감성을 파는 약한 모습으로 자신을 호소했다. 약물 검출 이후 줄곧 약한 모습만 보여준 것이다. 


 그는 한때 영웅이었지만, 엄연히 금지약물을 복용했다. 김원봉도 마찬가지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지만 대한민국의 영웅이 아니다. 그에게 훈장을 준 북한의 영웅이다. 충칭 임시정부 시절 자신의 옛 비서였던 사미로에게 보낸 편지에 '북한은 가기 싫지만, 남한은 자신이 활동하기에 힘들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의 월북은 자신을 알아주는 곳에 간 것이다. 영화 <밀정>에 주연으로 나오는 일본 경찰 이정출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영화 <밀정>은 이전의 항일독립운동 영화와 달리 재밌게 본 측면도 있다. 인정하는 부분도 있다. 초반에 김상옥을 실제 모델로 한 김장옥이 자살하기 전 '윗 대가리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네놈은 동포를 팔아먹는구나.’ 그렇다. 조선왕족은 영화 '덕혜옹주’처럼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문의 안위를 보장받고 일본에 나라를 넘긴 것이다. 상해에서 일본경찰 정보원의 대사도 기억에 남는다. '임시정부 거기 가보십시오. 흐흐... 거지 꼴에 장관을 달고 있으니...’ 왜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절로 하면 안 되는가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영화 감독이 개성파 감독이다보니 전개에도 만족했다. 특히 과거 임시정부 통역을 했다가 일본경찰로 마지막에는 자신을 사냥개 취급한 일본경찰에 복수하는 송광호 씨의 연기에 대해 충분히 재미를 느꼈다. 


 다만 그 영화는 실제 사건인 황욱경부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도 무언가 감추는 듯한 불편함을 느꼈다. 영화에서는 단지 의열단이 단독으로 폭탄을 싣고 경성에서 거사를 벌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간에 반간을 포섭하거나 외국의 폭탄 전문가를 부르는 것도 의열단 스스로가 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사건은 의열단 단독이 아니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 같이 벌인 것이다. 7)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쉽게 말해 전로고려공산당이자 러시아에서 만들었다는 이유로 노령파로 불리운 곳이다. 그들은 독립군이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 등에서 승리한 이후 밀산에 집결해 자유시에서 강제로 무장해제시킨 조직이다. 이 사건이 바로 자유시 참변이다. 


 또 김좌진 장군을 죽인 박상실은 고려공산당 소속이거나 연관이 있는 사람이다.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실체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다 싶으면 권력이라는 약에 취해 나라를 버리며,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 암살이나 기습을 통해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내부에서 제거한 것이 바로 그들식 항일운동의 실체이다. 영화 <밀정>에서는 김원봉 역할을 특별출연으로 해놓고 실상은 주조연급의 신스틸러로 만들었다. 마치 월드컵에서 부상으로 못나온 슈퍼스타가 경기 도중 관중석에서 한두 번 나온 수준이 아니라,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는 조커카드로 나온 것이다. 필자가 쓴 이글은 혹시나 걱정하는 한 가지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조만간 보천보 전투 등으로 김일성을 미화하는 영화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역시 주조연급인 김원봉의 대사로 끝난다. '실패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실패가 쌓여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앞으로 전진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다. '실패를 인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폭력투쟁으로 독립시도, 좌우를 중간에서 통합시도, 월북 후 남침 및 간첩을 보내 적화통일 및 내부분열시도 등 실패를 인정하고 방법에 대한 고집을 버려야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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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 5 의열단 창설한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한겨레>, 1990년 6월 22일

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p60

3)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 5 의열단 창설한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한겨레>, 1990년 6월 22일

4) 어마어마한 간첩단체포 김원봉이 직접 지휘, <경향신문>, 1954년 1월 26일

5) 이우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 동아시아(2006년도), p144

6)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p174-175

7) 영화 〈밀정〉 흥행 '김원봉 독립유공 서훈' 기회로, <경남도민일보>, 2016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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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성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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