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의 정치, 군사적 교훈

이춘근 / 2003-08-04 / 조회: 7,762


I. 전쟁의 시작과 끝


2003년 3월 20일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불과 3주일 만인 4월 9일, 미군이 바그다드를 함락함으로서 전쟁의 일차적 목표-후세인 정권의 제거- 를 달성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부시 대통령이 미 항공모함 아브라함 링컨호 함상에서 주요 군사작전(Major Combat Operation)의 종결을 선언한 5월 1일을 이라크 전쟁이 종결된 날로 간주한다. 5월 1일을 전쟁의 종결로 간주하는 것, 혹은 바그다드가 함락된 4월 9일을 전쟁의 종결로 간주하는 것은 실수가 아니라 편의상 그렇게 보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도 주요 군사작전이 종결되었다고 말했지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아직도 이라크에서는 전투가 진행 중이며 이라크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사실 역사상의 수많은 전쟁들이 그 전쟁이 시작되는 시점과 끝맺는 시점이 불분명 했다.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특정 전쟁의 시작과 끝을 밝히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전쟁의 경우 1953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시작과 끝이 분명한 전쟁이다. 그러나 수정주의 좌파 학자들은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보다 훨씬 이전에 ‘내란’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1950년 6월 25일을 전쟁의시작일로 삼으면 6.25는 북한의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이 명백해 지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전쟁이 시작 되었다고 말하면 침략 전쟁이라는 개념이 소멸 되어버린다.. 혁명 혹은 내란에 침략의 개념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서 10년 전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해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군과 이라크군 사이의 걸프전쟁은 1991년 1월 17일 시작되어 1991년 2월 28일 휴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91년 1월 17일 전쟁이 시작되었다면 이 전쟁을 일으킨, 소위 침략국은 미국과 연합국들이 된다. 그래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한 1990년 8월 1일을 걸프 전쟁의 기점으로 삼기도 한다.


전쟁이 언제 끝났는가의 문제는 전쟁이 언제 시작 되었냐의 문제보다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다. 전쟁의 시작은 모호 할 지라도 한편이 굴복할 경우 혹은 두 편이 서로 협의하는 경우 전쟁은 종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이라크 전쟁은 시작은 분명했지만 끝나는 시점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역사상 대단히 예외적인 전쟁이다. 이라크 전쟁의 시작은 2003년 3월 20일 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언제 끝날까 ?


II. 이라크 전쟁의 전략적 특수성


이라크 전쟁에서 채택되어진 미국의 전략은 전쟁사상 그 사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예외적인 것이었다. 전략이란 적국의 힘의 중심(Center of Gravity)을 정확히 인식하고 파괴하기 위한 술책이다. 근대 민족국가의 경우 힘의 중심은 그 나라의 군사력이며 군사력이 완전히 궤멸되지 않는 한 현대 국가는 전쟁에서 항복하지 않는다. 민족이란 이름 아래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진 군사력이 잔존하는 한 전쟁이 쉽게 끝날 수 없다. 그래서 유명한 전쟁 철학자인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란 적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일이며 이는 적의 군사력을 궤멸시킴으로서 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전략사상은 근대 민족국가들의 기초적인 전쟁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10년 전 걸프전쟁에서 이 같은 전략에 의거, 이라크의 군사력을 철저히 파괴하고 승리를 거둔 미국은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건재할 뿐 아니라 더욱 막강해 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이라크 및 다른 독재국가의 경우 그 나라의 “힘의 중심”은 그 나라의 군사력이 아니라 독재자 그 자신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이 부분의 논의는 본인이 작성한 CFE Opinion Lesders Digest No.03-11, 2003년 4 월 7일 을 참조) 새로운 전략론을 실제로 적용한 최초의 전쟁이 바로 이라크 전쟁인 것이다. 미국은 전쟁 초기부터 집요하게 후세인을 비롯한 이라크의 지휘부를 공격하였다. 전쟁 중 이라크 전역에 뿌려진 미국군의 삐라에는 ‘연합군의 전쟁 목표는 후세인 정권이니 이라크군은 연합군에게 저항하지 말 것’ 을 종종하고 있으며 ‘연합군에 대응하지 않는 이라크군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니 모두 탈영하여 집으로 돌아가라’고 쓰여 있다.


이 같은 새로운 전략이 성공했음은 분명하다. 후세인 정권은 정치적으로 궤멸 되었고 이라크 국민은 더 이상 후세인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다. 일반 군사력을 파괴하는 것보다 지휘부를 쫒아내는 일이 훨씬 쉬웠다. 그러나 새로운 군사전략은 그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다.


우선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채택한 전략은 전쟁의 공식적인 종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의 상대를 사담 후세인 과 이라크의 지휘부로 삼았고, 이라크 지휘부의 파멸을 전쟁의 목표로 했으니 이 전쟁의 승리는 항복 혹은 종전협상의 대상(당사자)을 확실하게 없애버림으로 달성되는 것 이다. 현재 이라크에는 미국에게 항복하거나 혹은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전쟁의 종식을 공식화 할 수 있는 법적, 정치적 실체가 없는 상황이다. 후세인이 정치적인 생명을 잃었다 해도 후세인이 아직 생물학적으로 건재하는 한 후세인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바트당 당원 및 수니족 일파 등 열정적인 후세인 추종자들은 미군에게 지속적으로 저항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미국은 전쟁에 승리하는 일 보다 이라크의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세인을 확실하게 제거하는데 성공하지 못한 결과 5월 1일 주요 작전 종결 선언 이후에도 작은 규모의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결국 7월 12일을 기점으로 후세인 정권의 잔당들에 대해 ‘아이비 독사 작전’ (Operation Ivy Serpent) 이라는 보다 공격적인 작전을 개시 했다.


7월 7일 토미 프랭크스(Tommy Franks) 대장의 뒤를 이어 이라크 주재 야전군 사령관직을 계승한 죤 아비자이드(John Abizaid) 장군은 이라크의 상황을 게릴라 형태의 전쟁이라고 말한 바 있었고 미 중부군사령부의 고위 장교는 미국이 테러리스트, 게릴라, 범죄자등에 포괄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공세 작전을 재개한 이후 이라크에는 低强度 紛爭(Low Intensity Conflict) 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저강도 분쟁이란 전쟁의 스펙트럼상 게릴라 전쟁보다는 치열성(intensity)이 높은 전쟁을 말한다. 미국은 약 4000-5000명 정도의 열렬한 후세인 추종자들을 작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III. 이라크 전쟁의 전황


최근 언론 보도들은 마치 미국이 월남전쟁과 같은 상황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보도하는 경향이 있다. 5월 1일 이후 이라크의 상황이 게릴라 전쟁이냐 아니냐의 논쟁이 있었지만 이라크는 월남과 戰場(Battle Field)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선 이라크는 사막 지형으로 게릴라 전쟁이 곤란한 곳이다. 게릴라전에 필수적인 은신처가 불량하다. 물론 도시 게릴라전을 시도 하겠지만 도시 게릴라전이야말로 미국이 지난 10년 동안 집중적으로 준비한 종류의 전쟁이기도 하다. 게릴라 전쟁이 성공하기 위한 기본조건 중 하나가 주민들의 광범한 지지가 있느냐의 여부인데 이라크 국민들이 후세인에 충성하던 일파들의 정권 재 장악 노력에 거의 동조 하고 있지 않은것이 현실이다. 7월 22일 후세인의 두 아들이 사살 된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해 총을 쏘며 기뻐하다 수 십 명이 죽고 부상당했다는 현실이 후세인 정권에 대한 이라크 시민의 마음인 것이다. 또한 두 아들이 살고 있던 빌라의 주인이 정보제공자였다고 알려졌다.


미국군이 매일 인명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으며 전사자 숫자가 1991년의걸프 전쟁 당시 수준을 넘었다고 말 해진다. 그러나 43일의 전쟁기간 중 마지막 100시간만이 육군 작전이었던 걸프전쟁과 애초부터 육군 작전 위주의 이라크 전쟁의 인명 피해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더구나 전쟁의 목표를 비교할 경우 이라크전쟁과 걸프전쟁은 규모가 같을 수 없는 전쟁이다. 걸프전쟁은 그 목표가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 군을 축출한다는 한정적인 것 이었는데 반해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 정권을 축출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할 때 까지 이라크를 점령한다는 대규모의 정치적 목표를 가진, 문자 그대로 大型 전쟁인 것이다. 아무리 소규모의 전쟁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막강한 나라라 할지라도 전쟁에서 아무런 인명 피해도 당하지 않을 수 는 없는 일이다. 단 한명의 생명이라도 귀중하지 않은 생명이 있을 수 없고, 현대는 전쟁터의 모습을 안방에서 지켜보게 된 시대라는 점에서 인명피해가 기대보다 높아지면 전쟁을 지지하던 여론이 바뀔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2001년 9월 11일 졸지에 3,000명 이상의 무고한 생명을 잃은 미국이 테러리즘을 종식시키기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의도 아래 시작한 전쟁이기 때문에 미국 국민이 테러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한 감내할 수 있는 전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목표가 이라크에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 한다는 것이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세속화된 이슬람 국가, 테러리즘을 지원하지 않는 친미 성향의 정부를 이라크에 수립하는데 그 목표가 있을 것이다. 현재 이라크 상황은 미국이 의도한 방향으로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진행되고 있다. 정확한 이라크 현황을 판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라크 전국의 도시 6곳을 5일 동안 방문한 미 국방차관 월포비츠는 7월 21일 여행을 마친 후 상황이 ‘기대했던 것 보다 양호하다’ 고 평가하였다. 우선 이라크 대부분이 평정을 되찾고 있다. 현재 미군에 대한 공격의 80% 이상이 바그다드-티크리트(후세인의 고향)-알 라마디를 연결하는 삼각형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 지역은 바트당의 본거지로서 각각 바그다드 북쪽 약 100Km, 서쪽 약 50여 Km 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다. 그 외의 지역에서 심각한 소요 및 게릴라적 공격은 별로 없다.


월포비츠는 이라크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이라크 국민의 빈곤상태라고 보고 있다. 현재 미국은 미군 주둔비 포함 월 40억불에 이르는 막대한 자금을 이라크에 투입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라크 사람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미국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이라크 인의 빈곤을 얼마나 덜어줄 수 있느냐의 여부에 미국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두고 있는지 모른다.


7월 12일부터 시작된 미국의 공세적 작전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7월 22일 후세인의 두 아들을 사살 했고 미국이 바그다드 장악 이후 체포하려던 후세인 정권의 핵심인물 55명중 38명이 생포되거나 사살 되었다.(7월 28일 현재). 7월 29일 이라크 현지를 방문한 미 합참의장 마이어스(Myers) 대장은 “후세인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 라고 말하고 있다. 후세인이 미군이 자신에 대한 추적을 중단한다면 미군에 대한 공격을 중단할 용의가 있다고 요청할 정도로 궁지에 이르렀다.



IV. 전쟁 원인에 대한 사후 논쟁과 미국의 전략변화


부시 대통령이 5월 1일 주요 전투작전(Major Combat Operation) 종결을 발표한 후 소규모의 전투작전(Minor Combat Operation) 이 지속되는 것은 군사 전략상 지극히 당연하다. 이라크의 새 정부가 들어설 때 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소규모의 군사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농후하다. 후세인이 집권하는 동안 이라크는 평온했다. 그러나 그러한 평온은 30만 명이 목숨을 잃으면서도 조직적으로 대항할 수 없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철권통치의 결과였을 뿐이다. 7월 22일 사실된 후세인의 장남 우다이는 자신의 신변을 외부에 알릴까 의심하여 자신의 경호원을 17명이나 죽였다 한다.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더불어 대량파괴무기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의 민주당 정치가들은 부시 행정부의 개전 원인을 비판하기 시작 했다. 미국이 전쟁을 개시하기 위해 일부 정보를 왜곡 했다는 것이 비판의 주요 내용이다. 물론 정보가 왜곡된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라크에 대량파괴무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10년전 걸프전쟁에 승리한 후 미군의 무기사찰 대원들은 대량파괴무기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강의 밑바닥을 뒤졌을 정도였다. 7월 24일 럼스펠드 장관은 “이라크가 대량파괴무기를 새로이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 때문이 아니라 9.11 이후의 새로운 맥락에서 볼 때 과거 이라크의 대량파괴 무기 개발 계획을 그냥 놔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을 단행 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어떤 전쟁이라도 두 가지 발발 원인이 있다. 바탕에 깔려 있는 보이지 않는 원인과 눈에 나타나 보이는 원인이 그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눈에 보이는 원인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다른 비유를 들자면 화재란 마른 장작과 같은 인화 물질의 존재와 성냥의 존재 두 가지 때문에 발생한다. 성냥불만 가지고 건물이 탈수는 없다. 불이 잘 붙는 장작의 존재가 있어야 큰불이 난다. 이라크에 대량 파괴 무기가 있느냐의 논쟁은 마치 성냥의 존재 여부에만 신경을 쓰는 것과 같다. 미국이 전쟁을 시작한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후세인 정권이 테러를 지원하는 정권이라는데 있다. 미국이 악의 축으로 선언한 세 나라 중 이라크에 대해 제일 먼저 작전을 개시한 이유는 이라크의 대량 파괴무기 개발 속도가 제일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테러를 지원하는 체제로서 후세인의 이라크정권이 제일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지만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배우고 있다. 우선 이라크 전쟁은 독재국가와 싸우는 경우 적의 군사력을 공격하는 것보다 적의 지도자를 공격하는 것( 즉 참수공격 decapitation attack) 의 효용성을 입증 했다. 다만 이라크 전쟁은 그 같은 공격은 보다 더 정확해야 하리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기왕이면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편이 더 유리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 대상국의 부랑자적 성격을 국제사회에 보다 더 널리 알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증명하기 위해 보다 구체적인 데이터의 수집과 제시가 필요하다고 느낄 것이다. 미국이 북한 문제에 대처하는 제반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이라크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놀라울 정도로 빨리 적용 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李春根(政博 자유기업원 국제문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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