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정부평가] 갈등을 고조시킨 기형적 참여 민주주의

박효종 / 2007-05-09 / 조회: 7,431
참여를 강조한 참여정부

노무현 정부는 출범하면서 스스로를 “참여정부”로 불렀고 국민들도 그렇게 불러주기를 원했다. 이것은 단순히 내실없이 미사여구로 일관하는 유명론(唯名論)의 입장을 떠나 나름대로의 국정비전과 철학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이를테면, ‘참여’는 노정부의 정체성과 같은 것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명무실한 대의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의 영역을 축소하고 가능한 한 직접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를 극대화하겠다는 뜻이 담겨있었는데, 여기에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출범초기에는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슬로건도 내걸었고 또 “토론공화국을 만들겠다”는 다짐도 있었다. 공청회, 토론회, 심포지엄, 간담회 등 각종 형태의 토론이 이라크 파병문제부터 시작하여 최근 전시작전권 환수문제에 이르기까지 국정현안마다 과도할 만큼 열렸다. “협치(協治)”라는 신조어도 강조되었다. ‘협치’는 영어의 '거버넌스(governance)', 혹은 엄밀한 의미에서 ‘쉐어드 거버넌스(shared governance)’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공치(共治), 협력적 통치, 네트워크적 관리 등의 함의를 가지고 있다. 협치에 따른 국정운용 방식은 복잡성과 다원성이 증대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분출되는 국가적?사회적 쟁점들을 그와 관련된 이해 당사자들이 협력적 네트워크를 통해 자율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다. 정부가 주도하여 사회를 관리하고 통치하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정부를 넘어서는 민·관의 소통에 의한 참여민주주의를 활성화하겠다는 것이 노정부초기의 의도였다.


참여와 관련한 일련의 정치적 개혁도 있었는데, 지구당 폐지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의사소통과 토론도 어느 때보다 활성화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직접 인터넷국정을 시도하고 나섰다. 항상 집무실에서 컴퓨터를 앞에 둔 대통령의 모습을 영상을 통해 볼 때마다 인터넷민주주의의 전령사를 상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노무현정부가 시도한 각종 형태의 참여민주주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 양적인 참여는 비약적으로 증대되었으나, 참여의 질은 오히려 하락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느 정부의 경우보다 시민들과 이익단체의 참여열기는 높았고 의사표출의 강도도 두드러졌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볼 때 ‘참여의 질’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노무현 정부자신이 참여자체를 ‘정치적 선(political good)’으로 생각한 나머지 절제된 참여와 자유방임적 참여를 구별하지 못했고 무절제한 참여와 법치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아무리 참여라고 해도 법질서 안에서 만개되는 참여가 중요한 것이지, 법질서를 무너트릴 만큼 절제를 잃은 폭력적인 참여나 포퓰리즘적 참여를 본의적 의미의 참여로 평가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참여를 강조했던 정부 역시 보편적 참여를 고무하기보다 자신의 이념과 가치관에 부합하는, 선별적 참여를 주문하거나 선호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결국 참여의 확대를 위한 개혁시도가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지만, 성과가 불확실하거나 부정적이라는 점이 문제다.


참여의 각종 사례와 평가


(1) 시민적 참여


노무현 정부하에서 이루어진 참여민주주의의 성공적 사례라면 방사능물질 폐기장 선정문제였다. 방폐장 선정문제는 오랫동안 표류했던 국정숙원이었으며 동시에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운 ‘뜨거운 감자’였다. 그동안 정부에 의해 선정된 방폐장후보지의 주민들마다 혐오시설로 치부하여 격렬한 반대와 항의를 벌인 결과 해법을 찾기 힘들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몇 번 시행착오를 거듭한 정부가 방침을 바꾸어 각종 특혜를 약속하면서 주민들에 의한 참여를 전제로 공모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부안에서는 유혈사태의 화를 불렀던 방폐장이, 군산과 영덕, 포항, 경주 등지의 치열한 유치경쟁을 불러일으켰고, 경주지역이 최종 입지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방폐장이 뒷말이나 후유증이 거의 없을 정도로 경주에 입지하게 된 배경은 주민들의 참여와 토론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덕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경주사례는 보편적 사례보다 예외적 사례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참여가 바람직한 형태보다 과잉참여나 무절제한 참여로 나타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참여민주주의가 어느 때보다 활성화된 4년 동안 생업에 종사하는 국민들이 현저하게 피부로 체감한 것이 사회적 혼돈과 무질서라는 사실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회적 무질서와 무규범 상태가 극심해진 나머지 참여에 대한 가치를 음미하기보다는 오히려 “도대체 국가가 왜 존재하느냐”하는 식의, 국가와 공권력의 존재이유를 묻는 경향이 팽배해졌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은 시위로 한해 최대 12조가 낭비되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불법파업과 시위로 경제성장률 1%가 줄어들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물론 불법시위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무엇보다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구성원들에게 공동체 전체의 조화와 일치, 통합의 삶을 살기를 기대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이익에 봉사함으로써 참여의 실익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경우 그 허용범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물론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경우에는 이익집단의 행위라도 적절한 참여의 범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표방하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집단행위는 참여의 이름으로 용납될 수 없다. 그러한 행위가 허용된다면, 참여민주주의가 활성화되기보다는 법치국가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또 ‘미끄럼틀이론(slippery slope)’이 말하는 것처럼, 법과 질서를 경시한 채 이루어지는 참여는 일파만파로 다른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결국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of democracy)’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이성에 의한 의사소통과 설득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노무현 정부 기간동안 '정상적 참여'보다 '방어적 참여'가 주류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참여의 질’을 떨어뜨리는 ‘방어적 참여(defensive participation)’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자신의 이익을 훼손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회의나 심의에 참여하는 경우가 그 전형적 사례라고 하겠다. 이것은 ‘내’가 없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한 비난을 할 것을 두려워하여 참석하는 경우와 같다. 예를 들면 ‘나’의 이익이나 가치관과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이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 ‘내’가 참석하지 않으면 ‘나’에게 중대한 손실이 초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의와 토론에 참석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집단행동의 경우에도 일어난다. A집단이 시위를 하면 B집단도 방어적 차원에서 이에 대응하는 시위를 하게 된다. 이러한 방어적 참여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신뢰나 공정성, 연대 등 이른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고양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보다는 반대로 불신과 소외, 적대감을 유발시키는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 방어적 참여의 경우는 보혁갈등 등 이념적 집단의 대결양상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3?1절이나 8?15 등 각종 국가기념일에서 진보와 보수단체들은 각기 따로 기념식을 가졌다. 또 한쪽에서 한미 FTA반대시위를 하면 다른 쪽에서는 찬성시위를 하고, 한편에서 전작권환수를 주장하면 다른 편에서 전작권환수를 반대하고, 원칙없는 대북 포용정책을 반대하면 다른 편에서는 그것을 찬성하는 경우가 전형적이었다. 진보주의자들이 맥아더동상 철거시위를 하면 보수단체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집단행동을 한 것도 마찬가지다.


한 정치공동체에서 신뢰와 공정성, 불편부당성 혹은 공동의 목적에 대한 공감대를 포함하여 ‘사회적 자본’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방어적 참여’는 모든 참여자들에게 ‘순 손실(net loss)’을 강요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라면 누구라도 참여하기보다는 아무도 참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문제의 정치참여는 ‘통합적 경험’이기보다 ‘파편화된 경험’으로 다가오기 때문인데, 노정부하의 많은 참여가 활발하기는 했지만, 내용이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바로 이러한 방어적 의미의 참여가 다수였기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정부는 불법적인 집회와 폭력적인 의사표시에 대하여 유난히 관대했다. 평택미군기지이전과 관련하여 이를 반대하는 집단과 개인들이 폭력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아 경찰과 충돌했을 때, 국무총리는 “경찰과 시위대는 모두 한걸음씩 물러서야한다”는 매우 중립적인(?) 지시를 내려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또한 전교조의 불법적인 연가투쟁에 대하여도 별로 문제를 삼지 않았다. 한미FTA반대를 외치며 쇠파이프를 들고 시위하는 불법적인 집단행위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주말만 되면 서울의 도심은 각종 집회로 몸살을 앓았다. 이 상황에서 골탕을 먹는 것은 생업에 종사하는 힘없는 일반 서민들이었는데, 이들이 참여민주주의의 활성화에 감명을 받았는지, 아니면 질색을 했는지는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사안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왜 불법적인 폭력시위에 대하여 관대했을까. 노정부의 중추세력인 386운동권 그룹은 처음부터 공권력의 기능과 역할에 무척 회의적이었다. 국가의 공권력과 정면으로 투쟁하고 대결했던 ‘저항적 참여’의 과거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그동안 저항의 대상으로 보았던 국가와 공권력을 운영하는 주체가 됨으로써 ‘이중적 국가관’, ‘이중적 공권력비전’으로부터 기인하는 정체성혼란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권력의 요직에 진출함으로써 저항세력에서 국정책임세력으로 탈바꿈한 뒤에도 자신들이 ‘불의한 실정법’에 의하여 감옥에 가고 형을 살았다는 사실에 주술이 걸린 듯, ‘탈법(脫法)’과 ‘합법(合法)’ 혹은 ‘불법(不法)’과 ‘준법(遵法)’을 구분하지 못했고 또 구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항적 참여’의 논리와 매력에 심취한 나머지 근본주의적 성향의 공권력 불신과 의구심을 숨기지 않았다. 각종 이익집단, 이념집단들에 의한 폭력?불법시위가 만연해도 이를 공권력으로 통제하려하기보다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정당한 투쟁정도로 치부함으로써 ‘질서있는 자유주의 사회’보다는 ‘무질서에 가까운 무법상태’와 같은 상황을 조성하기 일쑤였다. 그 결과 경찰의 공권력에 대하여 무서워하는 집단이나 사람들이 거의 없게 되었다. 파출소는 때때로 불만을 가진 일반 민간인들의 공격장소가 되었고 또 취객들의 희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폭력적인 시위대에 각목이나 화염병을 맞아 병원에 입원중인 전경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이처럼 쇠파이프로 공권력이 무력화 되었을 때, 그 결과는 무엇인가. 과잉진압혐의에 시달린 나머지 경찰이 주눅이 들고 몸을 사림으로써 공권력이 빈사상태에 놓였을 때, 그것을 ‘참여민주주의의 결실’로 볼 것인가, 아니면 ‘법치주의의 결핍’으로 볼 것인가. 법치가 실종되고 준법정신이 결핍되었을 때, 참여민주주의는 그 존재가치를 잃는다. 참여민주주의의 실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참여정부는 필요한 시점과 필요한 장소에서 공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꺼려 직무유기를 하고도 참여를 극대화하고 권위주의를 버렸다고 자랑해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를 탈피한다고 하면서도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올바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요구되는 정당한 ‘권위(authority)’까지 유기해버린 정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참여의 가치란 결코 사소한 가치는 아니다. 하지만 그 참여가 정치적?시민적 참여에 대한 기본 소양 없이 이루어지거나 ‘질적 참여’보다 ‘양적 참여’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면, 혹은 ‘이성적 참여’나 ‘분별력있는 참여’보다 ‘감성적 참여’가, ‘정상적 참여’보다 ‘방어적 참여’가 성행했다면, 의미있는 참여는 아니었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겠는데,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노무현 정부하의 참여의 특징이기도 했다.


(2) 지구당 폐지


노정부하에서 참여를 위한 정치개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지구당폐지다. 이것은 고비용 정치구조를 혁파하고 깨끗한 정치를 표방하는 개혁이기도 하지만, 조직위주로 이루어져 있는 지역구에서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활성화하는 쪽에 무게가 실어졌기 때문이다. 노정부의 개혁열기를 반영하여 2003년 11월 5일, 한나라당과 민주당, 열린우리당, 자민련 등 4당은 이듬해 총선에 앞서 각 정당의 모든 지구당을 폐지키로 전격 합의하였다. 그 후 2004년 3월 지구당 폐지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정당법개정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2004년 4월 15일에 이루어진 17대 총선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지구당 폐지였다. 많은 선거구의 사례를 보면, 지구당폐지 이후 공조직이 움직이지 않고, 합동유세와 정당유세도 없어지게 됨에 따라 선거에서의 조직동원은 훨씬 줄어들었다. 여기에 선거비용의 투명성이 비교적 강화돼 지구당 폐해는 상당부분 사라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과 반론도 만만치 않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공조직이 가동되지 않을 경우 새로운 득표 머신을 찾게 될 것이고, 이런 경향은 중소도시와 농어촌의 경우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우려가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7대 총선에 출마했다 낙선한 각 당 후보들 사이에서 지구당사무소 폐지에 대한 불만여론이 비등했다. 각 당 낙선후보들은 지구당사무소 폐지는 의정보고회를 비롯 지역내 각종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현역의원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반면 다음 총선을 준비하는 낙선자 및 지역내 참신한 인재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제도라고 불만을 터트렸다. 이들은 선거자금을 획기적으로 줄여 깨끗한 선거를 치르기 위한 목적에서 개정된 법 취지에는 동의하면서도 지역내 각종 활동이 가능한 현역의원들을 위한 일종의 보호법이라고 주장했다. 지구당폐지 불만의 가장 주된 이유는 지역내 진성당원 및 조직관리에 어려움이 야기돼 다음 선거를 위한 조직 재정비 과정에서 오히려 금품제공 등 음성적인 방법들이 동원되는 등 과열혼탁 선거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만을 반영하여 2004년 6월 3일 민주노동당은 정당법 개정으로 인한 지구당 폐지와 관련 국민의 정치적 자유와 결사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민노당 노회찬 사무총장은 3일 개정 정당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법정지구당 폐지와 관련된 제3조 및 부칙 제5조, 제7조는 헌법 제8조 정당설립의 자유 및 정치활동에 필요한 조직 결성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내용의 헌법소원 심판청구서와 법령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2004년 12월 16일 전원일치로 기각을 결정했다. 헌재가 심의한 사항은 정당의 조직 중 기존의 지구당과 당연락소를 강제적으로 폐지하고 이후의 설치를 금지하는 정당법조항이 정당조직의 자유와 정당활동의 자유를 포함한 정당의 자유를 침해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헌재는 헌법 제8조 제1항은 정당설립의 자유, 정당조직의 자유, 정당활동의 자유 등을 포괄하는 정당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고 하면서, 지구당이나 당연락소가 없더라도 정당의 기능과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고, 특히 교통, 통신, 대중매체가 발달한 오늘날 지구당의 통로로서의 의미가 상당부분 완화되었기 때문에, 위 조항이 정당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한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고비용 저효율의 정당구조를 개선한다는 입법목적이 정당하며, 지구당 폐지는 이를 달성하는데 효과적이고 적절한 수단이라고 판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구당을 강화할 것인가 여부에 관한 선택은 헌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국회가 합목적적으로 판단할 당·부당의 문제에 그치고 합헌·위헌의 문제로까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지구당을 폐지한 것에 수단의 적정성이 있는가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완화된 심사기준에 의하여 판단해야 하는데,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수단의 적정성이 인정되고, 지구당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는 한국정당정치의 현실에 대한 국회의 진단이 타당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민노당은 이러한 헌재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2007년에 들어와서도 새롭게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구당폐지와 관련하여 사그러들지 않는 이러한 논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정당의 민주화나 참여민주주의의 공고화에 커다란 걸림돌은 중앙당인가, 아니면 지구당인가. 엄밀하게 말해서 한국정당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지구당은 쇠잔하고 중앙당만 큰 기형적 정당이다. 이 거대한 중앙당의 존재이유에 대한 의문은 많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을 보면 중앙당의 총재도, 사무총장도 없으며, 물론 당 3역도 없다. 다만 상원과 하원의 원내총무가 지도자 구실을 할 뿐이다. 주로 대통령 선거때만 후보를 중심으로 한 전국위원회가 가동될 뿐이다. 따라서 주지사, 상원의원, 하원의원 및 시와 구의 자치단체장을 뽑는 선거에서는 지구당이 매우 강력한 구심점 노릇을 한다. 물론 미국과 달리 중앙당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들도 있다. 영국이나 유럽이 그러하다. 영국의 중앙당은 지구당에서 선출한 후보가 부적격이라고 판단될 경우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후보선출은 지구당에서 이루어진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중앙당위주의 당운영과 지구당위주의 당운영이 각기 정당성의 논리를 갖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경험과 현실적 결과가 중요하다. 우리의 경우, 중앙당이 있기 때문에 총재를 정점으로 한 위계질서가 구축되고 중앙집권적 권력을 행사한다. 중앙당은 봉급을 받는 유급당원들로 구성되어있어 관료조직과 같다. 이러한 비대한 중앙당은 결국 그 자체가 하나의 조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조직으로서의 편견과 폐쇄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또한 위계적 구조, 즉 상명하복의 구조를 유지한다.


원래 한국사회에서 비대한 중앙당 조직은 처음부터 정당 모델은 아니었다. 5?16 군사정변이후 민주공화당이 창당되면서 구축된 이원조직이 그 효시였고, 구태여 그 기원을 따진다면 유럽 형태의 정당이다. 유럽의 경우, 중앙당은 물론 민주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고 정책 개발 등의 순기능을 하는 측면이 있으나, 한국의 경우 당 민주화에 있어 큰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그러므로 지구당 폐지보다는 중앙당 폐지나 축소가 타당하며, 오히려 국회의원 중심으로 당이 운영되는 체제가 참여민주주의 활성화의 관점에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3) 국민경선제도


한국의 정당정치와 관련, 참여민주주의를 훼손해왔던 현저한 사례는 그동안 하나의 관행이 된 당론결정과 후보자 공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총재는 제왕적 위치에서 당내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당원들위에 군림해왔다. 정치적 쟁점이 된 사안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당총재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쟁점사안이나 정책문제에 대해 당원들이 시시비비를 가리고 상호간에 갑론을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당화합을 저해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즉 ‘해당(害黨)행위’가 되는 것이다. 일단 ‘해당분자’로 낙인찍히면 공천과정에서 여지없이 탈락되기 때문에 일반 당원은 물론, 국회의원들조차 당총재의 의견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자유로운 담론형성과 자유토론이라는 민주적 정치관행이 자리잡기 어려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시도에서 상향식 공천제와 후보자 경선제가 도입된 것은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2년 여당과 야당의 대선후보 선출과정에서 ‘국민과 함께 하는’ 국민경선제가 도입됨으로써 본의적 의미의 상향식 공천제가 시도된 것이다. 또 변형된 형태의 시민경선제가 도입되어 6?13지방선거 때 서울시장 후보 등, 지방자치단체장 선거후보를 선정하는데 유용하게 작용하였다. 하지만 이 후보자 경선제가 아직 한국 정당내에서 안정된 제도로 정착된 것은 아니다. 그 이후의 재보선이나 2006년 5?31지방선거에서는 여야가 필승을 목표로 내세우며 후보자 경선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특히 인기도가 높은 상대방후보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득표력이 높은 또 다른 대항마를 만들어야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참여’보다 ‘승리’를 목표로 한 것이 원인이다.


후보자 경선제의 필요성은 참여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즉 후보자 공천이 밀실공천일 경우 일반유권자들의 정치적 선호와 괴리를 지닐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정당에서 하향식 공천을 통하여 대통령후보나 국회의원 후보, 단체장 후보로 공천한 A, B, C라는 인물이 국민들이 평균적으로 선호하고 있는 인물 A', B', C'와 다를 가능성은 실제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치적 정보획득에 소극적인 다수의 유권자들이 정당의 선택으로 나타난 A, B, C이외에 다른 사람인 A', B', C'를 선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유권자들이 투표과정에서 아무리 ‘합리적 선택’을 하고 싶어도 후보자 세트가 적절하지 못하다면, 제1선호가 아닌, 제2선호, 제3선호의 후보자에게 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특정인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혹은 단체장으로 선출되기는 하겠지만, 법적으로 선출된 특정인 A는 유권자의 마음속에 있는, 인기 있는 정신적인 대표자와 다르게 된다. 특히 이 문제는 최소한의 논리적 조건이라고 센(A. K. Sen)이 규정한 ‘α 특성(α property)’을 어기게 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예를 들면 한국 권투선수 A가 세계권투 챔피언이라면 한국에서는 당연히 국내 챔피언이 되어야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전국적으로 혹은 특정 지역에서 지지도가 높은 사람이 특정 정당에서도 공직 후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밀실공천이나 하향식 공천을 통하여 선발된 경우는 이와 같은 ‘α 특성’을 충족시킨다는 보장이 없었다.


물론 후보자 공천의 민주화가 반드시 일반 유권자를 참여시키는 국민경선일 필요는 없다. 때에 따라 당내 대의원 대회에서 경선하는 것도 참여민주주의가 활성화된 정당정치의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중앙당이 사전에 아무리 정밀한 여론조사를 해서 그 결과를 토대로 하여 일방적으로 득표력이 높은 후보자를 선정했다고 해도 하향식 공천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가상적 상황에서 사람들이 특정한 대안을 선택할 것으로 추정하고 그 특정한 대안을 강압적으로 밀어부치는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중요한 것은 후보자 공천이 그 실체가 모호한 득표력 여부와 관계없이 구성원들의 다수의 뜻을 명실상부하게 수렴한 상향식 공천이 될 때 정당은 민주화되고 참여민주주의가 활성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노정부 4년 기간 동안 노골적인 하향식공천은 사라지고 있지만, 형체가 없는 여론조사결과에 입각한 일방적 공천이 여야공동으로 성행하고 있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참여공천이 이루어지고 있는가하는 점에는 불확실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인터넷민주주의와 토론민주주의의 활성화


민주화는 되었지만, 한국의 민주주의가 질적인 차원이나 또 양적인 차원에서 시민들의 이성적인 정치참여를 활성화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참여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참여의 범주를 참여민주주의자들이나 대의민주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층적으로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비판과 시위, 항의 등, 저항적 참여를 포함한 ‘비관습적 참여’의 개념을 넘어선 ‘일상적 참여’의 개념이 그것이다. ‘비관습적 참여’의 범주에는 투표뿐 만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자기봉사, 시민단체활동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참여민주주의가 본의적 의미에서 활성화되려면 시민들이 사적으로 하는 ‘이야기’나 ‘발언’도 ‘일상적 참여’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택시운전자들이 택시안에서 승객들과 주고받는 정치에 관한 이야기나 정책비판들도 참여의 범주로 볼 수 있어야한다. 문제는 이들의 ‘이야기’나 ‘발언’이 정치과정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갖는가하는 점이다. 혹은 시민들이 식당이나 커피숍 혹은 시장에서 특정정책에 대하여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국정책임자들이 이를 존중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터넷이 특히 이상적인 참여민주주의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 노정부 출범이후 주목을 받아왔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클릭’하며 접속을 하고 ‘모니터’를 주시하는 행위를 통하여 인터넷 정치는 실현된다. 특히 노무현정부는 인터넷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노대통령자신이 국민이나 열린우리당 당원들과 수차례 인터넷을 통한 소통을 하였다. 국정홍보처도 인터넷을 활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메일로 국정상황을 전달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정부의 인터넷정치는 적지않은 비판을 받아왔다. 인터넷의사소통에 너무 심취하여 현장정치를 소홀히 한다는 점도 지적되었고, 그런가하면 끊임없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등, 주류언론에 대한 비판일색의 일방적인 의사소통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직접성, 속도, 단순성, 수평성을 지니고 있는 인터넷은 양질의 참여민주주의에도 열려있고 한편으로 열악한 참여정치의 형태인 포퓰리즘에도 열려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각종 국정이슈가 쟁점이 될 때 마다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은 활발했으나, 인신공격성의 악성 댓글 또한 넘쳐났다. 이것은 저급한 토론정치의 ‘일그러진 모습’일지언정, 품격있는 토론민주주의의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한편 대면적 친밀감을 결여한 인터넷 매개소통이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현재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멀리 있는 사람과의 대화가 어렵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자동차의 경우처럼 격렬한 형태로 연례행사처럼 일어나는 노사분규를 보면 면대면의 친밀한 직장공동체에서 진정한 의사소통의 기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원인이 아닌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얼굴을 서로 맞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는 얼마나 많은가. 여야의 정치적 갈등이나 이념?세대갈등 등을 보면 대면적 상황에서도 진지한 커뮤니케이션을 성공시키기 어렵다는 것이야말로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오프라인에서 대화와 토론이 잘 안 되는데 속도감과 단순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온라인에서는 대화와 토론이 활성화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자신 있게 대답을 하기 어렵다면, 인터넷을 통한 참여민주주의의 활성화는 매우 불확실한 셈이다.
면대면의 소통에 부실했던 노무현 정부는 이점에서 양적으로 많은 인터넷소통을 하고서도 “입은 예리했으나 눈과 귀는 침침하다”는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소통이 ‘참여의 결핍’ 문제를 해결하고자 활용되었고 노무현정부처럼 정보화시대의 이기(利器)를 활용한 정부도 없지만, 정작 국민과의 의사소통에서는 실패한 정부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양질의 참여가 한국 참여민주주의의 과제


고대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시민들이 공적 사안과 사적 사안에 몰두할 시간과 관심사를 적절히 안배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지 않고 국가의 일에도 관심을 갖는다. 자기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도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무리없이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민주주의의 질(quality of democracy)’은 ‘정치참여의 질(quality of participation)’에 달려있다. 물론 현대의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치전문가나 직업정치인과 같이 정치에 ‘올인’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혹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도덕적으로 ‘칭송받을만한 선호’나 성인과 영웅들의 고매한 선호, 루소가 말하는 ‘일반의지’만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금지된 선호(prohibitive preference)’가 아닌 한, ‘허용가능한 선호(permissible preference)’를 갖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질이 보장되지 않는 양적인 정치참여에서 ‘자기반성적 자율성’이나 협력의 정신 및 공정성의 고양과 같은 공익적 가치의 산출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대의민주주의나 간접민주주의의 한계점과 약점에 유의하여 참여민주주의와 토론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물론 이점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화두였으며, 다른 정부와도 차별화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출범 4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볼 때 참여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양적 참여는 증대했지만, 참여의 질적 고양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성중심’보다 ‘감성중심’의 참여가 주류였고 ‘정상적 참여’보다 ‘방어적 참여’가 현저했다.


특히 참여민주주의에 필요한 정치참여는 감성보다 이성중심적이어야 한다. 한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일반적으로 “열정적이다.”, “활력이 넘친다.”, 혹은 “역동적이다.” 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감성위주의 집단적 열정은 축구 등 운동경기에서 나타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경기가 열렸을 때, 처음에 수백 명에서 시작하여 몇십만, 몇백만으로 늘어난 ‘붉은 악마’들의 길거리 응원은 참여자나 관찰자 모두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었다. 이처럼 스포츠나 예술에서 표출되는 감성은 공동체의 ‘도덕적 자본(moral capital)’이라고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감성주의가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중요한 사안에 대한 시민적 심의나 토론에 투영될 때 발생된다. 예를 들면 자유무역협정과 같은 국제협약체결, 농산물 개방, 국산영화 스크린쿼터문제 혹은 핵폐기물 처리 등의 문제들에서 시민들이 이성보다 감성에 치우친 반응과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정치참여의 강점보다 약점을 노정하는 셈이다. 물론 감성적 대응이란 진심이 담겨져 있는 ‘정직한 선호(honest preference)’, 혹은 ‘비전략적 선호(nonstrategic preference)’의 표출로 간주될 수도 있다. 특정 정치적 사안이 결정되었을 때, 흥분한 나머지 고함을 지르거나 울음을 터트린다면 높은 ‘선호의 강도’를 표출한다는 측면에서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차분한 의사표현은 오히려 덜 설득적이며 낮은 ‘선호의 강도’를 표현한 것처럼 투영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의사표현이 과격하고 폭력적이면 참여의 의미자체가 퇴색되는 셈인데, 유감스럽게도 의사표현과 이익표명에 나선 개인과 집단들의 경우, 이러한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것이 참여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게 된 이유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특징은 노정부 자신이 폭력을 수반한 ‘저항적 참여’를 방임하거나 부추겼고 또 언제나 국정어젠다와 관련한 논란의 중심에 서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접근방식과 관련하여 노대통령의 의사소통방식과 능력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다. 의사소통방식이 ‘불만토로형’이나 ‘문제제기형’이었지 ‘문제해결형’이나 ‘문제아우르기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의 어투는 삼단논법처럼 다른 반대 논리가 끼워들 수 없을 만큼 경직된 것이었다.


이 모든 현상들이 어우러져 노정부가 표방한 참여민주주의는 ‘참여’는 있었지만, 의미있는 의사소통은 부재한 ‘기형적 참여민주주의’가 되었다. 개인과 집단들이 참여와 의사소통을 통하여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동류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이질감, 적대감, 대립감을 절감하는 반통합적 의식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참여를 강조한 노무현 정부 4년이 어느 때보다도 이념갈등, 노사갈등, 세대갈등이 고조된 시대가 된 것은 역설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참여와 의사소통이 ‘질서있는 참여’, ‘숙고가 있는 의사소통’, ‘공적 이성을 지향하는 참여’가 아니라 그 반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앞으로 남은 기간동안 잘못된 참여와 의사소통으로 인한 상처가 치유된 통합된 공동체를 만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박효종 /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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