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균형자론’ 비판과 실용주의적 국가전략의 모색

김영호 / 2005-04-21 / 조회: 5,350

1. '균형자’(均衡者)란 무엇인가? 


최근 노무현정부가 제시한 새로운 국가전략인 '동북아 균형자론’을 놓고 국내외적으로 논란이 뜨겁다. 이 전략의 실현가능성과 의도를 둘러싸고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또한 국가신용등급 평가기관 무디스사는 '동북아 균형자론’이 한미동맹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 전략의 추진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평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우리 경제인들과 기업인들은 이 문제가 한국경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나름대로 철저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어야 할 것이다.

국제정치현실은 국내정치와 달리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은 무정부상태이다. 무정부상태라고 해서 혼돈과 완전한 무질서의 상태는 아니다. 비록 중앙정부는 없지만 국가들은 약육강식의 정글의 세계에서 각자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국가들 사이의 '세력균형’(勢力均衡, balance of power)에 의존한다. 만약 국가들 사이의 힘의 균형이 유지되지 않고 어떤 한 국가가 너무 강해질 경우 다른 모든 국가들의 생존이 위협을 받을 수 있다. 과거 유럽에서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팽창정책을 통해 유럽 전역을 장악하려고 했을 때 여타의 국가들이 이들에 대항하는 세력균형정책을 폈던 것이다. 21세기에도 세력균형은 국제정치에서 국가들의 생존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국제정치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서구에서 등장한 'balance of power'라는 개념이 구한말 조선에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는 '균세’(均勢)로 번역되었다. '균세’라는 용어는 청나라에서 서양서 한역을 맡았던 윌리엄 마틴(William A. Martin)이 헨리 휘튼(Henry Wheaton)의 『국제법요강』(Elements of International Law)을 번역한 책 『만국공법』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구한말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이 쓴 『조선책략』에도 '균세’라는 용어가 발견되고 이 책을 통하여 조선에는 '균세’라는 말이 오늘날의 '세력균형’과 같은 의미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균세’라는 표현 대신에 일제시대에는 '세력균형’이라는 용어가 더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균형자’(均衡者)라는 말은 '균세’에 나온 말이다. '균’은 국가들 사이의 힘을 어느 한 국가로 치우침이 없이 평형하게 맞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형’은 저울대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균형자’는 저울대를 자유롭게 왔다갔다 하면서 저울대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하는 외교전략을 구사하는 국가를 말한다. 물론 균형자의 목적은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19세기 대영제국 전성기 때 영국의 외교정책이 '균형자론’이었다. 당시 영국은 유럽 대륙의 국가들과는 평시에는 동맹을 맺지 않는 고립주의 노선을 추구하면서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국가가 나와서 유럽의 평화가 위협을 받을 경우 여타 국가들 편에 서서 개입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회복시키는 균형자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균형자 전략은 정책 선택의 폭이 넓어야 하기 때문에 여타 국가들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상과 같은 '균형자’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기초하여 노무현정부가 제시한 '동북아 균형자론’은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는지 검토해 보고자 한다. 만약 이 전략이 비현실적이라고 한다면 21세기 새롭게 재편된 국제정치현실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대안적 국가전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의 문제점


1) '동북아 균형자론’은 잘못된 국력 평가에 기초한 허장성세(虛張聲勢)의 전략이다.


한반도는 단순히 강대국이 아니라 제국적 위상을 갖고 있는 국가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동네가 좋지 않다. 주변 국가들 모두가 어깨들이다. 그들이 어깨로 남아 있으면 다행이지만 과거 역사는 중국과 일본처럼 언제든지 조폭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구한말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살펴볼 때 한미동맹 때문에 그나마 한국은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고 생존을 유지하고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한미동맹 덕분에 한국전쟁 이후 한국이 엄청난 국력의 성장을 이룩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국력의 평가는 항상 상대적인 것이고 절대적 평가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동안 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성장한 것 이상으로 주변국가들의 국력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성장했다. 이러한 비교적 관점이 배제된 국력 평가에 기초한 국가전략은 비현실적이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동북아 지역 국가들에 대한 잘못된 국력 셈법에서 비롯된 허장성세의 전략에 불과하다. 앞서 지적한대로 균형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타 국가들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져야 한다. 한국은 여타 동북아 지역 국가들과 국력을 비교해 볼 때 이 지역에서 균형자가 될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군사력의 지표인 국방비를 보면 2005년 기준으로 미국 4100억달러 (2005년 이라크 전쟁 비용 1050억달러 제외한 액수), 일본 430억달러, 중국 300억달러(비공식 600억달러), 러시아 170억달러, 한국 150억달러, 북한 18억달러(비공식 50억달러)이다. 특히 미국의 국방비는 동북아의 여타 모든 국가의 국방비를 합친 액수보다 3배 많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 국방비의 50%를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국력 평가에 기초해 볼 때 노무현 정부가 주장하듯이 한국이 저울대를 왔다갔다 한다고 해서 저울의 균형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동북아 지역의 균형자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근간으로 하여 동북아 지역의 균형자로서 지역적 안정을 유지해 왔다. 또한 국제경제질서는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좌우되지만 그 시장을 보호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주먹’이 없을 경우에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 주먹은 바로 미국의 군사력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노무현 정부가 제시한 한국의 균형자론은 미국에게 '탈미자주화’(脫美自主化)노선으로 비칠 것이 분명하다. 노무현 정부의 균형자론은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한미동맹의 파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2) '동북아 균형자론’은 냉전적 사고틀을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노무현 정부 외교안보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통령의 발언이 최종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의 경우 외교안보와 관련된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익명을 전제로 한 정부 내부의 관리들이 대언론 브리핑을 하면서 상황에 따라서 말을 바꾸기도 하면서 대통령의 연설과 발언이 갖고 있는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 원래 좋지 않은 밑그림 위에 너무 덧칠을 많이 해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느 국가에서나 외교안보와 관련된 대통령의 발언은 사전에 내부 논의 과정을 거쳐서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문제점들을 충분히 고려한 뒤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번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결정자들은 언론과 전문가들의 비판에 직면해서 일관되게 자신들의 국가전략을 설명하지 못했다.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시하면서 노무현 정부는 한국이 더 이상 한미일로 구성된 '남방 3각의 틀’에 갖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북중러로 구성된 '북방 3각’의 국가들과 '남방 3각’의 국가들 사이의 관계가 악화될 경우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관계 악화를 한국이 막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한미동맹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자 노무현 정부는 한 걸음 물러섰다.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 균형자론’은 남방 3각과 북방 3각 사이에서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동북아에서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일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노무현 정부가 말하는 식의 '북방 3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북방 3각은 한국전쟁 직전 가장 완성된 형태로 등장한 적이 있다. 한국전쟁은 북중소 북방 3국 사이의 긴밀한 협조 하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중소분쟁과 공산권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한국전쟁 직전과 같은 견고한 북방 3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노태우 정부 하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된 '북방정책’으로 인하여 북방 3각은 한국의 대외정책 결정 과정에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실체적 존재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과 소련이 북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이라는 한국측의 입장을 지지한 것은 북방 3각이 더 이상 동북아 지역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가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시하면서 그 근거로 북방 3각의 존재를 거론하는 것은 냉전적 발상일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이고 견강부회(牽强附會) 식의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공식적인 동맹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견고한 '남방 3각동맹’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이 한미동맹 및 미일동맹을 근간으로 하여 그동안 한일 사이에 정책적 차이가 발생할 경우 중재자의 역할을 해왔다. 원래 미국의 동북아시아 전략은 일본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었다. 대소봉쇄전략을 구체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미국은 '5개 중심국가론’을 제시했고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전략적 동반자로서 일본을 선택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위기 이후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위협론이 구체화됨으로써 미국은 한미동맹 체결에 동의했던 것이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정책적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해 동맹의 틀은 때로는 무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은 한미동맹의 이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동북아 균형자론’은 '동북아 50년 장기간 평화’를 위협할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동북아 지역은 50년에 걸친 장기간 평화의 시대를 누려왔다. 20세기 후반 '동북아 50년 평화’의 시대는 이 지역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지극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한국전쟁으로 점철된 혼란의 와중에서 한반도와 동북아는 전쟁터가 되었다. 물론 한국전쟁 이후 계속된 분단 상황 때문에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상태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한반도의 불안정안 평화와 중국·대만 간 양안(兩岸) 문제 등 여러 가지 불안정 요인들이 상존하고 있지만 '동북아 50년 평화’의 시대는 북한을 제외하고 한국 뿐만 아니라 지역의 모든 국가들에게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이 시기에 한국, 일본, 대만은 정치적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했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한미동맹의 균열을 가져옴으로써 동북아 장기간 평화의 유지와 지속을 위협할 것이다. 한국의 국가전략은 50년 장기간 평화를 가능케 했던 요인들을 확대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짜여져야 할 것이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한반도 전쟁 억지 뿐만 아니라 동북아 장기간 평화의 근간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한미동맹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동북아 지역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미일동맹이 '동북아 50년 평화’의 초석이었다는 점에 일치된 견해를 갖고 미일동맹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이 미국에게 착 달라붙는 이유는 미국 편승정책이 일본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상해만국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경제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동북아 50년 평화 상태가 지속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최근 불거진 고구려사 왜곡 시도는 동북아 장기간 평화를 위협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중국의 국가이익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중국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동북아 장기간 평화의 수혜자로서 이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동북아 50년 평화’ 질서 하에서 유일한 낙오자는 북한이다. 북한은 기존 안보 구도를 타파시키기 위해 핵 개발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현상타파정책은 동북아 지역 국가들이 기존의 안보 구도를 유지 강화시켜 나가는 것이 자신들의 국가이익에 부합된다고 판단하는 한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동북아 지역의 장기간 평화를 파괴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대외적 조건을 이용해서 내부 개혁을 통해 생존과 번영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국제정치의 영역은 정책적 선택의 폭이 매우 제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국제정치현실을 무시하고 무한대의 선택이 가능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허세일 뿐이다. 한국의 국력 위상으로 볼 때 한국이 '동북아 균형자’가 된다는 것은 무리이다. 따라서 한국은 '동북아 50년 평화’를 가능케 한 요인들을 확대 강화시키면서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실용주의적 국가전략의 모색

21세기 세계는 세 개의 국가군(國家群)으로 재편되었다. 제1국가군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실현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미국, 유럽의 나토회원국,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미국 동맹국가들이 속한다. 제1국가군은 세계 인구의 17%에 불과하지만 세계경제의 약70%를 차지하고 있고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거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제2국가군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진력하고 있는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러시아, 중국 및 동구의 국가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미국 및 미국의 동맹국들과 경쟁관계에 있다. 이들은 대부분 국민소득 5,000달러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제2국가군은 미국이 창출한 국제경제질서에 편승해서 국익을 추구하고 있지만 미국과는 직접적인 군사동맹관계를 매고 있지 않다. 제3국가군은 테러와 대량살상무기 판매의 온상이 되고 있는 파탄국가와 불량국가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아프카니스탄, 소말리아, 루완다와 같이 자체적인 통치능력을 상실한 파탄국가들이다. 파탄국가는 폭력의 정당하고 효율적 행사의 독점체라는 막스 베버의 국가에 대한 정의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국가이다. 또한 북한과 같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불량국가들도 제3국가군에 속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전략은 냉전적 발상인 북방 삼각과 남방 삼각 구분에 따른 균형자론이 아니라 세 개 국가군의 구분에 기초한 차별화된 실용주의적 외교전략이다. 제1국가군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구축하고 협조체제를 강화하여 우리의 국가안보와 경제적 번영을 추구한다. 특히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적 번영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6.25전쟁 이후 동북아지역의 50년 장기간 평화에 기여한 한미동맹을 새로운 국제정세의 변화에 맞게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테러와 마약 수출 등을 통하여 국제질서를 위협하는 제3국가군에 대해서는 제1국가군들과 긴밀하게 협조해 나감으로써 우리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고 인류의 평화에 기여토록 해야 한다. 북한은 제3국가군에 속한다. 북한의 핵 보유와 뒤이은 지역적 핵 도미노 현상은 동북아 지역의 세력균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것이다. 북한에 의한 세력균형 파괴정책에 대해서는 철저한 대비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비현실적인 '동북아 균형자론’을 들고나오는 것은 한미동맹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미동맹은 한국전쟁 이후 계속되고 있는 '동북아 50년 장기간 평화’의 버팀목이었다.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동북아 균형자론’이 아니라 '장기간 평화의 시기’를 21세기에도 유지하기 위한 '한미안보공동선언’을 채택하는 것이다. 노무현정부는 더 이상 북한 눈치보기에 급급하고 남북정상회담에 집착하여 21세기 새로운 한미관계 정립을 위한 '한미안보공동선언’의 채택을 미루어서는 안된다. 한국의 국가전략은 공고한 한미동맹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이 선언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1세기 국제정치질서는 세 개의 국가군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미국이 중심이 되어 이들 국가들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처리해 나가는 양상을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그만큼 한미동맹은 한국이 세 개의 국가군들과 관련된 문제를 처리해 나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1992년부터 2001년까지 약34%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함으로써 잠재적인 도전국가들인 유럽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성장률을 기록함으로써 압도적 힘의 우위적 지위를 더욱 굳혔다. 2005회계연도 미국의 국방비는 4000억불을 넘어섰고 이 액수는 전세계 국가들의 국방비 총액의 50%에 육박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국방비는 2000년부터 매년 평균 7% 증가했다. 21세기에 들어서 미국은 국방비 증가 액수는 35%에 이른다. 또한 미국의 경제력은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2003년, 2004년, 2005년 각각 10조8천억달러, 11조 4천억달러, 12조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경제력은 전세계 국내총생산의 30%를 상회하는 것으로서 대영제국 전성기 영국의 26%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력에 힘입어 미국의 국방비는 국내총생산의 3.5% 이하를 유지하고 있다. 이 비율은 냉전 당시 미국의 국방비가 국내총생산의 7%였던 것과 비교해 보면 여전히 낮은 수치이다. 이러한 수치는 21세기에도 국력의 측면에서 미국의 힘의 우위가 지속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동북아 균형자론’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정부 주도의 21세기 국가전략의 모색이 뚜렷한 한계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미래지향적 국가전략을 모색하기 위한 초당파적 민간위원회의 구성이 절실한 때이다. 한국의 민간위원회는 미국에서 구성된 민간위원회와 함께 한미관계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한미 공동민간위원회를 상설화시킴으로써 한미관계가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21세기에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양국 사이의 초당파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제안에 대해 미국측은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미 미국은 클린턴행정부 시절 미국의 대북정책이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의해 표류하고 있을 때 윌리엄 페리 전국방장관을 중심으로 초당파적 위원회를 구성하여 미국의 대북정책을 조율한 바 있다. 한미 간의 초당파적 민간위원회의 구성은 21세기 새로운 한미관계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다.

'동북아 균형자론’과 같은 화려한 수사어를 구사하기보다는 때로는 굴욕을 감수하면서도 조용히 국력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국가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때이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부시의 푸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찰거머리처럼 미국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이유는 미일동맹이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요리 초보가 아무리 요리책을 보고 음식을 만들어도 어머니의 손맛을 따라갈 수 없다. 어머니의 손맛은 얄팍한 월급봉투의 한계 내에서 오랜 경험을 통해 전체 가족에 대한 헌신적 사랑에서 우러난다. 국가전략 역시 역사적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 국가안보를 국내정치용으로 이용하지 않고 국력의 한계 내에서 국익을 우선시하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깊은 애정이 국가전략의 요체가 되어야 한다.


김영호 /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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