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민사회는 90년대 이후 `압축적’ 성장을 했고, 2000년을 `한국 NGO 혁명의 해’로 기록하는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이러한 한국 시민사회의 역동성은 민주화의 진행과 함께 그 힘을 더해가고 있다. 특히 `문민정부’로부터 시작하여 `국민의 정부’를 거쳐 현정권인 `참여정부’에 이르면서 시민사회는 존재의 의미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더욱이 후기 산업사회로의 사회변화가 진전되면서 시민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다양한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신사회운동적 성격을 띤 시민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우리사회에서 시민단체의 분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그리고 의미 있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시민사회는 시민단체만 있고 정작 시민은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공존하고 있다.
한국 시민단체에 대한 비판과 우려는 물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그 중 한국의 시민단체가 갖고 있는 과도한 정치적 성향과 정치참여는 그 중심 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논란은 지난 2000년 16대 총선을 계기로 촉발되었고 오는 17대 총선에서도 재현될 것으로 보여 이를 둘러싼 시민사회의 논쟁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본 고는 시민단체의 정치참여와 개혁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규명함과 동시에 이와 관련하여 한국 시민단체가 어떠한 문제를 노출하고 있으며 건강한 시민사회를 위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무엇인지 제시해 보고자 한다.
우선 한국의 시민사회는 `엘리트형 시민사회(elitist civil society)’로 분류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는 지식인이나 엘리트 그리고 전문가와 같은 특정집단이 NGO의 성장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NGO활동에 과거 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재야인사, 운동가,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즉 한국 NGO의 성장이 소위 명망가 중심의 Top-down 모형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국 시민단체의 성장특징은 특히 규모가 큰 시민단체의 선단식 조직구조 속에서 강화되어 과두제적 지배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그 결과 시민단체 운영에서 시민단체가 본래 추구하고자 했던 목적보다는 조직의 유지에 더 치중하며, 시민단체지도자들이 단체의 역량을 개인의 이익추구수단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목적전치(goal-displacement)’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모든 의사결정은 다수의 참여와 지지를 획득할 때 비로소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소수의 지식엘리트와 운동엘리트에 의해 주도되는 시민단체의 의사결정과 조직운영은 그래서 정당성의 문제를 가질 수밖에 없다. 만일 조직화된 소수의 시민단체에 의해 사회적 공론이 지배된다면, 개혁지향적인 그들의 운동은 정당성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현실에서 다수의 시민과 대중들이 이 같은 의사결정으로 인해 스스로 자기결정과 거부권을 포기하게 될 때, 소수에 의한 지배는 합리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사결정구조 속에서 획득된 정당성과 이에 기초한 시민단체의 활동은 한편으로는 일방적 독선과 무책임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오류성의 환상과 지적 오만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시민단체의 정치참여논란도 위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더욱이 시민단체인사들의 제도권 정치로의 진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시민단체와 시민단체인사들의 일련의 정치적 행보로 인해 혹여 시민단체의 정체성이 훼손되거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지는 않을까 하는 소위 `포섭의 정치’에 의한 `영향력의 정치’의 상실이 우려된다. 물론 시민단체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한다는 시민운동진영의 핵심적 논리는 현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지체’를 극복하기 위한 `대의의 대행’으로 함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한 시민단체의 정치참여와 운동방식이 법치주의를 뛰어넘어 초법화되고 그로 인해 시민단체가 사회정의를 자의적으로 재단한다면 이는 분명 개혁을 위한 시민운동이 국민적 신뢰성을 상실하게 되는 치명적 결과를 가질 수 있다.
시민단체의 과도한 정치참여와 초법화된 운동방식은 필연적으로 시민사회내부에서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편가르기를 조장하게되고 그 결과 시민사회의 통합보다는 분열을, 화합보다는 갈등을 양산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사회통합이나 신뢰와 같은 사회자본을 제공하는 시민단체의 순기능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즉 시민단체가 그들과 이념을 같이 하는 일부의 시민만을 껴안고 갈 때, 시민단체의 배타적 행위노선은 그들과 가치를 달리 하는 다른 시민들의 진입을 가로막는 하나의 장벽이자 규제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시민단체가 이익집단과 달리 정치적 중립과 순수성을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시민단체에 의한 시민운동의 정치참여는 `영향력의 정치’를 뛰어 넘어 시민정당 창당과 같은 `진입의 정치’를 추구하는 일련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제도정치의 진입을 통한 개혁의 성공전망이 그리 밝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왜냐하면 시민운동이 최종적으로 제도화되어 정치권과 같은 권력구조에 편입되게 되면 변화와 개혁 지향적 운동의 본질과 속성은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보다 한발 앞서간 서구의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 한국사회의 시민단체가 견지해야할 운동정치의 지향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한국의 시민단체에 의한 운동정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법질서에 부합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시민단체가 추구하는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 걸친 전반적인 사회개혁운동은 어떤 경우에도 예외 없이 법치주의, 적법절차, 자유시장경제질서라는 헌법의 기본원리를 준수하고 그 틀 내에서 이루어 질 때에만 국민적 신뢰성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시민운동정치는 비정파성 혹은 중립성이라는 원칙에 충실해야하고 주도권 경쟁을 자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택의 강요를 요구하는 운동정치는 사회 통합보다는 분열을 가져다 줄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셋째, 지식인 그룹으로 이루어진 시민단체인사와 지도자들은 외부의 비판에 대해 진솔한 자기 성찰적 반성을 해야하고, 이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책임 있는 입장정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민단체인사들의 이러한 태도가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