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뽕`의 정치경제학

김성준 / 2023-09-04 / 조회: 6,317       시장경제

요즘 여기저기서 자주 들리는 말 중 하나가 ‘국뽕’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말은 국가와 마약의 하나인 필로폰(philopon)의 일본어인 히로뽕의 합성어이다. 유튜브를 비롯한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유행하면서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무언가 뛰어난(!) 일을 했을 때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높여 부르는 말로 흔히 사용하게 되었다.


문제는 국뽕으로 내용에 대한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자국의 전통, 문화 등이 최고라고 맹목적이며 광신적으로 믿는다는 데 있다. 그 결과 다른 나라나 민족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국수주의(chauvinism)의 길로 빠지기 쉽다.


그런데 한심한 건 국뽕이라는 말 자체가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자국 중심의 태도와 자부심의 표현에 어떻게 외국어와 합성어를 만들어서 말할 수 있나?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특히 일본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국뽕에 차있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의 두뇌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이 국뽕에 취해가고 있다. 개인 혼자 국뽕에 취하는 거야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수가 하나, 둘 늘어나 다수가 되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이슈로 발전한다. 흡사 마약이 그렇듯이. 개인적으로는 이 또한 잠깐 지나가는 현상이라고 믿고 싶지만, 마약에 한 번 취하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것처럼 국뽕에 취해 쉽게 벗어나니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날까 은근히 염려된다. 국뽕은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해롭다. 특히, 시장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으로 해롭다.


너무도 유명한 Leonard Read의 ‘저는 연필입니다(I, Pencil)’의 메시지를 다시 떠올려보자. 인류가 오랫동안 사용해 온 작은 연필 하나가 어떻게 탄생하여 우리 곁에 오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필을 구성하는 나무, 연필심, 지우개 등은 캘리포니아, 오레곤, 미시시피 등 미국 내뿐만 아니라 멕시코, 인도네시아, 이탈리아 등 세계 곳곳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의 기술과 능력이 더하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물이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세상 누구도 연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정확히 모르며, 나아가 아무도 강제로 지시하고 감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필 제작에 관련된 사람들은 자신에게 연필이 필요해서 열심히 일한 게 아니다. 연필의 탄생에 필요한 건 오직 연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 즉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에 쉽게 지나치게 되는 이 단순하면서도 기적과도 같은 사실은 시장의 탈인격성(impersonality)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동네 가게에서 과자를 살 때 기본 재료가 되는 밀을 도대체 누가 재배했는지 알지 못한다. 밀을 재배한 사람이 백인인지, 흑인인지 우리와 같은 동양인인지 알 수 없다. 또한 과자를 판매하는 사람들의 종교가 무엇인지, 그들이 페미니스트인지 반페미니스트인지도 알지 못한다.


물론 요즘은 원산지와 성분 표시 등의 규제가 있어 재료가 국산인지 외국산인지 정도는 알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국내에서 만들었다 하더라도 과자의 생산과정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지 알 수 없다. 요즘 상황으로 봐서는 외국인 노동자가 상당수 참여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지 않을까?


아니. 냉정하게 말하면 사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 필요도 알고 싶지도 않다. 소비자로서 나는 값싸고 좋은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합리적인 소비자는 시장에서 상품을 구매할 때 그 생산, 유통, 판매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연필 하나, 과자 하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기 위한 모든 정보를 수집해서 얻는 편익보다 이에 소요되는 비용이 더 큰 경우 차라리 무시하는 게 오히려 합리적이라는 ‘합리적 무지론(rational ignorance)’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시장의 탈인격성이 바로 시장의 진정한 아름다움이자 미덕이다. 시장은 이렇듯 경제적 활동을 정치와 그 모든 편견으로부터 구별한다. 경제활동에서 생산성과는 무관한 그 어떤 이유로부터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보호한다.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피부색, 성별, 이념, 종교 등 그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이것이 시장경제가 어떤 체제보다도 어떤 정부보다도 윤리적으로 우월한 이유이다,


어느 정도의 국뽕은 피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자신의 나라, 자기 민족에 대한 애착은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서 생기기 때문에 국뽕은 우리 한국인에게만 있지 않다.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에게도 있다. 만약 그들 역시 나름대로의 국뽕에 취해 자국의 것만을 배타적으로 선호하고 한국 제품을 차별한다면 우리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국뽕은 ‘내로남불’의 또 다른 이름이며, 마약처럼 위험하다.


김성준 경북대학교 행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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