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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로스] 발표: 경제발전의 숨은 주역, 마도로스

43 곽은경 | 2016-06-07 | 조회수: 682 | 분류: 마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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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는 6.25 전쟁 때 헤어진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 된다. 그는 부산 중구의 국제시장에서 구두를 닦고, 생선궤짝을 만드는 일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공부를 잘했던 남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낼 돈이 턱없이 부족해 파독광부에 지원했다. 또 여동생의 시집 자금을 마련하기위해 베트남 근로자로 파견을 가게 된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 이것은 1960년대 가난한 대한민국의 흔한 풍경이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 세대들이 파독 광부·간호사, 베트남 파병, 이산가족 등의 이야기를 담은 <국제시장>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젊은 세대들은 아버지 세대의 '희생’에 공감했고, 그 덕에 영화는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국제시장>의 덕수가 포기한 길


영화에서처럼 1960년대 대한민국은 사람만 많고 일자리는 없었다. 산업기반이 부족해 기업들이 일자리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를 살았던 개인들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타국에서 힘들고 험한 일을 자처했다. 그렇게 독일, 베트남, 중동으로 인력이 수출됐다.


사실 덕수의 꿈은 마도로스1)였다. 선원이 되기 위해 한국해양대학교에 합격을 했지만 가족들을 위해 꿈을 포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덕수처럼 당시 국민들은 송출선원을 꿈꾸는 경우가 많았다. 외항선원은 하얀 제복을 입고 파이프를 물고 다니는 멋진 남성상의 상징으로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해외 일자리가 인기 있었던 것은 우리 경제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했다. 전쟁직후 1인당 국민소득이 66달러에 불과해 국내의 일자리보다 훨씬 벌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1972년 9급 공무원 월급이 5천원이었는데 일본선박 회사에 취업한 외항선원의 월급은 3만7천~4만 원선이었다. 맞벌이 부부가 10년 일해야 살 수 있는 아파트를 외항선원으로 1년만 고생하면 살 수 있었다. 당시 부산에서는 '배를 타면 가문을 살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고소득의 화려한 직업같이 보이지만 송출선원들 역시 <국제시장>의 덕수처럼 가족을 위해 개인을 희생한 가장들이었다. 나라가 가난해 배 한척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외국 배를 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피땀 흘려 외화를 벌었고, 이것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뿌리가 되었다. 국제시장을 통해 파독근로자, 베트남에 파견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송출선원의 공로에 대한 인식은 낮은 편이다. 이 글을 통해 송출선원들의 노고가 만들어낸 값진 열매와 과실을 밝히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개척했던 마도로스들


해외취업 선원의 시초는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선박 라밀레프스호가 부산에 입항했는데 그 배에 타고 있던 통신장이 병이 나서 부산에서 하선을 하게 됐다. 그를 대신해 대한해운공사 김강웅이 미국까지 임시승선하게 되었다. 마침 태평양 항해 중 무선기가 고장이 났고 김강웅은 그 무선기를 수리해 본국과 교신에 성공한다. 그 덕분에 정직원으로 채용됐고 2년 6개월을 더 근무하게 됐다. 이것이 송출선원의 시작이었다. 당시 김강웅은 330파운드를 받았는데 이는 대한해운공사 급여의 3배 수준이었다.2) 



이후 개인자격으로 선박당 2~3명씩 인력송출이 이뤄졌고, 1964년부터는 선박단위로 인력송출이 가능해졌다. 일본 도교항에서 홍콩의 룽화호에 김기현 선장과 28명의 선원이 1년간 계약을 맺고 승선했고, 같은 해 6월에는 룽캉호(5천140톤), 7월 룽안호(2천800톤)에 선원들이 승선하게 된다. 


“1964년 2월 10일 일본 도쿄 항구에서 홍콩에 적(籍)을 둔 일본계 화물선 룽화(龍華)호가 출항했다. 이 2천 700t급 화물선은 폐선(廢船) 대상이었다. 녹이 슬다 못해 선체는 곳곳에 구멍이 났고 바닷물로부터 녹을 막을 페인트는 다 벗겨져 있었다. 너무 낡아서 일본인 선원 누구도 승선을 꺼리던 배였다. 잡화를 가득 실은 '유령선'이 기약 없이 출항했다. 선장 김기현과 기관장 이상래를 비롯해 선원 28명은 전원 한국인이었다. 선박회사 사람들은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3) 



폐선에 가까운 룽화호는 두 달 뒤 무사히 귀향했다. 한국인 선원들은 폐선의 녹을 다 떼어내고, 페인트칠까지 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선박단위의 첫 송출이었기 때문에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로프에 매달려 배를 지키고 가꾸었고, 유령선 같던 룽화호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게 된 것이다. 


이런 한국인들의 성실함은 외국에서 널리 인정을 받았고, 한국 선원을 선호하는 회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그리스, 미국 등 선원부족 현상에 시달리는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한국 선원을 받았다.


“당시 외국회사들이 여러 나라 선원들에게 똑같은 배를 주고 경쟁을 시켰다. 일주일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얕은 수심 지역을 통과하면서 얼마나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는가를 보고 평가했다. 악으로 일한 한국 선원들이 대부분 1위를 했다.”4) 


그들은 폐선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해적들을 피해가며 약속한 기간 안에 화물을 양하하였다.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이라크 전쟁 중에도 배를 탔다. 하역 도중 기중기에 팔이 잘리고, 바람에 날리는 로프에 목이 감기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지하 5층에 내려가 뜨거운 해수로 벽을 씻고, 기름 찌꺼기를 삽으로 퍼서 드럼통에 담아 올리는 작업을 하면 가스가 발생해 현기증이 났다. 휴식시간에 사다리를 타고 오를 힘이 없어 주저앉아 쉬곤 했지만 한국선원들은 꼭 5시간 정도의 잔업을 더 했다”


“1970년대 배의 기관실은 가장 시원한 통풍구 앞의 온도가 섭씨 45도여서 그 앞에서 서서 휴식을 취해야 했다. 하루 12시간 일하는 도중 두세 번은 옷을 벗어 땀을 짜내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란, 이라크전쟁 시 부근 해협을 지나다 배에 미사일 파편이 튀어 생사의 고비를 넘긴 적도 있다. 당시에는 배에서 다리가 부러져도 다음 항구까지 항생제를 먹으며 견디곤 했다.”5) 


“1980년 이라크·이란 전쟁이 터졌다. 한국 선원들을 태운 배가 방콕에서 쌀을 싣고 이란 아미르항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쌀을 내릴 사람이 없었다. 한 달 기다리는 동안 폭격기들이 항구 위로 미사일을 쏴댔다. 어렵사리 쌀을 내린 뒤에도 전투기 한 대가 저공 비행하며 배를 한참 쫓아왔다.”6) 


선원들은 1년에 한번 집에 돌아갈 수 있었고 한번 갈 때마다 자식들은 훌쩍 커있었다. 거친 파도뿐만 아니라 외로움, 그리움과도 싸웠을 것이다. 이렇게 마도로스들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배를 탔다. 


인력송출, 실업해소와 외화획득 성과


196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상황은 참혹한 수준이었다. 6.25 전쟁으로 산업시설은 파괴되었고 경제가 성장할 기반이 전혀 없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70달러 수준, 전체 노동력의 60%가 농업에 종사할 정도로 생산성이 낮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를 발전시키고 실업을 해소하려 했다. 그러나 자본이 없어 경제개발이 쉽지 않은 상태였다.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외자유치를 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번번이 좌절됐다. 근로자의 인력송출은 실업해소와 외화획득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해외인력 송출이 이루어졌다. <표 1>은 해외에 파견된 전체 근로자 현황을 보여주고 있다. 1963~1973년 사이 7만2천여 명, 1977년 8만3천여 명의 인력송출이 이루어졌다. 1978년에는 12만 명, 1979년에는 14만 명, 1980년에는 16만 명 등 매년 2만 명이상 증가했다. 증가세는 1980년 이후에야 주춤해졌다. 1983년 22만5천여 명을 기록했다.


1963~1983년 전기간에 걸친 분야별 인력송출 현황을 보면 건축토목 분야가 가장 많았으며 전체 송출인원의 40% 이상을 차지했다. 운전정비공이 평균 16% 수준을 유지했으며, 선원의 경우 전체 송출인원의 15% 수준을 유지했다. 군수노무 분야는 12%였다. 한편 광부의 경우 전체 송출인원의 1~2%에 불과했고, 의료원은 5% 수준이었다. 


<표 2>는 전체 파견 근로자 중 외국기업에 취업한 근로자의 현황을 보여주고 있다. 선원의 비중이 60% 수준으로 매우 높으며 건축토목의 경우 10% 이하 수준이었다. 전체 송출인원 중 건축토목 분야가 가장 많았으나 이들 근로자는 대부분 국내기업에 취업되어 중동지역으로 파견된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선원의 경우 외국기업에 파견된 근로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송출선원의 대부분이 외국기업에 취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77년 외국기업 취업자의 49%를 기록했으며 1981년에는 71%까지 증가한다. 



송출선원의 경제적 효과


<표 3>은 송출선원의 취업현황을 보여주고 있다. 1967년 2,340명을 시작으로 1971년 5,164명이 외국 배에 올라탔다. 매년 송출선원의 수가 증가해 1975년 10,128명을 기록, 4년 만에 송출선원 수가 2배 이상 증가했다. 1987년 42,471명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다. 1980년까지 5년마다 2배씩 증가할 정도로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국내 선원들이 취업한 선박의 수도 1987년까지 계속 증가한다. 집계를 시작한 1970년에는 144척, 1982년에는 1,241척을 기록해 10배 이상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표 4>는 송출선원들의 외화가득액을 나타내고 있다. 1967년 337만 달러를 시작으로 매년 송금액이 증가했다. 1971년 1,072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1974년에는 3,121만 달러로 7년 만에 10배 증가했다. 1983년에는 3억3,576만 달러를 기록해 집계를 시작한 1967년 이후 16년 만에 외화가득액이 100배 수준으로 증가했다. 


전체 해외취업자가 보낸 외화 중 송출선원들의 외화송금액의 비중은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크게 증가했다. 1967년 2.94%였으나 1970년 15.22%, 1972년에는 44.22%까지 증가한다. 1973년 이후 10~30% 수준을 유지한다. 


GDP대비 송출선원들의 외화송금액 비중은 1967년 0.08% 수준이었고, 1971년 0.11%를 기록한다. 1972년 큰 폭으로 증가해 0.23%를 기록했으며 1980년까지 0.20%대 수준을 유지한다. 1981년 이후 다시 큰 폭으로 증가해 1983년에는 39%를 기록했다.


1967년 상품수출액은 3억2천만 달러였다. 상품수출액 대비 송출선원의 외화가득액 비중은 1.05% 수준이었다. 1975년에는 1.55%까지 증가했고, 이후에도 0.7~0.9% 수준을 유지한다. 


“선원수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5년 우리나라의 총수출액은 5억 달러 정도였다. 이중 2000만 달러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양곡수입에 사용했다. 같은 해 해외취업 선원의 수입이 150만 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양곡수입액의 10% 가까이를 선원들이 벌어들인 셈이다. 해외취업선원 1,000여명이 3,000만 명의 배고픔을 해결했던 시절이다. 1972년엔 20만t급 유조선에 원유를 가득 싣고 오면, 대한민국 전체가 4~5일 쓸 수 있는 양이었다.”7)  



외화가득액을 기준으로 보면 송출선원들은 파독근로자보다 경제적으로 더 큰 기여를 했다. <표 5>에 따르면 파독근로자가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송금한 외화는 1억128만 달러였다. 비슷한 기간인 1967년부터 1978년까지 송출선원들이 송금한 외화는 4억3,937만 달러였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송금한 금액의 4배에 달한다.  


연도별로 비교해보면, 파독근로자가 1964년 11만2천 달러를 시작으로 1967년 570만1천 달러, 1975년에는 2,768만 달러의 외화를 국내로 송금했다. 외항선원의 외화가득액은 첫 집계를 시작한 1967년을 제외하고 모든 기간에서 파독근로자보다 높았다. 


1969년 파독근로자 송금액이 124만6천 달러를 기록했는데, 같은 해 송출선원의 외화 가득액은 557만7천 달러를 기록했다. GDP 대비 파독의 경우 0.02%, 송출선원은 0.08%를 기록해 4배 이상 높았다. 파독광부의 송금액이 가장 많았던 1975년에도 파독근로자는 2,768만 달러, 송출선원은 4,836만6천 달러를 기록했다. 



마도로스, 바다를 노래하다


외항선원들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하면서 이를 소재로 한 노래가 많이 발표됐다. 1950~1970년대 중반까지 100여곡이 발표됐을 정도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겠다 그중 남일해의 '첫사랑 마도로스’, 고봉산의 '아메리카 마도로스’, 백야성의 대표곡 <잘 있거라 부산항> 등이 유명하다. 이 곡들은 해외 송출선에 몸을 싣는 선원, 배, 항구, 이별 등을 소재로 한 노래말을 담고 있다. 또 마도로스에게 순정을 바친 여인과 연인에 대한 기다림을 노래하기도 한다.


<첫사랑 마도로스>는 “푸르른 달빛이 파도에 부서지면 / 파이프에 꿈을 실은 첫사랑 마도로스”라는 가사가 나온다. 당시 송출선원들은 하얀 제복, 캡틴모자와 함께 파이프를 물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도로스는 외국에서 달러를 벌어오는 부의 상징이자 해외여행을 자주 하는 글로벌맨, 강한 남성을 연상시킨다. <마도로스 박>은 “의리에 죽고 사는 바다의 사나이다 / 풍랑이 사나우면 복수에 타는 불길 / 바다를 주름 잡아 떠돈 지 몇몇 해냐 / 얼마나 그립던 내 사랑 조국이냐 / 돌아온 사나이는 아~ 그 이름 마도로스 박”라며 송출선원들의 남성성을 노래했다. 


<마도로스 삼총사>도 “별만이 알고 있는 외로운 손길 / 똑같은 운명선에 정든 사이 아니야 / 변치를 말자하는 마도로스 맹세다 / 아 마도로스 삼총사”라고 노래하며 선원들의 의리를 강조한다.


또 송출선원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곳, 부산항에 대한 노래도 많다. <잘있거라 부산항>, <아메리카 마도로스>, <돌아온 부산항구> 등이 대표적이다. <아메리카 마도로스>는 “무역선 오고 가는 부산항구 제2부두 / 꽃물결 넘실대는 부산항구 제2부두”라 노래하는가 하면 <잘있거라 부산항>은 “아~아~아~아~잘 있거라 부산항구야/ 미스김도 잘있어요 미스 리도 안녕히”라며 항구의 이별을 노래한다.


마도로스의 애환을 술로 달래는 노래가사도 있다. 1960년 백야성의 <마도로스 부기>는 마도로스 노래 중 최고 히트송이다. “항구의 일번지 부기우기 일번지 / 그라스를 채워 다오 부기우기 아가씨 / 고동이 슬피울면 이별이란다 / 저달이 지기 전에 이 술이 깨기 전에 / 부기우기 마도로스 부기우기” 


고봉산의 <마도로스 센터>도 마도로스들의 여가생활을 노래한다. “술을 찾는 마도로스 노래하는 마도로스 / 항구의 하루밤을 멋지게 노는구나 / 손짓과 발짓으로 말이 통하는 / 세계의 방방곡곡 마도로스다 / 라라루라 라루루라뚜라루 / 마도로스 쎈타에는 이밤도 호화판이다”


장보고의 정신을 이어 받다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은 바다로 진출했을 때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번영했다. 반면 내륙으로 집중할수록 쇠퇴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바다를 통해 교류를 넓히며 문화를 꽃피웠다. 또 장보고는 9세기에 청해진을 설치해 당나라, 일본과 국제무역을 했으며, 아라비아와 중계무역을 하면서 해상활동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반면 쇄국정책을 주장했던 조선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경제를 발전시키고 세계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바다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바다에 진출해 대한민국의 경제영토를 넓히면서 경제발전을 이끌어온 송출선원들의 사회적, 경제적 의미는 크다고 하겠다. 그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송출선원들이 익힌 선박운항기술과 경험은 해운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우리나라가 현재 조선산업 1위, 해운산업 9위의 해양산업의 국가가 된 것도 외항선원들의 숨은 공로가 컸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10위의 경제 무역대국이 되었다. 자원의 대부분을 수입하고, 무역의존도가 70%가 넘는다. 즉 개방화와 국제무역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바다는 중요하다는 의미다. 9세기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날인 5월 31일을 바다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장보고가 청해진에 해상왕국을 세우고 국제무역으로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었듯이 대한민국도 개방화, 자유무역을 강화해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겠다.


당시 <국제시장>의 덕수와 송출선원들도 대한민국의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애국심이나 시대적 사명이라는 거창한 구호보다는 '외국의 일자리’, '안정된 소득’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에 대한 헌신과 삶에 대한 책임감이 모여 '한강의 기적’, '대한민국의 성공신화’를 이끌었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의 자유로운 '사익’ 추구가 '공익’, 국가의 부를 이끈다는 메시지와 닿아있다. 나라가 개인을 부유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척정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뭉친 '개인’들이 개인과 국가발전의 씨앗이 된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참고문헌


김수곤, 최돈길(1985), 해외인력진출의 경제적 효과분석, 한국개발연구원.

권혁철(2014), 파독의 국가경제적 의미, 자유경제원 세미나 발제문.

한국선원인력관리소(1989), 한국선원선박통계연보.


문화일보, <실록, 수출 40년> 바다 사나이 1000여명이 '3000만의 배고픔’ 달래, 2005년 10월 25일

조선닷컴, 五大洋 헤치며 달러벌이 43년… '뱃놈'은 그렇게 가난과 싸웠다.

연합뉴스, <선원송출 60년> ① 조명받지 못한 경제역군 '선원', 2014년 12월 23일


곽 은 경 실장 | 자유경제원 시장경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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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덜란드어로 '마투로스matroos’ 였으나 일본식 발음 마로도스로 불린다.

2) 연합뉴스, <선원송출 60년> ① 조명받지 못한 경제역군 '선원', 2014년 12월 23일

3) 조선닷컴, 五大洋 헤치며 달러벌이 43년… '뱃놈'은 그렇게 가난과 싸웠다.

4) 문화일보, <실록, 수출 40년>바다 사나이 1000여명이 '3000만의 배고픔’ 달래, 2005년 10월25일

5) 문화일보, <실록, 수출 40년>바다 사나이 1000여명이 '3000만의 배고픔’ 달래, 2005년 10월25일

6) 조선닷컴, 五大洋 헤치며 달러벌이 43년… '뱃놈'은 그렇게 가난과 싸웠다.

7) 문화일보, <실록, 수출 40년>바다 사나이 1000여명이 '3000만의 배고픔’ 달래, 2005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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