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의학기술의 발달로 세계각국은 인구의 노령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65세 이상, 특히 75세나 8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급증하고 있다(Martin Feldstein, 1997).
최근 대두되고 있는 국민연금의 재정문제도 전세계적인 노령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노령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연금 지급이 본격화되는 2020년대 중반부터는 연금급여가 보험료 수입을 초과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립되는 액수보다 지급되는 보험금이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노령화는 국민연금제도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국민연금제도를 설계할 당시 인구의 노령화를 예측할 수 없었을까? 국민연금이 시작되던 1988년은 이미 노령화가 상당히 진행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현재와 같이 낮은 보험료율과 높은 급여의 지급을 약속했을까? 연금기금의 고갈을 예견하면서도 왜 계속 비효율적인 자금운용을 계속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은 국민연금제도를 비롯한 모든 사회보장제도의 운영이 정치적 속임수political manipulation와 무관할 수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Oscar Godoy and Sal-vador Valdes-Prieto, 1997, p.58). 이것은 대중민주주의라는 동전의 뒷면과 같은 것이다. 대중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치가(보다 엄밀히 말하면 정치집단)들은 국민 다수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하는 강력한 인센티브를 갖게 된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각종 연금의 혜택도 이러한 문제와 무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은 보험료를 내고도 터무니없이 큰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사실은 국민연금의 모순을 잘 설명해 준다.
국민연금제도의 또 다른 속임수는 소득재분배의 명분이다. 국민연금의 가입자들은 소득재분배 기능을 통해 만약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자신의 노후를 충실히 지켜줄 것으로 믿게 된다. 그러나 과연 국민연금이 추구한다던 소득재분배는 달성될 수 있는 것일까? 애당초 국민연금제도는 저소득층은 물론 고소득층도 자신이 적립한 금액보다 많은 금액을 받을 수 있게 설계되었다. 다시 말해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는 연금제도를 설계한 것이다.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는 소득재분배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설사 합리적인 연금제도를 설계했다고 하자. 그것이 기금의 효율적 운용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당사자들은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연금기금을 이용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연금기금은 연금 가입자들의 이익과 전혀 관계가 없는 방향으로 운용될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의 국민연금은 물론 세계 대다수 국가의 국영연금제도가 파산위기에 빠진 이유는 이처럼 국영연금이 이해집단들의 정치적 압력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이 시행된 1994년부터 국민연금기금의 대부분이 공공부문에 투입되어 일종의 준조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연금급여와 보험료가 미래에 발생하게 될 연금기금의 고갈문제를 고려하기보다는 다양한 계층의 가입자(투표권자)의 구미에 맞도록 결정되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그리고 기금의 운용이 정치적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국민연금제도를 비롯한 국가독점적 국영연금제도의 근본적 문제인 것이다.
국가가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국민연금제도의 또 다른 모순은 국가가 연금가입자와의 약속을 어겼을 때(예를 들어 보험료를 인상하고 급여를 낮췄을 때) 연금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없는 국민들이 국가의 방침에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는 필요에 따라 약속을 어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연금의 소비자인 국민들도 연금 서비스의 질을 개선시킬 수 있는 견제 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연금개혁안은 민영화이다. 민영화란,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양한 금융기관을 선택해 자신의 연금을 운용하게 하는 것이고, 연금의 관리ㆍ운용자였던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입장에서 보면, 국민연금이라는 상품에 대한 독점적 권한이 사라진 것이다. 민영화를 통해 개인은 선택의 자유를, 연금의 관리ㆍ운용자는 경쟁을 통한 효율적 운용의 동기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적연금제도의 근본적 모순은 해결될 것이다.
이 글이 제시하고 있는 민영화의 구체적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는 국민연금의 설계, 운용상의 모순을 인정하고 급여지급의 최초 약속을 지킬 수 없음을 밝힌다. 또 국민연금을 개인구좌식 적립방식으로 이행하여 모든 가입자가 자신이 적립한 금액에 일정한 수익률을 더해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한다.
둘째, 국민연금관리공단과는 별개로 금융기관들이 국민연금을 관리ㆍ운용할 수 있도록 하여, 가입자가 국민연금과 금융기관이 관리ㆍ운용하는 민영화된 연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민연금관리공단의 독점적 연금 관리ㆍ운영의 권한은 사라질 것이다. 또한 공공자금관리기금의 예탁을 차단할 수 있다.
셋째, 가입자들의 적립금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공공자금관리기금 예탁금을 상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간접자본 등에 투자되어 있는 공공자금관리기금 예탁금의 상환을 위해 일시적인 재정적자는 불가피할 것이다. 이러한 재정적자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정부소유의 자산을 매각해야 한다.
넷째, 민영화된 새로운 제도는 칠레의 PSA와 유사한 개인연금저축구좌를 통해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섯째, 가입자들은 자유롭게 연금 관리ㆍ운용 기관들을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국민연금보험료는 소득의 일정 비율로 의무화한다.
일곱째, 최소한의 사회보장, 즉 공적부조는 재정부담을 통해 해결한다.
이상의 방안들을 통해 국민연금의 민영화는 많은 경제적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저축의 동기가 높아질 것이며 자본시장의 성숙에 이바지할 것이다. 특히 외환위기나 주식시장의 붕괴와 같은 혼란을 막을 수 있는 막대한 양의 국내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고 경제의 펀더맨털fundamental을 건실하게 할 것이다. 물론 국가가 운영하던 국민연금제도에 경쟁자를 허용하는 민영화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 민영화는 반드시 추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