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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인물기행]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조선인 고선지

406 복거일 | 2015-06-08 | 조회수: 3,333

우리 시민들과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 정부가 조선족의 민족주의적 움직임을 경계하는 태도가 눈에 뜨인다. 그런 태도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지도를 보면, 중국의 변방은 거의 다 소수 민족의 자치지역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소수 민족들의 민족주의는 중국이 맞은 현실적 위협이다. 특히 몽골족과 조선족은 바로 이웃에 모국이 있고 티벳족과 신강(新講)의 위구르족은 드러내놓고 독립을 바란다.

지금 가장 위협적인 것은 위구르족의 독립운동이다. 위구르족은 인종과 문화가 한족과 크게 다르고, 중국의 지배를 받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민족주의적 열정이 무척 거세다. 그리고 '신장위구르자치주라 불리는 신강은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은 데다가 자원도 풍부해서, 독립국가의 가능성도 크다. 몇 해 전 베이징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에 대한 중국 정부의 반응에서 잘 드러났듯이,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의 독립운동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사정을 제대로 살피려면, 우리는 고선지(高仙芝, ?~755)가 활약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강은 중국 사람들이 서역(西域)이라 불러온 지역의 동쪽 부분이다. 서역은 감숙성(甘肅省) 옥문관(玉門關) 서쪽에서부터 천산로(天山路)와 파미르 고원을 거쳐 아랄 해에 이르는 너른 땅이다. 주민들은 대체로 이란족과 터키족에 속한 사람들이다. 중국이 이곳에 처음 진출한 것은 기원전 2세기 말엽 한() 무제(武帝)때였다. 당시 서역은 흉노(匈奴)가 지배했는데, 한은 그들을 몰아내고 서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2세기에 한이 쇠퇴하자, 서역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중국이 다시 서역에 진출한 것은 7세기 중엽 당()때였다. 당시 그곳은 서돌궐(西突厥)의 영토였는데, 서돌궐이 내란으로 약해지자, 당은 빠르게 서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8세기에 당의 서역 지배는 강력한 세력들의 도전을 받았다. 하나는 중국 사람들이 대식국(大食國)이라 부른 사라센 제국으로, 그들은 이미 아무 다리야에 이르렀다. 다른 하나는 중국 사람들이 토번(吐蕃)이라 부른 티벳으로, 그들은 이미 인더스 강 유역으로 진출한 터였다. 두 세력은 연합해서 중국에 맞섰고, 토번은 당과 파미르 고원 서쪽의 속국들 사이의 교통을 끊었다. 그래서 현종(玄宗, 재위 712~756)은 고선지에게 서역을 수복하는 임무를 맡겼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의 후예였다. 정복된 이민족의 후예가 그렇게 중요한 군사적 임무를 맡았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것은 실은 당의 제국적 면모를 잘 보여준다.

당시 큰 군대를 거느린 절도사(節度使)들 가운데는 이민족의 후예들이 많았다. 동북부의 절도사 셋을 겸임했다가 끝내 모반한 안록산(安綠山)이나 그와 싸우다가 죽은 가서한(哥舒翰)은 대표적이다. 그보다 앞서, 태종(太宗, 재위 626~649)이 서역정복사업을 맡긴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도 돌궐 사람이었다. 중앙에 기반이 없는 이민족의 후예들에게 병권을 맡긴 데는 황실을 보호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그렇게 인재를 널리 구한 정책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성하고 앞섰던 당 제국의 풍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빈공과(賓貢科)를 설치해서 조직적으로 제국의 변경 너머에서 인재들을 뽑은 일도 같은 맥락에서 살필 만하다.

747년 타슈켄트의 석국(石國)이 모반하자, 고선지는 다시 정벌에 나섰다. 석국 왕은 이내 항복했으나, 고선지는 그를 잡아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보냈다. 불행하게도, 석국 왕은 거기서 피살됐다. 원래 석국 왕은 무고했거나 잘못이 가벼웠던 듯하다. 그리고 석국을 점령한 당군의 행동은 석연치 못했다. 그래서 서역의 여러 나라들은 당에 대해 원한과 두려움을 품게 됐다. 751년 석국 왕자는 동족(同族)인 돌궐 사람들과 사라센 제국에 지원을 호소했다. 이 호소에 응해서, 돌궐 군대는 북쪽에서 내려오고 사라센 군대는 남쪽에서 올라왔다. 그들에게 협공당한 당군은 키르기스탄 서북부의 탈라스 강 계곡에서 그들과 대치하다가 제풀에 무너졌다.

중국측 사료는 고선지의 패배가 돌궐족 부하들의 반란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다른 사료에 따르면, 고선지가 불리한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밤중에 군대를 후퇴시켰는데, 야간 작전의 혼란 때문에, 후퇴 작전이 패주로 이어졌다고 한다. 어느 경우든, 고선지에 대한 평가가 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탈라스 싸움은 그리 큰 싸움이 아니었다. 고선지가 거느린 군대는 3만명 가량이었고, 사라센 군대나 돌궐족 군대도 그리 큰 군대는 아니었을 터이다. 당 사람들이 그 싸움을 중요하게 여긴 것도 아니었으니, 고선지는 그 패전으로 문책을 받지 않았다.(그는 뒤에 안록산의 군대와 싸우다가, 의심을 받아 진중에서 처형됐다.)

그러나 그 작은 싸움이 역사에 미친 영향은 무척 컸다.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명에 뿌리를 둔 서아시아 문명과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문명이 처음으로 정색하고 부딪친 싸움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먼저, 그 싸움에서의 패배로 중국의 서역 경영은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 곧 일어난 '안사지란(安史之亂)’으로 전성기에서 갑자기 쇠퇴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당은 서역을 수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서역은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이 신강성 동부에 잠시 진출했던 일 말고는, 18세기 중엽 청()이 진출할 때까지 중국은 서역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다음엔, 서역이 사라센 제국의 세력 안에 들어감으로써, 서역은 이슬람교 권역이 되었다. 서역은 원래 불교가 성한 곳이었는데, 이슬람 세력의 모진 박해를 받아, 불교는 급속히 쇠퇴했다. 셋째, 탈라스 싸움은 사라센 제국으로 하여금 동방에 관심을 갖게 했다. 원래 아라비아에서 나온 터라, 사라센 제국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지중해 지역으로 끌렸다. 그러나 718년에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다가 실패했고 732년엔 프랑크 왕국과의 투르 싸움에서 패배해서, 사라센 제국의 유럽 진출은 좌절됐다. 서역에서 뜻밖의 성공을 거두자, 사라센 제국의 무게중심이 상당히 동쪽으로 움직였다. 수도가 지중해에서 가까운 다마스커스에서 동쪽의 바그다드로 바뀐 것은 이런 변화를 상징했다.

눈에 이내 띄는 그런 영향들보다 오히려 컸던 것은 문화적 영향이었다. 사라센 군대에 붙잡힌 당의 주민들과 병사들 가운데 기술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슬람 세계에 중국의 문명이 많이 전파됐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제지 기술이었으니, 막 피어나던 이슬람 문화는 그 기술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제지 기술은 유럽에 전해지면서, 더욱 큰 영향을 미쳤다. 근대 유럽 문명의 발전에서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 1400?~1468?)의 인쇄술이 크게 공헌한 것은 잘 알려졌다. 그러나 값싼 종이가 없었다면, 그래서 비싼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의존해야 했다면, 인쇄술이 문명의 발전에 과연 얼마나 큰 공헌을 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인쇄술이 발명되기나 했겠는가?

회흘(回紇)로 불린 위구르족은 원래 철륵(鐵勒)이라 불린 북방 유목민족의 한 종족이었다. 돌궐의 세력이 강할 때는, 회흘은 쭉 그들의 지배를 받았는데, 돌궐의 세력이 약해진 8세기에 갑자기 융성했다. 그들은 당의 영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서역의 동쪽에 자리 잡았는데, 당과 우의가 깊었다. 그래서 '안사지란에서 당의 황실을 여러 번 위기에서 구했고, 당과 토번 사이의 싸움에서도 당의 우군으로 협조했다. 그러나 9세기엔 세력이 갑자기 약해져서, 서쪽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그들과 지금 신강에 사는 위구르족 사이엔 혈연이나 문화에서 직접적 관련은 없다.

참다운 제국답게 당이 이민족들을 너그럽게 대했으므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만이 아니라 신라와 발해의 조선 사람들도 당에 많이 진출했다. 조선 사람들이 세계의 중심지에 그렇게 많이 진출했던 적은 없었다. 20세기 후반에 미국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최치원(崔致遠, 857~?)처럼 빈공과에 합격해서 벼슬을 한 이들도 있었고, 원측(圓測, 613~696)처럼 당에 유학해서 활동한 불승들도 많았다. 고선지 말고도 병권을 쥔 조선족 장군들도 있었으니, '안사지란뒤 절도사가 된 후희일(候希逸)은 모계가 고구려 후예였고, 그를 몰아내고 절도사가 되어 정기(正己)란 이름을 하사받은 이회옥(李懷玉)은 고구려 후예였다.

백제의 항장(降將) 흑치상지(黑齒常之, 7세기 후반에 활약)도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고선지만큼 중요한 일을 하고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었다. 고선지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활약한 중국 사람이었다. 고구려 사람의 후예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보아서, 그를 조선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아마도 그는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조선 사람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싸움에서 진 데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탈라스 싸움은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의 영향은 천 년 넘게 지난 지금도 신강의 너른 땅에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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