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다자협상의 의미와 대응전략

홍관희 / 2003-06-18 / 조회: 5,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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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8
No. 10
 


  북핵 국제협상이 한·미·북·중·일 5자가 참여하는 다자회담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지난 4월 북한은 다자회담에서의 한국배제를 조건으로 내걸어 3자회담을 성사시킨 이후, 회담 이틀만에 전격적인 “핵보유” 발언으로 회담을 결렬시킨 바 있다. 이후 북한은 미·북 양자회담을 먼저 개최한 후 다자회담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등 전술적 변화를 시도했으나, 미국에 의하여 거부되어오고 있다. 한편 미국은 ‘先핵포기, 後대화재개’ 입장을 일관성있게 견지해왔으며, 종래의 미·북 양자회담 방식이 북핵 해결에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 다자간 대화를 통한 해결을 추진해왔다.

  한국정부는 북핵 불용,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한국의 적극적 역할 등 ‘북핵 문제 해결 3원칙’을 천명하였으나, 실제 정책수행 면에서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다자(多者)대화에서 한국을 배제시키려는 북한의 주장을 수용함으로써, 한반도 문제 당사자로서의 합당한 역할을 포기한 것이 큰 과오로 남아있다.

   북한핵을 주제로 열리게 되는 다자간(多者間) 협상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종래의 미·북 협상 틀로부터 다자간 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협상 형식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국제회의의 형식과 틀은 회의 결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또한 일단 정해진 국제회의의 룰과 관례는 다시 바꾸기도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국이 배제된 3자회담이 지속되지 않게 된 것이 다행으로 여겨져야 한다. 다자회담에의 한국의 참여는 한반도 평화와 안전 문제의 ‘당사자’로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당위적인 것이며, 한국의 참여여부는 한국의 국가이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미·북 양자협상의 배경


  1990년대초만 해도 북한 핵문제는 남북한, 미국, 그리고 UN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1991년말 남북간에 이루어진 ‘한반도비핵화선언’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1993년 북한이 NPT를 전격적으로 탈퇴하고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한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북핵 협상은 미·북간의 문제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그 이유는 북한의 집요한 미·북 직접대화 전략과 당시 국내문제에 몰두하여―개혁, 사정(司正) 등의 명분하에―외교문제에 소홀하게 된 한국정부의 불찰(不察) 때문이 아닌가 한다. 북한은 NPT탈퇴선언 이후 강경노선과 ‘벼랑끝 외교’ 끝에 1993년 6월 뉴욕에서 미·북 양자간 최초의 고위회담을 개최하는데 성공하였다.

   1993년 6월 미·북 양자간 뉴욕 고위회담에서 합의된 내용 중 긴장완화를 위한 노력, 상호 핵을 포함한 무력사용의 부인, 내정불간섭 등과 같은 평범한 사항 외에, 양국이 “상호평등과 공평한 조건으로 대화를 지속하기로(continue dialogue on an equal and unprejudiced basis)” 하였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북한 당국이 의미를 부여한 것은 바로 “상호평등과 공평한 조건”하에 미·북 양국간 대화가 지속되기로 합의되었다는 점인데, 북한은 이것을 북한이 미국과 동등한 협상 파트너로 격상되고, 남한은 단순한 관찰자로 격하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1994년 10월 미·북간 합의된 제네바핵합의는 이렇게 시작된 미·북 쌍무관계가 한층 심화되고 공식화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핵합의는 미국에 대한 북한 안보외교의 커다란 성과를 의미하였다. 북한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보장은 이미 1993년 6월의 공동발표(joint statement)에 나타난 바 있었고, 제네바 핵합의에서도 재확인되었다.

   제네바핵합의, 곧 북한 핵문제에 대한 미·북 합의로 인하여 핵문제는 “한국문제”로부터 “국제문제”로 전환되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 미·북간 쌍무문제화하였다. 이는 한국을 배제하고 미·북 직접외교를 추구해 온 북한의 외교적 성과를 의미하였다. 남북대화에 의한 긴장완화와 상호신뢰형성을 통해 북한의 핵개발을 포기케 하려는 남한의 정책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미·북 양자협상을 주장하는 북한의 전략


  북한은 1960년대 이래, 미·북 양측이 휴전협정 서명자로서 “실질적 당사자”이므로 미·북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핵문제 해결에 관한 북한의 미·북 양자협상 전략도 크게 보면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1974년까지만해도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남북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였던 북한이 남북 평화협정 대신 미·북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 전쟁의 교훈을 얻게 된 1974년 이후부터이다. 북한이 1975년 3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3차 회의에서 채택된 「미합중국 국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미·북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한 것이 그 출발이다. 이어 제30차 유엔총회(1975.9)에 제출한 각서를 통해 한국전쟁 및 정전협정의 “실질적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이므로 미·북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놀랍게도 21세기에 들어선 현시점에서도 북한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주목된다. 북한의 대남·대미전략이 결코 변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북한은 2002년 10월 “핵보유 시인” 발언으로 핵문제가 국제잇슈화하게 되자, 북핵포기의 전제조건으로 미·북간 의회비준 차원의 “불가침조약”을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는 바, 그 의도를 파악해 내는 것이 향후 효과적인 대북정책의 핵심이 될 것이다. 북한의 전략은 한마디로 미·북 불가침조약을 통해 미·북 단독 평화협정·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명분으로 주한미군의 위상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주한미군을 철수하도록 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상징적인 평화유지군(PKO)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북한이 의도하는 ‘체제보장’과 ‘불가침조약’의 내용이 단순히 북한정권에 대한 보장과 불가침을 넘어서서, 한반도전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전체를 대표하는 김정일체제와 미국과의 단독평화·단독강화를 상정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앞서서 언급하였거니와, 월맹과 미국의 담판으로 주월미군 철수로 이어지고 월남이 적화된 역사적 사례를 북한정권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3자회담에서의 북한의 남한배제 전략은 이러한 북한의 전략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적어도 북한이 남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그 대신 북한은 경추위 등 남한으로부터의 물적(物的)지원과 이산가족 회담 등 대남선전장에 활용될 수 있는 남북채널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북한은 “민족공조”론을 핵심으로, 민족대단결, 민족통일, 반외세, 반미 선전에 열중하고 있다. 아울러, 북한은 북핵문제의 국제화에 극력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는 무엇보다도 북핵문제가 국제화됨으로써, 국제사회의 보편적 도의(道義)에 기초한, 핵개발에 대한 비판 내지 제재가 힘을 얻게 되는 상황을 피하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미·북 양자협상의 문제점


  돌이켜 볼 때, 미·북 양자협상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한반도 문제의 주요 이해당사국인 한국이 배제된 채, 한국의 국가이익에 결정적으로 위배되는 사항들이 논의되거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협상 칩으로 활용하여, 이를테면 주한미군의 위상변화, 한·미 동맹관계의 근본적 변화, 미국의 대한반도정책 변화를 북한의 대남전략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미·북 양자협상 방식은 사실 한국으로서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북핵해결 방식이다.

   미·북 양자협상의 또 다른 문제점은 미국이 북핵을 저지하기 위하여 사용할 지렛대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북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따라서 북한에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외에도 많다. 예컨대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을 들 수 있다. 오히려 실제에 있어서―특히 경제적 효과에 있어서―중·일의 영향력은 미국을 능가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 국가들이 북한에 미치는 영향력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 어떠한 미·북 양자합의도 그 효과가 결국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 점이 부시행정부로 하여금 북한과의 단독협상 보다는 다자협상을 통해 중국, 일본 등을 움직여 북핵 저지를 위한 실효성있는 결과를 얻으려 시도하게 된 동기가 아닌가 판단된다.


다자협상의 의미와 성격


  정전협정 이후 한반도 문제에 대한 다자협상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시행되게 된 첫 사례는 4자회담일 것이다. 본래 4자회담은 북한의 정전협정 폐기와 미·북 단독평화협정 체결 기도에 대한 우리 측의 대응논리로서 제시된 것이다. 북한이 남한을 배제하고 한국전쟁 이후의 정전체제를 미·북간의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해 옴에 따라,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로서 남북한이 주체가 되고 주변 관련국가들의 협조와 국제적 보장 속에서 성립되도록 하는 2+2 형식의 4자체제를 한반도 평화체제의 기본구도로 설정하고 이를 북한에 제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4자회담은 1996년 4월 제안된 이후 남북간 신뢰회복과 긴장완화가 결여된 상태에서, 가시적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화된 상태이다. 4자회담은 한반도 안전과 평화 문제를 다루기 위한 주요 메카니즘으로 설정되었으면서도 핵문제는 다루어지지 못했다. 앞서 고찰한 바와 같이,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문제는 1994년 제네바핵합의에 의거, 미·북 쌍무협정의 주요한 에이젠다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4자회담이 남북한 주도적 역할과 주변강국의 국제적 보장 원칙을 규정한 것이었다면, 이번 다자협상 틀은 어떻게 북핵에 대한 국제적 연대와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결과적으로 북핵을 저지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확대 다자회담’이 갖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북핵 저지를 목표로 하는 국제적 공동연대의 형성이다. 국제적 연대의 중심에 미국이 있고, 따라서 한국은 미국과의 공동보조를 통해서만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 이번 ‘다자간 협상’이 갖는 중요한 성격이다. 한국이 문자 그대로의 ‘주도권’을 고집할 때 결코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고, 대신 실질적 주도 국가인 미국과의 공동보조를 취할 때, 실제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 동북아 국제질서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다자회담 틀의 고착화는 중·장기적으로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있어 국제적 영향력이 증대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협상에 참가하는 주변국 수(數)가 증대하는 만큼,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의 정도가 높아짐을 의미하며, 그만큼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해결 원칙이 줄어듦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한반도 통일에 부정적 인식을 가진 주변강국의 개입과 영향력 증대라는 선례를 남기는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한국의 대응전략


  다자회담을 앞두고 한반도 주변에 숨가쁜 외교교섭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취해 나가야 할 대응전략을 검토해본다.
  첫째, 다자회담 대책에 앞서 보다 근본적으로 입장 정리가 필요한 문제는 「북핵문제 해결 3원칙」중 ‘북핵 불용’과 ‘평화적 해결’의 두 원칙간 우선순위 결정에 관한 문제이다. ‘북핵 불용’과 ‘평화적 해결’ 두 원칙 사이에는 대화를 통한 방법으로 북핵을 포기시키지 못할 경우, 언제까지 대화만을 고집할 것인가 라는 풀 수 없는 딜렘마가 존재한다. 그동안 한국정부는 ‘평화적 해결’ 명분하에 ‘대화를 통한 해결’을 고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북핵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특히 한·미 불화를 초래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둘째, 현재 추진되고 있는 ‘북핵 불용과 남북관계 발전 병행전략’의 실효성에 관하여도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병행전략’보다는 북한의 핵포기 여하에 따라 대북지원 또는 경협규모를 결정하는 ‘연계전략’이 실효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다자회담에 응하지 않을 경우, 다자회담 개념을 중심으로 대북제재를 향한 국제적 연대와 공동전선이 형성되는 시점에서, 한국의 병행전략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불신과 비난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과도한 대북 물적지원이 핵개발 내지 군사력 강화에 이용되지 않도록 경제협력을 냉철하게 통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 그동안 논쟁의 화두가 되어 온 ‘남북 당사자 원칙’ 또는 ‘한국의 주도적 역할’에 관한 문제이다. 김대중정부하에서 미·북간 “중재자(仲裁者)” 역할을 자임(自任)했었던 것이 북한핵에 대한 한국의 역할을 제3자의 역할로 격하(格下)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한편으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북핵문제를 미·북 양자구도로 가도록 권하는 태도는 서로 모순될 뿐더러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주도자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북한핵의 직접 피해자이며 당사자(當事者)라는 인식을 확고히 해야 한다. 북한핵은 한국의 국가안보에 치명적 위협이므로, 북핵 회담에 한국이 당사자로서 반드시 참석해야 할 의무와 당위성이 있다. 한국이 제3자의 역할에 그치려 할 때, 이는 국가안보상 무책임한 태도일 뿐 아니라, 결코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도 없고, 오히려 미국과의 불화만을 초래할 뿐이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간 협상틀이 본격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의 시급한 대응방향은 1993년 이후 미·북 양자구도 속에서 상실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북핵 저지에 대한 확고한 원칙을 갖고, 한·미 동맹의 토대 위에 다가오는 다자협상에 필수적으로 참여하여, 우리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여야 할 것이다.


홍 관 희 (정치학박사/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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