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지원정책의 올바른 방향

황인학 / 2007-02-01 / 조회: 9,021

1. R&D와 정부 역할

기술혁신은 한 나라의 성장잠재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자연의 부존자원과 노동, 자본 등의 생산요소 투입량에 의해 설정된 성장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기술혁신으로 가능한 일이다. 기술혁신을 위한 투자와 연구개발(R&D) 노력이 성공하면, 좁게는 생산성과 산업경쟁력의 향상으로 이어지고 넓게는 전혀 새로운 시장, 새로운 성장엔진을 창출함으로써 국민경제의 생산가능곡선을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술혁신은 언제나 인류 문명발전의 동인으로 평가되어 왔지만 21세기 세계화와 지식기반경제 시대가 무르익으며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지식과 기술이 가치 창출의 주역으로 자리하고 국경을 초월한 지구촌 단위의 무한경쟁이 진행되는 환경에서 기업이든 국가이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원천기술의 확보와 시장표준의 선점이 중요하다.


R&D는 정부의 역할이 일정 부분 필요한 분야이다. 연구개발의 결과가 단지 국가의 성장잠재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R&D 성과와 그 부산물에 대해 연구 수행자(또는 투자자)가 완전하게 재산권을 소유ㆍ행사할 수 있다면 정부의 개입이 없어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수준에 가까운 R&D 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아 시장에만 맡길 경우 R&D 투자는 사회적 적정 수준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에서 결정된다. 외부성(externality), 높은 위험, 기나긴 투자회임기간 때문에 R&D 활동은 투자자의 관점에서 평가한 사적 기대편익이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평가한 사회적 기대이익보다 낮기 때문에 과소투자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정부는 R&D에서 이 같은 시장실패(market failure) 문제를 보정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R&D 관련 정부의 바람직한 역할은 무엇인가? 외부성, 공익성, 과소투자, 시장실패 등등의 이야기 끝에 정책처방을 물으면, 대부분은 연구과제 선정과 예산지원에 있어서의 효과성을 답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민간의 과소투자 부분을 정부의 재정자원으로 직접 보전해야 함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과학기술 정책 보고서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과학기술 예산은 어느 정도가 적정한가, 재원조달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사업을 어느 부처에서 관장하고 조정ㆍ평가ㆍ관리 체계는 어떻게 하는 게 정부 R&D 사업의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방법인가 등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정부 주도에 의한 과학기술(지원)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안이 주된 내용이며, 그러다 보니 시장실패가 존재하는 경우에도 정부가 시장의 역할을 대체하기보다는 시장이 제 기능하도록 보완하는 노력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은 간과되어 있다. 그 결과 아래 설명에서 보듯이 조세감면 및 금융지원을 제외하고는 민간의 자발적 R&D 투자를 고취시키기 위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접근 노력이 미흡한 게 현실이다.


2. 외국의 사례와 우리나라 현황


세계 각국은 지식기반경제 시대에 대응하여 원천기술 확보와 기술표준 선점을 통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연구개발 지원정책을 지속적으로 확장해가는 추세이다. 예를 들면, 미국은 2006년 1월 『미국경쟁력선도계획(American Competitiveness Initiative)』을 발표, 물성과학ㆍ공학분야 기초연구 지원액을 2배로 늘리고 민간 R&D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지원의 영구화, 청소년의 수학ㆍ과학 교육의 강화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EU는 2010년 R&D 투자를 GDP 대비 3%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며, ‘성장을 위한 지식시대 구축’을 위해 금년부터 2013년까지 7년간 총 505억 유로를 지원할 계획이다. 일본에서는 ‘지적재산입국’을 국가 정책기조로 채택하는 한편, 『제3기 과학기술기본계획(‘06-’10)』에서 BT, NTㆍ재료, 환경, IT 등 8대 기술분야를 선정, 인재육성과 전략기술개발 등에 5년간 총 25조엔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2020년까지 GDP 대비 R&D 투자를 지금의 2배에 이르는 2.5%까지 확대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국가 중장기 과학기술 발전계획』을 수립, 실행 중이며, 세계 일류급의 대학 학과 100개를 만들겠다는 계획(‘111’계획)을 수립, 추진하고 있다.


R&D 지원 강화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참여정부는 출범 초부터 과학기술중심사회 건설을 주요 국정과제로 정하고 R&D 사업을 계속 확충하는 한편, 정부 연구개발사업의 효율성과 기획ㆍ조정능력을 제고한다는 취지 하에 행정체제를 개편하였다. 먼저 정부 R&D 예산을 보면, 현 정부 출범 원년(2002년)의 약 6.1조원에서 2006년에는 8.9조원 규모로 연평균 9.9% 증가했고, 2007년에도 전년 대비 10.5% 증가한 9.8조원의 예산을 책정하였다. 증가율만 보면, R&D 예산은 사회복지ㆍ보건과 함께 참여정부 들어 가장 빠르게 팽창한 부문에 속한다. 민간부문의 R&D도 전자, 반도체, IT 산업의 경쟁력과 함께 크게 증가하였으며, 그 결과 『2006 과학기술 연구개발 활동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GDP 대비 R&D 투자 비율은 2002년 2.53%에서 2005년 2.99%로 높아졌다. OECD 회원국의 동 지표 평균이 2,26%임을 감안하면, 상대적 비중은 이미 괄목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제도 면에서는 현 정부 들어와 과학기술부의 위상을 부총리급으로 격상시키고 과학기술혁신본부를 신설하는 등 행정체제를 개편하였다. 각 부처별로 분산되어 있는 R&D 예산의 조정, 배분기능을 체계화하겠다는 취지에서이다. 이 밖에 성과 중심의 평가제도 도입, 연구관리의 효율화를 위한 방안들을 도입하였으며, 2006년 12월에는 지금까지의 과학기술혁신 성과에 대내외 환경 변화 및 산업여건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국가 R&D 사업의 중장기 비전과 전략을 담은 『국가 R&D사업 Total Roadmap -중장기 발전전략』을 발표하였다. 이 로드맵에서 정부는 2020년까지 ‘과학기술 경쟁력 세계 5위권 도약’을 달성한다는 목표 하에 생명, 에너지ㆍ자원, 환경, 기초과학, 소재ㆍ나노, 우주ㆍ항공ㆍ해양 등 총 9개 분야에서 분야별 중장기 투자전략과 추진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3. 성과와 문제점


지금까지 우리나라 R&D 투자 및 과학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연구개발집약도(GDP 대비 R&D 투자 비율)는 3%에 이르러 미국의 2.68%, OECD의 2.26%, 일본의 3.13%, 독일의 2.49% 등과 비교할 때 뒤지지 않거나 오히려 앞서는 수준이 되었다. IMD에서 평가한 2006년 우리나라의 기술경쟁력과 과학경쟁력도 각각 6위와 12위로 높은 편이다. Nature, Science, Cell 등 3대 과학저널의 한국 논문 게재 건수도 1995년 2건, 2002년 6편에서 2005년 29건으로 증가했으며, 국제특허출원(PCT)도 2005년 4,422건으로 세계 6위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발전에 힘입어 우리나라 기업의 제조 및 응용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다. 2006년 미국 특허등록 기업 중 삼성전자가 2,453건을 등록하여 IBM의 3,651건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는 미국 특허청(USPTO)의 잠정 추계치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와 같이 상대적인 지표만 보면 우리나라 기술혁신과 연구개발투자는 이미 주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적인 규모 면에서는 주요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미흡하다는 문제점은 남아있다. 예를 들어 연구개발집약도는 분명히 높지만 R&D 절대규모를 보면, 우리나라는 미국의 1/13, 일본의 1/6, 독일의 1/3, 프랑스의 1/2에 불과한 수준이며, 연구원 1인당 연구비도 선진국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PCT 특허출원도 세계 6위 수준이라 하지만 전체 출원건수에서 우리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3.5%로 미국 33.6%, 일본 16.6%, 독일 12.8%에 비교할 때, 아직은 갈 길이 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성장 동력의 창출과 관련, 원천 기술력이 미흡함도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우리나라 총 연구개발비 중 기초연구에 배정되는 몫은 15% 미만이며, 원천기술의 수준을 나타내는 특허경쟁력에서 우리나라는 컴퓨터, 반도체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선진 경쟁국에 비해 열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Technology Review社에서 업종별로 세계 주요기업들의 특허경쟁력을 평가한 결과(『The TR Patent Scorecard 2004』)를 보면, 특허경쟁력 10대 기업에 삼성전자가 전자부문 6위, 반도체 4위에 올랐을 뿐, 자동차, 화학, 컴퓨터, 바이오 등 여타 부문에서는 한국 기업이 전무하다. 이처럼 원천 기술력이 취약한 결과, 기술무역수지는 만성적인 적자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적자폭은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 세계 시장에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이 높게 평가되는 전자와 IT 산업에서도 판매수입의 많은 부분이 로열티 지급과 핵심부품ㆍ소재 구입 등을 통해 해외로 유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R&D 스톡의 증가도 중요하지만 투자 효율성도 시급히 향상시켜야 할 과제이다. 특허 출원이 등록으로 이어지는 빈도는 선진국에 비해 낮고 등록된 특허의 GDP 기여도는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나라 연구개발비의 재원별 구성은 정부ㆍ공공부문과 민간의 부담비율이 25: 75로 정부의 비중이 낮은 편이다. 미국(36.3%), 독일(30.7%), 프랑스(40.9%)에서는 정부ㆍ공공의 부담 비율이 높다. 그래서 우리도 정부의 R&D 지출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 보다는 선택과 집중을 통한 효율성 제고가 우선이다. 예를 들어, 『참여정부의 과학기술 기본계획(2003.5)』에 의하면 과학기술정책 수립에 계층간ㆍ지역간 격차 해소, 국가균형발전 등의 정치적 목표를 최대한 반영한다고 되어 있다. 정부의 R&D 정책이 이와 같이 정치적 변수에 영향 받게 되면 ‘나눠먹기’ 식의 지대추구행위는 성행하고 민간부문의 R&D 의욕은 더욱 감퇴되는 부작용을 낳을 뿐이다.


이 밖의 문제로는 과학기술 인프라가 취약하다, 민간부문의 R&D는 제한된 수의 대기업이 주도하고 중소기업의 기술혁신 투자는 미흡하다, 산ㆍ학ㆍ연 뿐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 협력업체간 R&D 분업과 협업의 연계성이 취약하다, 국제적 R&D 네트워크가 약하다는 등의 지적이 있다. 이 중 마지막 사안을 부연설명하면 참여정부에서도 문제를 인식하여 ‘동북아 R&D 허브 구축’의 기치를 내걸고 외국인투자촉진법, 기술이전촉진법, 조세특례제한법 등에서 허용되는 지원수단(부지·보조금·세제 지원 등)을 통해 해외기업 R&D 센터를 유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상당수의 R&D 센터를 유치했으나 이들 대부분은 규모가 적고 형식적이며, 연구보다는 생산을 위한 개발에 치중하는 등 아직은 당초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것으로 평가된다.


4. ‘기업가적 발견' 과정으로서 R&D 기능의 재인식


육성·지원 대상의 신성장 산업 및 기술 선정, R&D 예산 편성 및 배분, 과학기술 행정혁신 등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는 우리나라 R&D 정책은 두 가지 특징이 관찰된다.


첫째, R&D 관련 정책안은 많은 부분 모두 공학적 설계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이 점은 ‘범국가적·체계적 과학기술 혁신체계 구축’, ‘신성장엔진 육성 및 조기 산업화 기반 조성’, ‘세계적 과학기술대학의 육성 및 수요지향적 인적자원 공급체계 구축’, ‘기술 유출입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전략 수립’ 등 정책대안으로 흔히 거론되는 사례에서 엿볼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기술혁신 및 연구개발 활동이 마치 경제시스템과 독립적인 사안인 양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인력 문제와 관련 교육제도를 거론하고 민간의 투자 고취와 관련 세제·금융상의 유인책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R&D 정책은 과학기술의 문제 또는 과기부에서 관할 가능한 이슈 중심으로 대단히 제한된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와 같이 제한된 시각의 공학적 설계주의에 기초하여 정책을 펼쳐서는 연구개발이든 설비투자이든 지금의 우리 경제에 필요한 투자가 충분히 일어나기 어렵다. R&D 투자의 75%를 민간이 담당하고 있고 앞으로도 급증하는 복지재정수요 때문에 정부의 R&D 지원을 대폭 증대시키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리고 앞에서 강조했듯이 ‘R&D 과소투자’를 정부가 대신 채우기보다는 과소투자의 발생 원인을 찾아서 고쳐 나가는 일이 자원배분의 왜곡을 줄이고 투자의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방법이다. 시장실패가 존재하는 경우에도 정부가 직접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기 보다는 시장 참가자 스스로 R&D 활동에 적극 나설 수 있도록 경제제도의 인센티브 구조를 종합적·체계적으로 개선하는 게 효과적이다.


그러자면 먼저 R&D의 본질을 과학기술의 문제보다는 기업가정신 발현의 맥락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한다. 사실, 시장에서의 자발적인 기술혁신과 연구개발은 무지(無知)의 영역에서 ‘기업가적 발견(entrepreneurial discovery)'을 통해 이윤기회를 잡으려는 동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국가 전체의 R&D 활동을 높이려면 기업가적 발견과정을 가로막고 있는 제도적 요인들을 찾아 개선하면 된다. 이들 중 몇 가지를 들어보면, 첫째는 경쟁촉진이다. 힉스(J. R. Hicks)도 말했듯이 독점이 좋은 까닭은 높은 이윤을 누려서가 아니라 경쟁에 시달리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이 부족하면 생존과 경쟁력 향상을 위한 연구개발, 기술혁신 동기도 낮아지는 게 당연한 이치다. 소비자를 위해서도 R&D 경쟁력을 위해서도 경쟁을 촉진해야 하며, 특히 대기업은 연구인력과 투자여력이 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경쟁을 촉진할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지금까지의 R&D 정책 관련 논의에서 경쟁 환경 및 제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으나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공정거래법상의 출자규제 및 각종 개별법에서의 진입규제 등 정책적 경쟁제한규제가 유달리 많아 문제이다.


지적재산권 보호수준도 한층 높여야 한다. R&D의 외부성을 감안해도 우리나라 지적재산권 보호는 개선의 여지가 많다. WEF의 2006년 국가경쟁력 평가결과에 의하면, 발명특허건수(9위), 기업의 R&D 지출(9위), 기업의 기술혁신 노력(13위)은 우리나라가 높은데 반해 지적재산권 보호수준은 125개국 중 31위로 열악하다. 특허법원에서 특허침해소송을 전담토록 하고 지적재산권 및 산업기밀 침해에 대해 좀 더 엄정하게 책임을 추궁할 수 있도록 관련 법제 및 제도를 보완하는 등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R&D와 실물투자를 별개의 사안으로 접근해온 관행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기술진보는 자본재에 체화되기 때문에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은 상호 보완적인 측면이 있다. 이러한 상호 보완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투자부진이 심각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R&D 정책의 장에서는 먼 미래의 성장엔진만 강조할 뿐, 오늘의 설비투자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투자 부진은 이미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 성장잠재력을 잠식하고 있음에도 하이닉스 社의 사례에서 보듯이 정부는 수도권집중규제 등을 통해 대규모 기업투자를 불허하고 있다. 연구개발과 설비투자 간의 피드백(positive feedback) 효과 등을 감안, 앞으로는 R&D 정책의 관점에서도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고 있는 정책적 규제 문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황인학 / 한국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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