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몇 해 전부터 미국은 위완화 절상과 중국 환율제도의 개혁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결국 중국이 두 손 들은 셈인데, 2005년 7월 21일 위완화는 2% 평가 절상되었다. 중국은 또한 환율제도도 개편하여 기존의 달러 페그(pegged) 고정환율제를 버리고 주요 통화 중심(basket)의 변동환율제를 새로이 채택하였다. 겉으로는 큰 변화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금번 조치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는 이유는 변화의 향후 파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전략적 판단을 해 보면 그 함의(含意)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세력경쟁이라는 요소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환율을 매개로 한 국가 간의 게임은 일단 경제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미중 간의 무역관계를 살펴보면, 작년 한 해 중국의 대미 무역흑자는 무려 1,620억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최근 5년간의 누적 흑자는 무려 5,560억 달러에 이른다. 이유야 어떠하든 대규모 무역수지 불균형이 계속된다는 것은 환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위완화가 달러화에 대해 저평가되어 있는 것이다. 미국의 對中 통상압력이 거세질 수밖에 없는 구도가 이미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위완화가 시장 가치보다 25-30% 정도 저평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회가 지난 2월 '상원 법안 295’라는 이름으로 향후 180일 동안 위완화의 재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미국으로 수입되는 중국 제품에 대해 27.5%의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논 저변에는 바로 그와 같은 수치상의 계산이 있었다. 미국의 요구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위완화 환율을 현실화시키고, 차제에 환율제도 자체도 유연하게 뜯어 고치라는 것이다. 중국의 금번 조치는 미국의 요구를 최소한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완화를 2%만 절상함으로써 충격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였고, 아울러 바스켓 변동환율제를 채택함으로써 초기 단계의 변동환율제를 도입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새로운 환율체제에서 위완화의 달러화에 대한 일일 변동 폭은 0.3%에 불과하고 다른 통화에 대해서는 1.5%의 변동을 용인하고 있다.
미국이 애초 내막적으로 요구했던 위완화의 인상 폭은 10-15%였다. 아울러 희망했던 환율시스템도 시장 평균 환율제에 가까운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금번 처방은 생색내는 정도의 수준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논리적으로 미국의 압력이 향후에도 지속될 것임을 예견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는 셈이다.
2. 미중 관계의 역사적 배경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제 와서야 중국에 대한 경제압력을 본격화하는 것일까? 바로 이 대목에서 전략적 판단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애초 미국과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정면으로 충돌한 이후 철천지원수로 지내왔다. 그러나 1970년대 초 획기적인 관계개선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것을 주도한 인물이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보좌관 그리고 중국의 주은래 수상이었다. 당시 미국의 입지는 월남전에서의 고전과 경제력의 약화로 상징된다. 소련의 팽창에 대응하며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반면 중국은 1969년 대규모 국경 무력충돌이 대변하듯 소련으로부터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외교적 조건이 마련되었던 셈이다. 당연한 결과로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시 발표된 상해코뮈니케는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에 대항하는 사실상 묵시적 동맹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미국과 중국이 처음으로 전략적 파트너가 된 것이다.
이후 1978년 등소평의 등장과 함께 중국이 경제적으로 개혁과 개방의 길을 걷게 되자 양국은 더욱 가까워지게 되는데, 개혁개방은 곧 중국이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가시적인 진척을 보인 것은 1992년 등소평의 '南巡講話’ 이후이다. 그때가 바로 초기 화교자본을 통해 자본주의를 시험한 중국이 본격적으로 서구에 손을 벋치기 시작한 시점이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대규모 자본이 중국에 투자되어 경제적 도약의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고도성장을 사실상 미국의 의도로 간주하는 이유가 여기서 발견된다.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향후 민주주의 국가로 변신할 중국을 견제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외교구도에 있었다. 1991년 말 소련이 소멸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의 소련에 대항하는 전략적 결합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외교구도의 변화 그리고 중국의 급성장이 초래한 잠재적 위협에 대한 우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중국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이 부각되었고, 이를 명시적으로 천명한 인물이 바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었다.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에 대한 견제는 군사와 경제 두 분야 모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최근 인도와의 밀착관계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듯 사실상 중국을 포위한 상태이고, 경제 분야에서도 중국 길들이기 행보는 보다 구체화되어 가고 있다. 지금 논하고 있는 위완화 절상압력에는 바로 이러한 큰 배경 그림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3. 미국의 대 세계 경제 전략
구체적으로 중국이 환율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은 전략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답변을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논점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금번 환율문제가 미국에 의해 촉발된 것임으로 미국 대외경제전략의 큰 흐름과 기본 구도가 우선 파악되어야 하고, 나아가 환율제도 자체가 지니는 정치 및 경제적 파급 효과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패권 장악에 나서기 시작한다. 국제경제관계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미국은 특히 국제통화체제의 지배에 집착했다. 여기서 패권의 핵심은 국제통화에 대한 미국의 발권력 확보였다. 즉 달러화 자체를 기축통화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다음의 행보는 패권의 수성이었다. 1960년대 월남전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값비싼 전쟁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미국의 경제력이 약화되고, 반면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가 급속히 회복되어 미국의 상대적인 약화가 두드러지자 서유럽이 미국의 경제패권에 도전한 전례가 있다. 애초 미국 달러화의 가치는 금 1온스당 35달러로 금과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전비 조달과 산업력 약화의 보전, 그리고 과도한 복지 예산의 확보를 위해 달러화를 남발하자 그것의 주요 수요국이었던 서유럽 국가들이 미국에 도전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가 앞장서서, 서유럽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모두 금으로 바꾸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미국의 대응은 단호했는데, 1971년 8월 당시 닉슨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달러화의 금태환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해버렸다. 나아가 같은 해 12월 달러화를 7.9% 평가 절하시켰고, 이어 1973년 2월 10%의 추가 절하 조치가 단행되었다. 즉 달러화의 가치 보존을 위한 미국의 의무를 일방적으로 벗어던져 버린 것이다.
서유럽은 대응책을 마련할 수 없었다. 만약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력 및 통화가치가 미국의 그것을 능가하였다면 서유럽의 통화는 달러화를 대신하여 기축통화로 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유럽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었다. 다음으로 일본의 약진으로 상징되는 1980년대 또 한 차례 큰 규모의 경제권력 행사가 있었는데, 이른바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가 그것이다. 1970년대부터 가시화된 일본의 약진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어마어마한 무역흑자를 바탕으로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미국의 2/3에 육박했던 것이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의 환율은 당시 1달러 대 260엔에서 3년 만에 120엔으로 급상승했고, 1995년에는 달러당 80엔까지 올라갔다. 일본경제에 대해 극약 처방이 내려진 셈이다. 한마디로 일본의 팽창에 대해 족쇄를 채워버린 것이다. 미국이 전례가 없는 조치를 주도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약 3년 후인 1988년경 일본경제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고, 일반 소비자들은 그 여파를 1990년대 초부터 체감하기 시작하며 이른바 일본의 장기 불황이 시작됐다. 현재까지도 일본은 긴 불황의 터널을 헤쳐 나오지 못하고 있다.
4. 미국의 위완화 절상 요구의 전략적 의미와 중국의 대안
이 두 가지의 커다란 사건을 통해 서구의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사실상 평정된 셈이다. 따라서 금번 중국에 처음 가해진 환율압력은 미국이 휘두르는 세 번째의 커다란 경제권력 행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잠재적이긴 하나, 이제 미국의 위상을 넘볼 수 있는 상대는 당연히 중국밖에 없고, 또한 중국은 그런 우려를 자아낼 만큼 폭발적인 팽창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미국이 중국에 가하는 환율압박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적 계산이 숨어있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권력행사의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발전전략은 사실상 한국의 그것을 모델로 하고 있다. 경제규모에서 차이가 날 뿐, 그 과정은 비슷하다. 외환분야도 예외는 아닌데, 금번 중국이 채택한 환율제도를 한국은 이미 1980년에 도입한 바 있다. 이어 미국으로부터 통상압력이 계속되자 1990년에는 시장기능이 대폭 반영된 시장평균환율제를 채택하였다. 그 후 외환위기가 급습하자 IMF의 권유에 의해 자유변동환율제가 반강제적으로 정착되었다. 전자의 경우 일일 환율변동 폭이 제한되었던 데 반해(최대 10%), 후자에서는 그 제한이 사라짐으로써 한국은 명실 공히 완전 변동환율제 국가가 되었다. 이 경우 환율의 조정은 정부의 시장개입, 즉 시장메커니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율제도의 변화가 국내경제의 국제화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996년 OECD 가입은 한국경제 국제화의 분수령이었다. 당시 자본의 자유화, 금융산업의 전면 개방 그리고 외환분야의 자유화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예는 금융과 외환분야가 구조적으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급속한 국제화의 파고를 넘지 못해 발생한 사건이 1997년의 외환위기였다.
현재 중국의 산업구조 및 금융제도를 보건데, 많은 경제 분석가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미국이 목표로 하고 있는 25-30%의 위완화 평가절상이나, 시장의 기능이 많이 반영된 변동환율제를 중국경제가 감내할 능력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은 지속될 것이다. 중국정부는 금번 조치를 취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압력에 의한 환율제도의 변경은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쥐도 새도 모르게 전격적으로 미국의 요구를 제한적이긴 하지만 수용했다. 과거 그 막강하던 일본과 서유럽이 피하지 못했던 미국의 압력에 중국 정도의 경제능력을 가진 국가가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향후 점진적으로 강도를 더해갈 미국의 요구를 중국 측이 수용하는 것은 시간과 절차의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도 우리와 비슷한 경제발전 수순을 밟고 있음으로, 한국의 외환분야 경험을 중국에 적용하는 데는 논리적으로 큰 무리가 없다. 경제 규모가 우리보다 큼으로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빠를 것이다. 한국의 예가 극명하게 보여주듯 국내경제의 자유화와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은 결국 한 국가의 경제가 세계자본주의 네트워크에 깊숙이 편입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네트워크의 주도권은 사실상 미국이 쥐고 있다. 따라서 향후 중국경제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경제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변화할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미국의 영향력 행사 범위가 그만큼 넓어지는 셈이다. 과거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사는 다양한 압박을 극복하는 방법이 획기적인 기술혁신 이외는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는 중국보다 한참 먼저 발전을 구가한 한국과 일본조차도 할 말이 없다.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양국이 공동으로 겪고 있는 경제발전의 한계가 원천 기술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 기술개발이지 이것만큼 어려운 사회적 과제는 없을 것이다. 기술발전은 단지 경제분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기술의 진보를 위해서는 기초 과학이 발전해야 하는데, 사회제도 전반에 대한 효율적인 정비가 없는 한 과학의 진흥은 불가능하다. 즉 효율적인 경쟁체제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의 정치적 함의가 민주화 및 자유화라는 사실은 더 이상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중국경제가 향후 겪어야 할 파고가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중국과 비교하여 사회규모도 작고, 따라서 높은 교육수준을 유지하며 잘 조직화된 한국과 일본이 대내외적 파고를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중국경제의 장래를 장밋빛으로 보는 시각에 분명한 경계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우리 모두가 곱씹어 보아야 할 중요한 논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김기수 /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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