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국고보조금 폐지와 자율적 정치자금 모금 확대

박효종 / 2002-09-07 / 조회: 5,849
No.021

1980년 국고보조금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되어 책정된 예산은 8억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액수는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2002년 올해에는 1천 1백39억원에 달하는 거금이 되었다. 22년 만에 무려 1백40배가 늘어난 것이다. 이처럼 국민부담이 급증한 것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국고보조금제도가 기대와는 달리 정당발전과 정당민주화에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해왔다는 사실이다. 국고보조금제 도입으로 인하여 정당들이 재정적으로 견실해 진 것도 아니며, 국고보조금이 늘어날수록 이를 확보하기 위한 기상천외하고 파행적인 정당행태까지 나타나 유권자에 대한 정당의 ‘대응성(responsiveness)’과 ‘책임성(accountability)’이 떨어지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하였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국고보조금제가 더 이상 유지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하여 강한 의구심을 표명하게 된다. 이 의구심에 관한 한, 몇 가지 근거가 있다.

부실한 정당구조

국고보조금제를 도입할 당시의 취지는 재정적 지원을 통하여 정당의 자율성을 촉진하는 ‘보약(補藥)’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당에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켜 정당의 부실화를 초래하는 ‘마약(痲藥)’의 구실을 한 셈이 되었다.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란 무엇인가. 행위자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질 필요가 없을 때 도덕적 해이 현상이 발생한다. 도덕적 해이를 야기시키는 현저한 사례는 보험이다. 자동차보험을 든 운전자는 ‘방어운전’보다 ‘공격운전’을 할 인센티브를 갖게되고 화재보험에 든 사람은 “꺼진 불도 다시 보지 않으려는” 만심을 갖게된다. 또 생명보험에 든 사람은 다리를 건늘 때 “두드리며 조심조심 건너려는” 마음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국고보조금제가 보험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국고보조금을 받는 정당들이 함몰되는 도덕적 해이의 대표적 현상은 정당의 재정자립도가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정당은 기본적으로 당비에 의해 운영이 되어야 하는 조직임에도 그렇지 못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2000년도를 예로 든다면 한나라당은 전체당원 2백 68만명 중에서 당비를 낸 당원은 0.45%인 1만1천명에 불과했고 민주당 역시 전체 당원 1백74만명 중 0.41%인 7천명만이 당비를 냈다. 자민련의 경우는 당원의 0.29%만이 당비를 낸 것으로 나와있다. 당연히 당비가 각 중앙당의 전체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미미할 수밖에 없다. 2002년도를 기준으로 12.9-13.9%에 불과한 실정으로 서구의 민주주의국가들과는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경우(99년 기준), 총수입의 30.0%가 국고보조금이며 당비는 51.4%를 차지하고 있고 기독교민주당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서구 정당들에 비해 한국 정당들의 자생력이 매우 떨어진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미 슘페터(J. Schumpeter)는 정당을 ‘정치적 기업(political entrepreneurs)’으로 유권자는 ‘정치적 소비자(political consumers)’로 비유한 바 있는데, 한국의 정당은 ‘정치적 부실기업’과 다름없다. 전체 자본금의 12.9-13.9%밖에 충당하지 않은 채 기업의 주인으로 자처하며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행사하는 사이비 기업가의 부도덕한 행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른바 ‘정치시장’에서 몇 번은 퇴출당하고도 남을 정도로 재정상태가 불량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분식회계로 주주와 소비자를 속이며 우량기업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진정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을 방불케하는 ‘정치적 기업가정신(political entrepreneurship)’이 발휘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부실기업의 회생프로그램에서는 자구노력에 따라 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그러한 노력도 없이 의회에 진출한 여야가 담합행위를 함으로써 국고보조금은 선진국 수준 이상으로 증액되었다. 결국 국고보조금 제도는 입법권을 가진 정당 정치인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져 국고를 자의대로 쓰기 위한 편법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보조금 배분방식의 문제

국고보조금의 배분방식도 정치의 독과점 구조를 조장하고 정당의 민주화와 정당정치의 정상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행 국고보조금배분에 관한 한, 기본비율과 의석비율 및 득표비율의 세 가지 계산법이 혼용된다. 우선 기본비율에 입각한 배분방식에서는 전체 보조금의 50%에 대하여 의석수 20석 이상의 원내 교섭단체에 균등하게 배분한다. 그 후 남는 금액을 의석수가 5석 이상~20석 미만인 정당과 5석 미만이고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등에서 특정한 비율 이상의 득표를 한 정당으로 나누어 일정액수로 배분하고 있다.
의석비율을 기준으로 한 배분에서는 기본 비율을 제외한 잔여분 가운데 절반을 국회의석을 차지한 정당에 의석수 비율에 따라 배분하고 있다. 득표수 비율을 기준으로 한 배분방식에서는 기본비율과 의석비율을 제외한 최종 잔여분을 최근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서 득표한 정당의 득표비율에 따라 배분하도록 되어있다. 문제의 계산법은 결국 국고보조금의 배분에서 원내 교섭단체의 구성여부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염불보다 잿밥”에 정성을 쏟는 의회정치와 정당정치형태가 나타난다. 민주당과 자민련이 각기 의석수 20석 이상의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는데 도움을 주고 받기 위해 ‘의원 꿔주기’나 ‘의원 꿔받기’와 같은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한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기본비율을 기준으로 한 국고보조금 배분에서 의석수를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의석수 비율을 이용한 배분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의석수를 중복 계산해 보조금을 배분하는 방식도 ‘정치적 공정성(political fairness)’에 위배되는 방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배분방식으로 인하여 주요 정당이 국고보조금의 95%를 독점하고 소규모 정당은 거의 국고보조금을 받을 수 없는,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의 부조리한 상황을 야기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 거대정당들의 담합의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겠는데, 신진 정치세력의 정치시장(political market)의 진입을 막는 장벽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가하면 국고보조금으로 조성된 중앙당의 정치자금이 당 총재나 지도부의 ‘쌈짓돈’처럼 사용된다는 점도 문제다. 참여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2001년 각 정당이 지출한 국고보조금 2백 67억원의 58%가 세법상 인정되지 않는 증빙자료로 제출되었다. 또 결혼식 축의금으로 낸 돈이 정책개발비 지출항목에 포함되기도 할 정도로 국고보조금에 대한 회계감사가 부실한 실정이다.

중앙당 비대화를 부추키는 보조금

국고보조금은 주로 어디에 쓰이는가. 대체로 1년에 260억원 규모의 보조금이 정당에 대한 경상보조비로 쓰인다. 그 돈은 결국 중앙당 유지비이다. 이처럼 국가가 조직유지 관리운영비를 도맡아 주는 상황에서 비대한 관료조직과 같은 중앙당만 있는 기형적 정당이 존재하게 됨은 당연한 일이다. 국고보조금이 주로 중앙당 유지비로 충당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과연 중앙당은 정당정치에 있어 필요한 것인가. 미국의 경우, 유럽과는 달리 정당의 전국적인 조직은 없다. 물론 미국적 정치구조의 특성은 연방국가라는 데서 연유된 정당형태다. 따라서 미국의 정당은 우리가 흔히 모델로 삼고 있는 ‘국민정당’이나 ‘정책정당’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선거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선거가 끝나면 각 정당의 전국적 연대는 소멸해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중앙당이 정당의 지배구조가 되어왔는데, 중요한 것은 유럽모델과 미국모델가운데 어떤 것이 한국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관료조직과 같은 비대한 중앙당이 국회의 역할을 왜소화시킨다는 점에 있다. 한국사회에서 유력 정당의 중앙당은 국회의 역할과 기능까지도 대신할 정도로 그 기능이 엄청나다. 그 결과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토론하고 심의해야할 국정의 주요사안과 현안들이 각 당의 중앙당 차원에서 정략적으로 다루어짐으로써 국회의 ‘심의기능(deliberative function)’은 쇠퇴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른바 ‘식물국회’가 되어도 정당정치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기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한국의 정치현실이다. 따라서 중앙당의 비대화는 단순히 국고보조금을 먹는 ‘하마’라는 사실 못지않게 오히려 그보다는 국회기능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정치발전의 관점에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결국 국회기능의 약화를 초래하는 중앙당을 축소내지 해체한다는 것은 의회민주주의 활성화를 가능하게 만들고 한편으로 엄청난 정당자금수요를 감축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만든다. 즉 일거양득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원론적 수준에서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 제도가 필요한 것인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된다. 정당은 헌법기관이 아닌 임의단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민주사회에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동호회와 같은 임의단체는 아니다. 정당은 민주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정당이 민주정치에 필수적이라고 해서 특정한 A 정당이나 특정한 B 정당이 필수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시장사회에서 기업이 필요하지만 특정한 A 기업이나 B 기업이 필수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특정기업 A가 부실하다면 시장에서 가차없이 퇴출되어야 하며 기업 B가 양호하다면 더욱 융성해야 한다. 이러한 판단의 기준은 시장의 소비자들에게 있다. 소비자가 선호하는 기업이 성공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도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특정정당의 성장과 발전에는 유권자들의 지지와 선호가 전제되어야 한다. 즉 유권자의 지지를 받는 A 정당이 융성하고 유권자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B 정당이 쇠퇴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러한 메커니즘이 순조롭게 작동되도록 ‘정치시장’에서 보장할 필요가 있다.
문제의 논리는 정당이 필요로 하는 재정문제에도 마찬가지로 통용된다. 유권자가 돈을 기부하겠다는 A 정당에 돈이 들어와야 하고 돈을 기부할 마음이 없는 B 정당에는 돈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국고보조금제는 돈을 기부하겠다는 유권자의 뜻과 관계없이 선거 때 일정 수준의 득표를 했거나 일정한 의석수를 차지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보조금을 제공하는 제도다. 일단 득표를 했거나 국회의석을 차지했으면 ‘그 자체로’ 유권자의 신임을 받아 일정한 결과를 내고 권력을 장악한 것인데, 또 그러한 권력배분의 결과를 의하여 보조금배분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부조리하다. 그것은 마치 권력을 차지한 사람이 돈까지 차지하겠다는 것과 같은 ‘금권정치(金權政治)’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득표율의석수 및 정치자금배분은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결국 국고보조금제는 유권자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자발적인 기부제도와는 상이한 비민주주의적 제도다. 국회의석수는 유권자로부터 표를 받아 결정된 것일 뿐, 그것이 보조금을 배분하는 현저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유권자들이 ‘표’가 아닌 ‘돈’을 주려면 ‘표’의 기준이 아닌, ‘돈’의 기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원하는 정당에 내고 싶은 만큼 돈을 내겠다는 자발적 의사표시이외에 다른 기준은 있을 수 없는 셈이다.

경상비 보조철폐

이처럼 민주주의 정신에 맞지 않고 공정성도 결여한 현행 국고보조금제도에 대한 개혁안은 명백하다. 우리는 국고보조금제도를 폐지할 것을 제안한다. 국고보조금지금으로 인한 정당의 도덕적 해이를 막고 또한 정당민주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촉진시키기 위해서 국고보조금제는 전면 폐지될 필요가 있다. 국고보조금제를 폐지한 후 미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의 연말 세금정산시 정치자금을 기부하는 ‘일괄공제(check-off)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실시할 경우, 정당은 유권자의 지지와 동의에 의해서 움직이는 조직이라는 민주주의원리가 살아 꿈틀거리게 되고, 한편 납세자인 유권자에게도 정치자금의 기부를 통한 정치참여의식이 제고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것은 20년 이상 국고보조금 제도가 운용되어온 상황에서 하루아침에 이를 철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또 현실적인 대안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개혁을 외치면서 ‘대규모적인 사회공학적 방법(large-scale social engineering)’을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사례도 없지 않다. 이탈리아는 1993년 국민투표를 통해 정당중심의 국고보조금 제도를 폐지하고 후보자 중심의 국고보조체제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우리상황에서 국고보조금제 폐지는 장기적 대안으로 삼고 단기적으로 운영의 개선을 주문할 필요가 있다. 커피중독자나 마약중독자도 한번에 끊으려고 한다면 금단현상을 일으켜 더 커다란 부작용에 함몰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점진적인 사회공학적 방식(piecemeal social engineering)’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그 방법으로는 정당에 대한 경상보조를 우선적으로 철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회와는 독립된 세력으로 기능하며 의회의 심의기능을 위축시키는 역할을 하는 거대 중앙당조직을 축소시키고 원내정당화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선거자금에 관한 국고보조만을 정당에 공여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당이 일정금액의 정치자금을 모금한 경우 모금액수에 비례해 국고보조금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은 이른바 ‘매칭펀드(matching fund)’의 개념을 국고보조금 지급에 도입한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하여 정당의 당비납부실적과 연동해서 국고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고보조금제도를 존속시키기 위한 대안이 아니라 보조금제도의 점진적 축소를 위한 대안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박효종(서울대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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