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정부평가] 복지정책: 타율적 복지로 인한 예정된 실패

유동운 / 2007-08-16 / 조회: 7,521
참여정부의 복지정책 프로그램들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가 국정이념으로 내세운 생산적 복지(welfare to work)에 의존하여 복지정책을 추진해왔다. 생산적 복지는 원래 문민정부에서부터 시작된 복지정책의 패러다임이었지만, IMF 환란으로 구조조정의 여파로 실직한 사람들의 빈곤완화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요구되었다. 그에 따라 국민의 정부는 전국민연금제도, 기초생활보장제도, 의약분업과 건강보험 통합 등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복지정책을 시행하였다. 특히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국민이 인간적 존엄성과 자긍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생활을 보장하고 또한 자립적이고 주체적으로 경제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고 분배의 형평성을 제고함으로써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사회발전을 추구한다는 다분히 정치적 미사여구로 치장되어 태동하였다.


이에 비해 참여정부는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불안정한 고용, 그리고 실업으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으로 사회양극화가 심해지자 이를 해소하는 데 복지정책의 목표를 삼을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사회적 화두로 등장한 저출산ㆍ고령사회에 대비한 복지시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저출산ㆍ고령사회에 대비한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연금제도를 개선하고, 보건산업을 육성하며, 그리고 국민의 건강과 안전 보장을 강화하는 시책 등을 추진하였다. 특히 소득양극화를 개선하여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려는 의도에서 보건복지 분야 서비스 일자리를 확대하고 사회안전망 사각지대를 해소하려고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보완하는 계획을 마련하였다.

자원배분을 왜곡하는 복지정책


생산적 복지란 문민정부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복지를 생산적인 복지와 비생산적인 복지로 양분하는 바람에 복지정책이 경제정책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버리고 말았다. 원래 복지란 생산(근로)에 중립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복지프로그램으로 지급되는 예산지원이 노동공급이나 시장수요에 영향을 미쳐 자원배분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상적인 복지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참여정부에 들어와, 복지가 경제기능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바람에 심지어 일자리 창출이 보건복지부가 수행하는 기능이 되어버리기까지 하였다. 가령 「성장과 분배가 조화된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비전으로 설정하는 등 보건복지부가 경제부처의 비전을 대신 수행하는 역할을 떠맡았고 있는 모습을 접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복지란 생산과는 무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풀어지는 사업으로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이 확보되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복지관련 예산이 근로를 제공하도록 독려하거나, 이와 반대로 근로를 기피할 수 있도록 억제하는 따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면 이는 복지를 모독하는 짓이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복지관련 급여를 수급받아 인간적 존엄성(헌법 제34조 제1항에서 말하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이 유지될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해주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복지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근로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복지혜택이 주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현재 정부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에게 일자리가 마련되도록 자활사업을 독려하는 데에 복지예산을 활용하는 등 경제적 인센티브의 수단으로 오용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복지관련 교수로부터 저소득층으로 하여금 복지급여를 그저 받기보다 근로하도록 유도한다는 성격을 지니므로 신자유주의적인 성격의 복지정책이란 비난까지도 쏟아졌다.


참여정부의 복지정책이 성공한 사례를 들어 복지예산의 경제중립성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그동안 정부는 장애인관련 예산의 절반 이상을 장애인 차량 LPG지원에 사용하여왔다. 그런데 장애인 차량 LPG지원제도는 지원받아서는 안 되는 계층에게 혜택이 돌아가거나 근로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이었다. 최근에 이를 없애는 대신 절감된 예산을 장애수당이나 장애아동부양수당으로 지급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기존의 혜택을 빼앗는 사업으로 반대도 많았을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다. 장애수당이나 장애아동부양수당으로 근로가 줄거나 늘어날 까닭이야 없지 않겠는가? 아마 수혜자들이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확보하는데 요긴히 사용할 수 있는 재원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LPG 차량을 사용하지 않아도 인간적 존엄성은 유지될 수 있을 터이니까. 칭찬받을 만한 복지정책의 전환이다. 노동공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업에 재원이 돌려졌기 때문이다.

의타심을 조장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란 국민의 정부에서 만들어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해 근로능력의 여부와 관계없이 최저생계비를 국가가 보장해주는 복지시책이다. 그러다가 참여정부에 들어와 보장을 받지 못하는 수혜자들을 구해주기 위해 부양의무자를 완화시켜주거나, 장애수당을 인상시키거나, 차상위계층에게도 일부 혜택이 돌아가는 따위의 보완책을 마련해 추진하였다. 물론 불필요하게 부양의무자를 지정함으로써 선(先)가족-후(後)국가 중심의 복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비난도 있지만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인류박애정신에서 나온 훌륭한 산물이라고 하겠다. 그런 까닭에 이전부터 생활보호대상자라고 불리어지던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복지혜택을 받아온 바가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생활보호대상자가 기초생활보장자로 개명한 것에 지나지 않아 정권의 치적으로 내세울 것은 못된다.


그런데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을 발견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생활을 과연 어느 누구가 누리지도 못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데에 이 제도의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은 정부 관료가 시행하는 사업의 대상국민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를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인간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에 따라 경제정책이건 복지정책이건 사업이 집행되는 과정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정부 관료를 포함한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은 까닭에 정부가 시행하는 사업을 국민이 속여 가며 혜택만을 즐기는지를 정부 관료가 알 수는 없다. 게다가 인간은 이기적일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정부는 물론 거래상대방을 속이려고 든다.


맬더스(Thomas Malthus)는 사람들이 가끔 빠지는 곤궁을 구제하기 위하여 잉글랜드의 구빈법이 제정되었지만, 그것이 개인의 불행을 조금 정도 완화시켰을지 모르지만, 더 넓은 지역에 전반적으로 해악을 전파시켰다는 사실을 우려하여 「인구론」을 발표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독립정신이 아직도 농민층에게 남아 있는 데에도 구빈법이 오히려 절제와 근로 및 독립정신을 근절(구축)시킨다고 통탄했다. 영국에서 매년 빈민을 위하여 3백만 파운드에 가까운 돈이 사용되고 있으나 그럼에도 그들의 곤궁이 제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항상 놀랍다고 지적하였다. 정부의 돈을 개인용도로 사용하고, 사업관리자인 교구관리인 및 감독자가 만찬에 그 돈을 소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은근히 꼬집었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없었다고 한다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사람을 이 제도로 인해 오히려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지 못하도록 타락시키는 수단이 되어버린다면 사회적 흉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도 우려한 대로 시행하는 과정에 여러 가지 부당한 급여가 지급되고 있는 사례가 지적되고 있다. 가령 장사를 하며 많은 소득을 올려도 차명으로 사업자 등록을 하여 보장급여의 혜택을 받는다거나,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직종에 근무하며 혜택을 받거나, 차명계좌를 이용하여 주식에 투자하면서도 혜택을 받는다거나,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혼상태로 주민등록을 방치하며 혜택을 받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역선택(보장을 받아서는 안 되는 국민이 보장급여의 혜택을 받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열심히 일하며 납세의 의무까지 다하며 힘들게 사는 저소득 근로자들이 보장급여혜택을 받는 사람보다 생활이 못하다면 열악한 작업 현장에서 땀 흘려 열심히 일을 하며 보람을 찾을 수 있겠는가? 속이고 놀고먹는 게 생활하기에 여유가 있다면 이 나라는 어디로 가겠는가하고 한숨짓는 저소득근로자들이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국민의 정부에서 시행한 사업이어서 참여정부의 몫은 아니지만 혜택받아서는 안 되는 계층이 혜택받도록 하는 폐단을 시정하는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웠을 따름이다.


사회봉사심을 잘라버린 사회적 일자리 창출


2006년 하반기 정부는 간병인, 방과 후 지도교사, 보육인 등 이른바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내년부터 매년 20만 개씩 2010년까지 모두 80만 개를 창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기획예산처)의 추산에 따르면 아동의 학교방과 후 지원활동에 20만, 보육지원에 14만, 간병지원에 13만, 문화ㆍ예술ㆍ환경지원에 6만 명 등 사회서비스 분야에 모두 53만 명의 부족한 인력을 재정지원을 통해 공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정부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회적 일자리의 수혜대상자들의 대부분은 건강상태가 열악한 고령자와 장애인, 전문기술이 없거나 취업문이 좁은 여성 및 고학력의 미취업자들이다.


그런데 정부가 염두에 두는 사회적 일자리의 대부분은 동시에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린 비영리민간단체를 통해 제공되어오던 서비스들이다. 현재 지역에 기반을 둔 비영리민간단체들은 전문 자격증을 갖춘 교사나 간호사나 치료사나 직업재활사를 고용해 지역사회의 수혜자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해 오고 있다. 이들 전문직종이 수령하는 봉급수준은 기업체 근로자나 공무원의 봉급수준보다 낮아, 사회에 기여한다는 사명감 덕택으로 그나마 값싼 서비스로 제공해 왔다. 전문자격을 갖추지 않은 실직자들에게 이처럼 전문성이 요구되고 자원봉사를 통해 이루어졌던 사회적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사업이 과연 효과가 있을는지 의문이다.


우리 속담에 ‘빗자루 드는데 마당 쓸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외부로부터의 간섭이 개입되는 바람에 원래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고 싶었던 행동이 내키지 않게 되는 것을 빗대어 말한 속담이다. 일자리창출로 지원되는 돈이라고 하는 외적동기가 자원봉사라고 하는 내적동기를 쫓아내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심리학에서는 이를 두고 너무 불필요할 정도로 정당성(돈)이 개입되었다는 의미에서 ‘과잉정당화효과(over-justification effect)’라고 부른다. 사회적 일자리에 대가를 받지 않고 봉사하면서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들려고 애써왔던 자원봉사자들의 봉사심이 사회적 일자리 창출로 말미암아 구축되어버릴까 걱정이다. 분명 봉사심은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귀중한 사회적 덕목이다. 정부의 사회적 일자리창출사업으로 이 귀중한 덕목이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정부가 2007년 2월 사회문화정책관계장관회의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주관부처인 보건복지부장관은 자활사업의 제도적인 문제와 비효율적 관리로 성과가 부진했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려고 시장진입을 지향하는 취업·창업 관련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의도대로 자활이 이루어질지는 의문이다. 기존 민간부분의 시장질서를 상당히 교란시킬 것으로 예상되는 사회적 일자리가 당초 근로비용과 복지비용을 절약하는 근로연계형복지가 될 수 있다는 기대와는 달리, 민간부문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복지수혜근로자들로부터 일자리에 대해 열과 성의를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 프로그램은 어디까지나 취로사업에 지나지 않는 복지사업으로, 근로와 연계되어서는 안 될 임시서비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비스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서비스 제공자의 눈치를 보면서 감독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당해사업에 대한 재정이 정부로부터 지원되기 때문에 일자리에 대한 근무감독이 제대로 이루어질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디까지나 경제적으로 의미 있는 일자리는 정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간기업의 사업하려는 의지와 근로자의 일하려는 의지에 의해서만 생길 수 있다.

사회적 일자리 창출을 꺼려하여야 하는 까닭은 실업자나 빈곤층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여서가 아니라 그들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회적 일자리 창출이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자유기업 시장경제체제의 토대를 훼손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특정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부의 자의적인 재정확장을 받아들이는 순간,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사람들의 희생 하에, 자신의 경제적 실패를 이득 볼 수 있는 방향으로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라고 지적한 미 조지아대학의 경제학자 리(Dwight Lee) 교수의 말이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


정치의 대상물이 되어버린 국민연금


국민연금제도는 국민의 노령ㆍ폐질 또는 사망에 대비하여 연금 급여를 실시함으로써 국민의 생활 안정과 복지 증진에 기여할 목적으로 그 부담을 국가적인 보험을 통하여 분산시키는 사회보험 제도이다. 이러한 취지에 맞추어 국민연금은 기존의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그리고 사립학교 교원연금에 이어 1988년 1월 1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처음 도입되었고 이후 1999년 4월 18-60세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참여정부에 들어서기 이전부터 현재와 같은 저부담-고급여 체계의 국민연금 기금이 2036년부터는 적자로 전환돼 2047년에는 재정이 고갈될 것이 확실하여 국민연금을 개선한다는 것이 참여정부의 복지정책의 하나였다. 그에 따라 연금보험료를 현행 월소득의 9%에서 2009년부터 2018년까지 매년 0.39%씩 높여 12.9%까지 단계적으로 인상하고, 연금지급액을 현행 가입자의 가입기간 중 평균소득액의 60%에서 40%로 조정(다만 개정법률 시행 이전의 가입기간 및 수급자에 대해서는 종전대로 60%를 지급하여 기득권을 보장)한다는 정부안이 국회에서 좌절되고, 그 여파로 복지부장관이 사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과연 국가가 전국민을 보험고객으로 삼는 국민연금이 필요한 제도일까? 개인에겐 가혹하지만 다른 사람에 의지하는 빈곤은 불명예라고 생각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극은 국민 대다수의 행복을 촉진하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데, 이 자극을 약하게 만드는 정부의 시도는 그 의도가 제아무리 자선적인 것일지라도 스스로의 목적을 방해할 것이라고 지적한 맬더스의 충고를 한번 귀담아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기심에서부터 천천히 조금씩 생겨난 인간의 마음의 가장 고귀한 신(神)을 닮은 자질의 하나인 자애의 원리를 황폐하게 만들어서야 건강한 미래사회가 보장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자애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노후대책을 마련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적금형태의 저축, 주식이나 부동산투자, 개인연금이나 보험 등의 수단을 통해 스스로 노후대비를 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식에게 무언가를 물려주려고까지 열심이다.


물론 스스로 노후대비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노후대비를 열심히 하였지만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내몰린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사회안전망은 필요하다. 게다가 스스로 대비할 경제적 능력조차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극빈층이나 영세민 등의 노후생계를 위한 사회안전망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국가가 연금 아닌 예산(기초생활보장제도)으로 뒤받쳐주는 사업이 국가가 시행하여야 할 진정한 의미의 복지정책이다. 국가가 연금사업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현재의 상태에선 연금기금고갈은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미 정치의 대상물이 되어 시장이 아닌 국회에서 공급가격이 결정되는 상품의 품질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정권은 정권대로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선거에서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저부담-고급여의 고갈되는 연금제도에서 벗어나기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미국 정부가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상당한 금액을 지출하였지만 이 프로그램이 빈곤층의 비율을 줄이는 데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대신 독립심을 빼앗아가고 의타심만을 권장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독립심의 상실과 의타심의 조장이 오히려 소득이전 프로그램을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고 한다. 일단 이전지출의 길을 밟으면, 비록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결정되더라도, 되돌아오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적 과정 때문에 소득이전프로그램이 축소되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방향으로 확대되는 경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실패가 더 커질수록 그 프로그램이 성공할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지적한다.

우리의 사정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복지예산이 OECD국가들에 미치진 못하지만 정부예산이 늘어나는 것에 비해 훨씬 커다란 비율로 늘어난 것을 정권마다 무슨 치적으로 내세운다. 복지예산이 늘어난다는 것은 당초 빈민을 구제하여 복지예산이 줄어들어야 당초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인데 실제 복지비지출에도 불구하고 빈민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여서 결국 사업자체가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셈이다. 빈민이 줄어들어 복지예산이 오히려 줄어들어야만 기뻐할 수 있을 터인데 현실은 그 반대다.

축소되어야 할 타율적 복지프로그램


참여정부에서 여러 가지 복지정책이 시행되었다. 특히 저출산과 사회고령화가 복지정책의 핫 이슈가 되었다. 그런데 정부는 저출산과 고령화 현상을 부정적인 사회문제로 바라보는 고정관념에 빠져 과거로 회귀하려는 시책을 마련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없이 한 마디로 말해 저출산과 고령화는 저주가 아닌 축복이라는 사회진화과정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세계화의 과정에서 우리국민 남의 나라 국민으로 나누는 시각에 얽매여 국민수의 적정 규모를 논하는 계량주의에서 벗어나야만 하지 않을까?

문민정부 이후 국가의 예산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심히 우려된다. 그래서 구관이 명관이라는 이야기까지 들릴 정도의 부끄러운 민주화가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늘어나는 예산을 막고자 국민소득 가운데에 정부가 지출할 수 있는 비율을 헌법으로 규정하는 것이 이로운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랜드(Ayn Rand) 여사의 말이 생각난다. 헌법이란 정부가 지켜야 할 것들을 규정하는 약속이다. 물론 제한을 가하면 빈곤층을 다치게 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 정부지출에 제한을 가하려는 까닭은 빈곤층에 대한 열정이 결코 부족하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참여정부는 정책결정과정에 국민을 참여시키려는 참여 로고에 사로잡혀 각종 위원회 중심의 국정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위원회와 정부 부처간의 명확한 역할분담이 이루어지지 않아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교육받고 기술적으로 능력있는 사람들이 참여를 외치는 일이 흔한데 이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여를 자신의 특별한 개인적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특수이해집단의 이익이 향상되도록, 불가피하게 소수로 하여금 자신들의 견해와 함께하도록 강요한다. 이것이 사회주의자들이 공통선이나 일반대중의 복지 등과 같은 프로그램을 항상 제안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다수의 복지가 확대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양극화현상이 말해주듯이 줄어들었다. 밀턴 프리드먼 부부는 『선택의 자유(1980)』에서 ‘입만 열면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거의 틀림없이 남들의 이익을 빙자하여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러한 사람들이 정부를 좌우하게 되면 평상인의 경제적 복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개혁을 앞세운 정권일수록 일자리가 줄어든 한국의 현실을 지적한 지혜가 아닐까?

곤충이 번데기에서 힘들게 허물을 벗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어느 생물학자가 허물을 벗겨주었다. 그런데 허물을 벗도록 도와준 곤충은 날지도 못하고 죽어버리고 대신 허물을 벗는 데 손을 내밀지도 않은 곤충은 날개 짓을 하면서 잘 산다고 한다. 이를 이상히 여긴 생물학자가 연구한 결과, 곤충이 허물을 벗는 과정에서 어깨에 모여 있는 에너지가 날개 뼈대로 전달되어 날개 끝까지 에너지가 전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물을 벗도록 도와준 곤충은 어깨에 축적된 에너지가 날개 끝까지 전달되지 못해 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이 생물학자는 곤충의 허물을 벗기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우리 인간의 모습도 그렇지 않을까? 자율이 아닌 타율에 의해 복지프로그램이 시행되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유동운 / 부경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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