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집단규제의 문제점과 개혁방안

이형만 / 2002-10-12 / 조회: 5,759
No.034

우리의 공정거래법은 서로 차원을 달리하는 두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하나는 경쟁을 촉진하고 공정한 거래질서를 확립하여 시장경제를 창달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과도한 경제력집중을 억제하는 일이다. 이 두가지 목표는 근원적으로 상충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세계 모든 나라는 경쟁촉진과 불공정경쟁방지를 통한 시장경제체제의 확립을 경쟁정책의 기본목표로 삼고 있다.

규제환경 변화와 시장자율감시능력의 확대

경제력집중 억제를 위해 1986년에 도입된 기업집단지정제도는 국내시장이 제대로 개방되지 않고 경쟁제한적인 제도와 관행이 만연되어 있었으며 부당내부거래가 규율받지 않았던 당시에는 불가피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와 지금의 경제실상을 비교해 보면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최근 10여년 사이에 경제의 국제화, 개방화는 크게 진전되었고 OECD가입에 따라 국내시장까지도 글로벌경쟁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IMF외환위기 이후 지난 4년반 동안 기업지배구조개선과 기업투명성제고를 위한 과감한 제도개혁이 이루어졌다. 결합제무제표의 의무화, 사외이사제, 감사위원회제, 집중투표제 등 수많은 혁신적인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부당내부거래에 관한 규제는 크게 강화되고 기업공시 대상은 대폭 확대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이 시행되면서 기업투명성을 둘러싼 기업과 시장의 환경은 놀랄만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기업집단의 결속관계는 해체된 것이나 다름이 없고 불합리한 경영행태는 더 이상 은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비판을 받아왔던 황제식 경영문제도 2중, 3중의 제도적 견제장치와 시장의 감시 속에서 구조적으로 발붙이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또 최근 정보화사회가 급진전되면서 정보의 유통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져 시장의 감시능력은 크게 신장되었다. 여기에다 기업정보에 관한 공시범위가 대폭 확대되다보니 기업은 마치 벌거숭이처럼 시장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되게 되었다.

또 상장주식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외국인투자자의 보유주식비중이 1997년말 14.6%에서 2002년말 36.6%로 2배이상 커지다 보니 조금이라도 상식에 어긋난 경영관행을 보이기라도 하면 주가폭락이라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증권시장에서의 거래종목수가 코스닥을 포함해 대폭 늘어나고 증권시장의 개방이 확대되는 가운데 투자자들의 시장선택의 폭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러다보니 기업들이 분별없는 의사결정을 하거나 불합리한 경영행태를 보일 경우 시장은 이를 용납치 않는 구조로 바뀌게 되었다.

계열회사간 거래가 이사회승인을 거치고 공정한 조건에 의한 거래였다 할지라도 시장에서의 냉정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제값을 준 거래라 할지라도 공시된 기업간 내부거래가 시장으로부터 의혹의 눈길을 받을 때 기업은 값비싼 대가를 치루게 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반응은 더욱 민감하다. 계열회사에 빌려준 돈을 언제 회수할 수 있으며 빌려준 조건이 정당한 조건인지를 확인하려 하며 의문이 풀리지 않을 경우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한다. 투자자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기업은 주가가 하락하고 자금조달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국내외 신용평가기관들도 기업경영상황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고 조금이라도 이상징후가 보이면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하고 채권금융기관들은 부실채권방지를 위해 다단계적인 내부심의와 상시점검을 통해 철저한 신용평가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이 투자자, 채권금융기관, 신용평가회사, 회계감사법인, 우리사주를 보유하고 있는 근로자등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원칙에 어긋난 비정상적인 기업활동에 대해서 용납치 않는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의 자율적 통제시스템이 자리잡은 상황하에서는 과거 폐쇄경제하에서 만들어진 시장경제 역행적인 규제를 새롭게 바꾸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기업집단규제가 법치주의와 시장경제 측면에서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위헌소지있는 기업집단규제

공공복리와 질서유지를 위해 필요로 하는 규제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따라 설정될 수 있다. 때로는 불완전한 시장기능의 보완을 위해 불합리한 기업 경영행태를 규제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라 할지라도 규제대상을 정하는 법령의 기준이 헌법의 규정과 배치된다면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것이 되며 민주주의 원리에 반하는 것이 된다.

현재 규제대상기업집단 기업에 대해서는 채무보증금지, 출자총액제한, 금융보험회사의 계열회사주식에 대한 의결권 제한 등 여러 규제를 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각종의 법에서 공정거래법의 취지를 원용하여 차별적인 규제를 하고 있다.

이러한 규제 모두는 기업의 경쟁조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출자총액제한 여부는 기업의 신규시장진입에 큰 변수로 작용하고 채무보증 여부는 한국과 같이 금융시장이 낙후되어 있는 국가에서는 자금조달과 금융코스트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친다. 기업간 경쟁에 큰 변수가 되는 규제를 공정거래법은 차별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규제대상기업집단에 속하면 매출액 兆규모의 거대기업이든, 매출액 수억원에 불과한 중소기업이든 가리지 않고 규제대상에 넣고 규제대상에 속하지 않으면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규제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는 정부가 규제대상계열사에 대해서는 불리한 경쟁조건을 주고 비대상 기업에 대해서는 유리한 경쟁조건을 주어 시장경쟁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헌법 제11조 1항에서 규정하는 평등권 침해의 소지가 뚜렷하다. 그 규정에 의하면 “누구든지 사회적 신분에 의해 경제영역에 있어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규제대상기업집단에 속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규제를 받는 것은 그 법인은 물론 그 법인의 주주를 불평등하게 대우해 경제적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속칭 “왕따”를 제도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기업집단으로 간주되는 회사의 법적개념이 인위적으로 설정된 개념이라는 점이다. 기업집단에 포함되느냐의 여부는 동일인과 동일인관련자의 출자지분 합계(30%이상 출자, 최다출자자)를 기준으로 결정하며, 출자지분 합계가 30%미만이라도 임원선임등 회사경영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기업은 계열사에 편입하고 있다.

여기의 동일인관련자의 법적 개념은 대단히 광범위하며 실체적 진실보다도 형식적 요건에 따라 판별토록 되어 있다. 친족의 경우를 예를 들면 동일인으로 간주되는 혈족의 범위를 8촌까지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들 친족이 통상 수백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데 독자적인 법적, 경제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한데 묶어 이들을 연대체로 보아 규제대상 기준으로 삼는 것은 타인책임을 강요하는 결과가 된다.

핵가족시대에 이렇게 많은 친족들의 의사결정권을 좌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는 참으로 비현실적이다. 자본주의는 자기책임의 원칙에 따라 규율되어야 하는데도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수백명의 동일인관련자의 경제행위에 따라 규제대상을 정하는 것은 사적자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친족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은 특수관계인의 개념도 대단히 광범위하고 개념이 불명확하여 동일인과 상관없는 경제적 독립체인데도 계열회사로 편입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기업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차별규제를 하는 것은 부자집아이는 다 튼튼할 것이니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와 다름이 없다. 부자집아이라도 병든 자, 허약한 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장애자도 있을 수 있는데도 그 구체적 형편을 살피지 않고 부자집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이익을 준다면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 현행 세법은 기업집단을 하나로 묶어 결합된 단일체로서의 조세의무를 지우지 않고 있다. 기업집단 전체를 합산해 보아서는 적자라 하더라도 그 기업집단에 속하는 개개의 기업이 흑자가 났다면 흑자가 난 개개기업별로 분리하여 법인세를 내도록 되어 있다. 또 계열기업간 부당내부거래를 규제하고 위반시에 가혹한 과징금제재를 하는 것도 법률상의 권리의무 주체를 개개법인별로 본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정거래법상의 규제기준도 실체적 진실과 거리가 먼 기업집단 개념을 버리고 개개기업을 기준으로 정하는 것이 법치주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불공정경쟁과 경쟁제한으로 시장경제원리와 배치

어느 나라든 공정거래제도는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여건의 조성을 기본목표로 삼고 있다. 경쟁을 촉진하고 불공정경쟁을 방지하여 시장에서의 심판을 통해 효율을 높히고 소비자후생을 증진시키는 것이 제도운영의 참된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업집단지정제는 차별적 규제를 전제로 한다. 기업집단에 대한 규제내용이 채무보증, 출자한도 등 중요한 경쟁조건임을 감안할 때 규제대상에의 포함여부는 기업의 시장지배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규제를 규제대상집단 기업에 속하면 중소기업이라도 적용을 시키고 그렇지않으면 대규모기업이라도 아무런 제약이 없다.

이 두 기업이 경쟁하는 관계라면 불공정경쟁과 경쟁제한을 조장하는 성격을 띠며 이러한 규제의 존부 자체는 시장의 신규진입을 제한하는 성격을 띤다. 경쟁조건의 차별화를 다른 법도 아닌 공정거래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다. 중소기업인데도 규제대상 기업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공정거래법상의 규제를 받고 있고 경쟁사인 국내대기업이나 외자계기업은 시장지배력이 훨씬 큰데도 아무런 규제가 없다면 공정한 시장경쟁이 이루어질 리가 없다. 경쟁제한과 불공정경쟁 문제는 규제대상집단계열 중소기업과 규제대상제외 대기업간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기업간에도 규제대상기업집단에 속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이렇게 불합리한 일은 공정거래법상의 규제를 기업기준으로 하지 않는 한 무수하게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규제대상을 자산순위로 정하든, 자산규모로 정하든 간에 경쟁조건의 차별화 문제는 기업집단을 기준으로 정하는 한 시정되지 않는다. 규제대상을 자산규모로 하여 조금 줄인다 하더라도 기업집단에 속해 있는 기업들이 천차만별의 격차를 갖고 있는 한 경쟁제한이나 불공정경쟁 등 경쟁을 왜곡하는 사례는 허다하게 노출된다.

기업집단규제 폐지하고 기업별규제로 대체해야

기업집단지정 규제는 법치주의측면에서 위헌소지가 있고 시장경제원리를 저해하며 국민경제적 피해가 크다는 제반 문제가 복합되어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 어느 하나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일진데 세 가지 문제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면 경제력집중억제를 목적으로 하는 규제는 글로벌시대에 맞게 개혁하는 것이 순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정거래정책은 이제 경쟁촉진과 불공정거래방지라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부업을 버리고 본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순수한 경제논리가 존중되어야 하며 그러기에 과거 정치사회적 논리에 의해 설정된 규제의 틀은 새 환경에 맞게 고쳐야 한다. 근본을 손대지 않은 채 계속 미봉적인 수습으로 일관해서는 그만큼 시장경제의 정착이 늦어지게 된다. 공정거래법이 경쟁정책을 다루는 기본법이라는 점에 비추어 규제대상 기준은 경쟁중립성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설정되어야 하며 그런 취지에서 기업집단지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계열회사간 채무보증규제도 강화된 공시제도로 인해 시장에서의 견제와 심판기능이 충분히 작동될 수 있으므로 경쟁조건의 차별화 방지를 위해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만약 존치해야 한다면 일정규모이상의 기업을 대상으로 한 경쟁중립적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금융기관의 계열사보유주식에 대한 의결권제한 규제는 국내에 투자한 외국투자기관을 국내기업보다도 우대하는 결과가 되므로 규제를 폐지해야 한다. 어차피 금융, 보험사는 금융관련법령에서 계열회사에 대한 주식소유를 엄격히 제한받고 있어 중복규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한 외국인투자가가 국내 우량기업의 주식을 5%이상은 물론 10%이상의 주식을 보유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그 의결권은 제한이 없는 가운데 금융보험관련법에 의해 엄격한 지분소유한도에 묶여있는 주식마저도 의결권을 제한함은 불합리한 일이다.

특수관계인에 해당하는 친족의 범위도 핵가족시대에 맞게 대폭 축소하는 등 그 범위를 축소조정하고 이러한 특수관계인 관리나 계열법인 관리는 부당내부거래 조사 등 경쟁제한을 감시하는 자료로서만 활용되도록 개선해야 한다.

기업집단지정규제는 집권당이나 원내 제1다수당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소속 정당의 국회의원에 대해 정치후원금 한도를 차별책정하는 규제나 다름이 없다. 국회의원의 정치후원금 기준을 소속정당이 원내1당이나 집권당이라는 이유와 결부시켜 결정한다면 과연 합리적인 사고일까. 특정기업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차별적 규제를 지속하는 한 우리의 경쟁정책은 3등급판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OECD의 한국규제개혁심사보고서에서는 기업집단규제로 한국대기업이 외국기업에 비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인정하고 이 규제를 폐지할 것을 충고하고 있다. 시장경제원리에 부합된 공정거래규제 개혁방안 마련을 위해서 법조계, 경제계, 학계, 언론계 등의 민간대표와 재경부, 산자부, 규제개혁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대표가 함께 참여한 가운데 공정거래규제개혁위원회를 조속히 구성해야 한다.


이형만(자유기업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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