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이후 5년: 국제 체제 변화의 본질

이춘근 / 2006-09-11 / 조회: 5,814
1. 들어가는 말


9.11 테러가 발발 한지 5년이 되었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5년 동안 야기된 세계 정치의 변화는 그 이전 5년 동안의 변화보다 폭도 넓고 깊이도 심오하다. 그날 오전 단 몇 시간 사이에 발발했던 대규모 테러 사건은 국제정치의 체제변동(systemic change)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9.11 테러 공격의 인명 피해는(3025명) 진주만 기습공격의 피해(약 2400명)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국제 체제가 변화되었다함은 국제정치의 주요 행위자가 변했다는 사실과 국제정치 행위자들의 행동양식 혹은 게임의 규칙이 대폭 변하고 있다는 것 등 두 가지 측면에서 관찰 할 수 있다.


9.11 5주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 그 동안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9.11 이후 국제체제의 변화 요인들은 한반도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2. 9.11이 초래한 변화

9.11 이 초래한 대 변화는 우선 패권국가로서 미국의 역할과 태도가 급격히 변했다는 점이다. 또한 9.11 이후 국제정치의 대변화 중 하나는 국제정치의 주요 행위자가 강대국이기는커녕 국가도 아닌 개인과 조직,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소수의 허약한 국가들로 바뀌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국제체제의 주인공들은 강대국이다. 그러나 9.11 이후 국제정치의 주인공들은 미국을 제외하면 강대국은 하나도 없다. 나라라고 불릴 수 없는 알카에다 등 제반 테러리스트 그룹이 국제정치의 주요 행위자로 부상했고, 테러리스트들과 오랫동안 거래를 해 온 것으로 알려진, 그래서 미국에 의해 '악의 축’이라고 낙인찍힌 이라크, 이란, 북한 등 상대적으로 허약한 나라들이 국제정치라는 무대에서 훨씬 눈에 자주 띄는 행위자들이 되었다.


국가들의 행동 양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어떤 국제체제에서는 국가들이 대단히 사이좋게 지내기도 하지만 국가들 사이에 분쟁과 전쟁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국제체제도 있다.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이 마지막으로 격파된 후 건설된 유럽의 국제체제는 당시 전범국이었던 프랑스까지 포함된 화해와 협력의 국제체제였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싸움을 벌이기보다는 회의와 합의에 의해 국제정치를 꾸려 나갔다. 문자 그대로 이 시대는 콘서트 시스템(Concert System) 이었다. 이 시대는 국제법과 외교가 국가 간 갈등 해소의 가장 좋은 수단으로 간주되어 진정 외교의 황금시대(Golden Age of Diplomacy)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1945년 이후의 국제체제는 '냉전체제’라고 불렸다. 국가들은 자신과 반대진영에 소속된 국가들을 무조건 적대국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비록 열전(熱戰 hot war) 까지는 아닐지라도 긴장과 불안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차가운 전쟁의 시대가 두세대 이상 지속 되었다. 사회주의 체제와 소련이 붕괴됨으로서 비로소 냉전체제는 종식 될 수 있었다.


2001년 9월 11월의 테러공격은 서로 다른 국가, 인종, 종교들이 상호 반목과 미움과 불신을 항상 의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피곤한 세계를 만들고 말았다. 오사마 빈 라덴으로 인해 개인도 국제정치의 주요 행위자로 간주되게 되었고 그 결과 아무런 죄가 없는 선량한 시민들도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 마다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감시 및 조사당하는 고통을 참아야 하는 세월이 되었다. 개인들도 그렇게 못 믿을 대상으로 취급되니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9.11 이후 5년 동안 일어난 두 번째 변화는 국제정치 행위자들의 행동양식 변화다. 싸움의방식이 달라졌고 두려움의 근원이 달라졌다. 미국은 이제 과거 소련처럼 막강한 나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알카에다와 같은 국가도 아닌 테러조직들 그리고 이들에게 기생할 땅을 제공했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실패한 국가들, 테러 조직에게 무기를 팔고, 훈련을 시키는 중동의 이슬람국가들과 다른 지역의 처절한 반미주의 국가들이다.


9.11 이후 갑자기 국제무대의 주역이 되어버린 국가들도 역시 전통적인 방법으로 미국에 대항하지는 않는다. 후세인처럼 전통적인 방식(즉 정규 군사력으로)으로 미국에 대항하는 경우 그 결과가 너무 자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게릴라와 테러리스트들이 주요 전사(戰士)가 된 은밀한 침투 및 파괴공작, 상대방의 민심 교란, 죄 없는 인명의 살상을 통한 공포감 확대 등 21세기 과학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아주 비 전통적인 것 들이다.


테러전쟁 시대에서 나라들이 다른 나라의 선의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게 되었다.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각 나라의 국제공항은 9.11 이후 예외 없이 훨씬 더 비우호적인 장소로 바뀌고 말았다. 이상하게 생긴 사람은 물론 선량한 모습의 할머니 가방까지 샅샅이 뒤지는 모습을 쳐다보아야 하는 짜증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비록 시작 된지 5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9.11이후 국제정치 행위자들의 행동 규칙이 대폭 바뀌고 있는 것이다. 주연 배우들이 바뀌었고 경기의 규칙(Rules of the Game)마저 달라지고 있는 중이다.


3. 9.11 이후 5년의 평가

9.11 5주년을 맞이하여 많은 잡지, 신문, 방송 언론들이 특집을 마련하고 있다. 재미있는 분석중 하나가 미국의 유명한 국제관계 잡지인 Foreign Policy지 2006년도 9-10월호에 게재되었다. 이 잡지는 9.11 이후에도 세계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한 통계자료와 함께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9.11은 세계화의 진행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국가 간에 무역도 줄어들고 관광객들도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 되었다. 그러나 Foreign Policy 지가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미국의 수출액은 2001년 매월 600억 달러에서 2005년에는 매월 750억 달러로 늘었다.
세계의 무역은 2001년 8조 달러에서 2005년에는 12조 달러로 늘었다.
해외 관광객 숫자는 2001년 6억 8800만에서 2005년에는 8억 800만 명으로 늘었다.


세계화는 9.11 테러리즘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속도로 진행 된 것이다. 항상 낙관적으로 국제정치의 미래를 제시해 온 존 뮤엘러(John Mueller) 교수는 또 다른 영향력 있는 국제관계 저널인 Foreign Affairs지 2006년도 9-10월호에 기고한 논문에서 미국이 앞으로 다시 테러의 표적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놀라운 주장을 전개하고 있을 정도다. 뮤엘러 교수의 주장은 Foreign Policy지가 제시한 다른 자료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뒷받침 되고 있기도 하다.


9.11 이전 5년(96년 9월 11일-2001년 9월 11일) 동안
세계의 테러 희생자는 8,309명 이었고 미국의 희생자는 2988명 이었다.


9.11 이후 5년 (2001년 9월 12일-2006년 8월 22일)동안
세계의 테러 희생자는 26,213명이었고 미국의 희생자는 8명 이었다.


무역, 해외 여행객 등 긍정적인 숫자도 늘었지만, 부정적인 숫자인 테러 희생자의 숫자는 더욱 현저하게 증가했다. 놀라운 사실은 미국은 지난 5년 동안 테러로부터 사실상 지극히 안전한 나라였다는 점이다. 부시 대통령의 대외정책은 테러리즘을 더욱 부추겼으며 그래서 미국은 예전보다 훨씬 안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위의 자료는 이 비판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 해준다. 부시의 1차적 목표는 “미국의 안전” 이지 “세계의 안전”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 어느 나라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1차적 관심은 자기 나라의 안전이다.


Foreign Policy 지가 9.11 이후의 세계는 예상했던 것처럼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테러리스트들이 바라던 바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미국은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테러 전쟁이라는 새로운 전쟁을 치르면서 전통적인 전략 목표(군사력과 경제력의 증강) 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예로서 2000년도 세계 총 군사비의 36.3 % 였던 미국의 군사비는 2005년에는 세계의 48 %를 차지하고 있는 한편, 미국의 경제적인 비중도 별로 줄어들지 않고 있다. 1999년 당시 미국의 GDP는 세계총생산(GWP) 의 21%, 2002년에는 21.6 % 그리고 2005년 세계 총생산 44조43330억 달러 중 미국의 GDP는 12조 4857억으로 28.2 % 에 이르고 있었다.(IMF 통계)


미국은 명실 공히 패권국이다. 패권국이란 자국 국민의 안전이 가장 잘 보장되는 나라를 의미한다. 패권국은 현상에 만족하며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패권국이 아니라도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현상에 만족하는 나라들이 있다. 이들을 현상유지국가(Status Quo Power)라고 칭한다.


반면, 현상에 불만이 많고 현상을 타파하기 원하는 나라들도 많다. 패권적 지위에 거의 근접한 강대국들 혹은 국제정치의 변두리에 있는 불만이 많은 나라들이 그런 경우다. 이들은 세계를 변화시키기 원한다는 의미에서 혁명국가(Revolutionary Power)라고 칭할 수 있다.


국제체제에 현상유지 국가들이 더 많을 때 그 체제는 안정적이 된다. 반대로 혁명국가들이 많아지면 그 국제체제는 불안해 지기 마련이다. 9.11 이후의 국제체제는 특히 불안정한 체제가 되고 있다. 당연히 현상 유지 국가 이어야 할 패권국 미국이 스스로 현상을 타파하는 국가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막강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오히려 가장 위험한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미국은 이 같은 역설적 현상을 다시 정상으로 바꾸어 놓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위협에 당면할 경우 그 위협을 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위협에서 회피하는 방법이 그 하나이며 위협의 요인을 제가하는 방법이 두 번째 이다. 동물이던 나라던 대체적으로 위협이 닥치면 숨거나, 도망가는 방법을 택한다. 그런데 위협의 요인을 제거함으로서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미국의 독특한 전략 문화다. 지금처럼 막강한 국가가 되기 이전에도 미국은 지금과 마찬가지의 전략문화를 가지고 있었다.(존 루이스 개디스 저, 강규형 역 「9.11의 충격과 미국의 거대전략: 미국의 안보경험과 대응」 나남-자유기업원 2004 참조)


4. 테러전쟁 시대 한반도의 운명


9.11 테러공격은 한반도의 운명에도 예기치 않은 변화를 초래했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시각이 본질부터 바뀌었기 때문이다. 1994년 미국은 북한과 핵 합의를 이룩한 적이 있었는데 (1994년10월 21일 제네바) 당시 미국의 입장은 북한이 핵폭탄을 한두 발 정도 보유하고 있는 것은 눈감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북한의 핵 합의는 북한의 핵 활동을 동결(Freeze) 하는 것이며 그 대가로 미국은 북한에게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에 핵폭탄이 이미 한두 발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던 미국이 북한의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당시 북한은 미국에게 전략적 위협(strategic threat)이 될 수준은 아니었다. 이미 국제공산주의가 붕괴한 마당에 북한이 아무리 사회주의 수호와 사회주의 혁명을 외친다 해도 그것이 미국을 전략적으로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폭탄을 한두 발 가지고 있는 것도 미국은 그다지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북한이 자살할 것을 각오하지 않는 한 미국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미국이 우려한 것은 북한이 핵을 계속 만들어서 그것을 중동 국가들에게 파는 일, 즉 '핵확산’이 문제였던 것이다. 핵 확산의 문제는 북한 핵을 “동결”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 이었다.


9.11은 이 같은 미국의 가정(假定)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북한의 핵폭탄이 '핵확산의 맥락’이 아니라 '핵 테러리즘이라는 맥락’에서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이 1994년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의심하던 미국은 9.11을 계기로 북한을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위협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9.11 이후 미국이 우려하는 최악의 안보 위협 시나리오는 테러리스트들이 핵폭탄을 포함한 대량파괴무기로 미국을 다시 공격하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가 허황된 것이라 말 할 수 없는 이유는 테러리스트들에게 핵무기와 대량파괴무기를 건네줄 용의가 있는 나라들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도 그럴 수 있는 나라들 중 하나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에게 이번에는 핵동결이 아닌 핵 제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화학무기, 미사일 등 여러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 학자인 하버드 대학의 그래함 앨리슨 교수는 미국에서 핵무기 또는 다른 대량파괴무기가 사용된 테러는 발생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발생할 것이냐를 생각해야 할 절박한 문제라고 말하고 있으며, 만약 미국에서 핵 테러가 발생 한다면 그것은 러시아 제(소련이 망하는 과정에서 분실했다는), 파키스탄 제(칸 박사가 이미 이슬람 테러리스트에게 건제 주었을지도 모르는) 혹은 북한 제(돈을 받고 팔지 모를) 중 하나 일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미국이 생각하는 북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말이다.


미국은 갑자기 대적(大敵)으로 부상한 북한에 대처하기 위해 동맹국인 한국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9.11 이후의 한국 정부들은 미국의 대북한 전략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방관자, 심지어 북한 정부를 옹호하는 것 같은 입장을 취해왔다. 그 결과 한미 동맹은 미국이 생각하는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의 기능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미국은 북한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는 방법, 중국에게 요구하는 방법, 일본과 함께하는 방법 등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한국 측이 작전통제권을 돌려 달라하니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가져가라는 미국의 태도, 갑자기 북한전체가 자기들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태도, 언제라도 요구만 하면 미국의 입장을 다 들어주겠다고 하는 일본의 태도 등은 9.11 이후 갑자기 바뀌어 진 미국사람들의 북한에 대한 위협 인식과 이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전략이 동북아시아에 투영되며 발생한 복잡한 상황들이다.


9.11 이후 거의 완전히 변한 국제 정치의 게임규칙을 한국은 잘 이해하고 있는가? 북한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그것이 민족의 통일과 연결 될 수 있는 장치는 만들고 있는 중인가?


9.11이후의 세상에서, 그 모양이 어떤 것이든 간에 북한 문제가 “해결” 되었다고 최종 선언할 나라는 미국이다. 북한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오로지 미국과 1:1 로 맞붙어 대화든 무엇이든 해보는 것이 자신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 생각하고 저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대 북한 입장을 제대로 읽은 중국은 미국을 도와줌으로서 북한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 보인다. (한강 이북이 한때 중국의 땅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라) 만약 중국의 의도와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다면 그렇게 되는 날 남북통일의 이야기는 물 건너 갈 것이다.


9.11이 야기한 위기는 한반도에는 통일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이용할 수 있는 지혜는 우리 정부가 고심해서 만들어 내야만 할 어려운 숙제다.


이춘근 / 자유기업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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