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원자재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분산하려고 추진하는 핵심원자재법(CRMA)’이 미국에 이어 무역 장벽을 높이려는 법안으로 평가됐다. 다만 CRMA 초안에는 역외 기업 차별적 조항이나 투자 강제 조항 등이 없어 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보다는 압박이 덜하다는 반응이다. 국내 배터리 업계는 CRMA 적용까지 시간이 있는 만큼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걸림돌이 될만한 조항이 추가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계속되고 있다.
정부·경제계, 법안 공개 이후 긍정적 반응… “성장할 수 있는 계기”
EU 집행위원회는 16일 CRMA 초안을 발표했다. CRMA는 특정국에 대한 공급망 의존도 축소와 역내 투자 확대 등을 통한 EU 원자재 공급 안정성 확보를 목적으로 한다. 먼저 2030년까지 전략적 원자재 소비량 중 10%를 추출하고 최소 40%를 가공해 15%를 재활용하기로 했다. 또 코발트·구리·리튬·니켈·실리콘 등 전략적 원자재의 65% 이상을 제3국에 의존하지 않도록 했다. 전략적 중요성과 미래 수요와 생산량 확대 난이도를 기준으로 16개 전략 원자재를 선정했고, 이를 포함한 경제적 중요성과 공급성 등을 고려한 34개 핵심 원자재도 선정했다.
EU는 규정 이행을 위해 '유럽 핵심 원자재 이사회’를 구성해 핵심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원자재 전략 프로젝트’를 선정하고 해당 프로젝트에 인허가 우선순위 부여와 심사 기간 단축 등을 이행 지원하기로 했다. 아울러 공급망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핵심 원자재 모니터링 및 공급망별 스트레스 테스트 진행과 대기업 공급망 자체 감사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또한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해 회원국이 오염물질 수집·재활용 등을 위한 조치를 마련할 것을 규정하고 공급망 가치사슬 협력 강화를 위한 제3국 대상 전략 파트너십을 논의할 예정이다.
CRMA는 유럽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불리며 유럽 시장에 진출하는 우리 기업에 불안 요소로 지목돼왔다. 세계적으로 보호 무역 추세가 강화되고 있으며 EU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과 마찬가지로 공급망 안정화와 EU 내 산업 양성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국내 기업들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됐다.
CRMA 발표 이후 정부와 경제계는 우려를 표하면서도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IRA만큼 보호 무역 기조가 심하지 않고 국내 업계도 이를 계기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마냥 걸림돌이 되는 법안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아직 초안 단계이기 때문에 법안 시행까지 대처할 시간이 있는 것도 긍정적이다.
산업부는 “CRMA 초안은 미국 IRA와 달리 역외 기업에 대한 차별적인 조항이나 현지조달 요구 조건 등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며 “현재 발표된 법안은 EU 집행위 초안으로 향후 유럽의회 및 각료이사회 협의 등 입법 과정에 1,2년이 소요될 전망이므로 구체적인 대응 계획을 수립해 우리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기회요인은 극대화할 수 있도록 EU 당국과 지속적으로 협의해나갈 계획이다”고 밝혔다.
조빛나 무역협회 브뤼셀지부 지부장은 “해당 법안은 EU 차원에서 핵심 원자재를 공동으로 관리·확보하는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한 데에 그 의의가 있으며 우리 기업의 EU시장 진출과 협력 기회가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 기업의 EU 시장 진출과 협력 기회가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핵심원자재와 관련된 기업 정보공개 요구가 강화되고 장기적으로는 영구자석 재활용 비율 요건이 강화될 것으로 보여 기업들의 주의가 요구된다”며 “EU가 핵심 원자재 클럽 구성 등 우호국과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하는 만큼 우리 정부도 공급망 동맹에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IRA와 비교해 CRMA의 강도가 약하긴 하나 무역 장벽이 높아져서 좋을 것이 없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최승노 자유기업원 원장은 “CRMA의 강도가 약하다고 해도 수출 비중이 높은 우리 경제 구조상 주요 선진국의 무역 장벽이 높아지는 것은 안 좋은 신호다”며 “국내 기업 보호에 더해 정부 차원에서 자유무역의 필요성을 어필하고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핵심 광물 중국 의존·배터리 여권 대처 필요… 추가 조항도 관건
CRMA의 영향을 크게 받을 것으로 보이는 분야는 이차전지다. 이차전지는 전기차 등 높은 전력을 이용하는 곳에 사용되며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 중 하나로 꼽힌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발표한 '이차전지 핵심 광물 8대 품목의 공급망 분석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이차전지 제조에 필요한 광물 8대 품목 중 수입 1위국이 차지하는 비중 평균이 77.1%로 이차전지 시장 주요 경쟁 국가인 일본·중국·독일보다 높았다.
특히 △산화코발트·수산화 코발트 △황산망간·황산코발트 △산화리튬·수산화리튬 △천연흑연△이상화망간 △산화니켈·수산화니켈 등 5개 품목은 중국 의존도가 가장 높았다. 코발트와 니켈·천연흑연·망간은 EU가 선정한 16개 전략원자재 부문에 모두 포함된다.
키움증권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의 유럽 시장 점유율은 63% 수준에 이른다. 유럽은 중국에 이은 세계 2위 전기차 판매 시장이며 유럽 국가들이 탄소 배출량 감축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만큼 전기차 판매와 전기차 배터리 판매도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배터리 기업 입장에서는 유럽 시장 점유율 유지 및 확대를 위해 CRMA 대처가 매우 중요한 상황이다.
CRMA 대처와 관련해 업계 관계자들은 법안의 세부 내용이 공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유보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갑작스럽게 적용된 IRA에 비해 조금 더 낙관적인 시각이 강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CRMA는 역내 원자재 생산과 관련된 법안이고 우리가 재료를 직접 구하기보다는 EU에서 원자재 관련 산업을 키우고 배터리 업체가 계약을 맺는 형태가 될 것 같다”며 “다만 아직 초안이 나온 수준이기 때문에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CRMA 초안 공개과 함께 지난해 EU가 예고한 '배터리 여권’ 또한 언급되고 있다. EU는 5월 배터리 여권 최종안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되며 의무화 시점은 2026년으로 알려졌다.
배터리 여권은 배터리에 부착하는 라벨 및 QR코드로 생산·소비·폐기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과 내구성·용도변경 및 재활용 이력 등의 정보가 담긴다. EU는 이러한 배터리 여권을 부착한 제품만 거래되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배터리 여권제에 대비해 친환경 요소를 강화하고 이제 맞는 인증 체계를 맞출 것이 요구된다.
배터리 여권에 대해서도 배터리 업계는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 여권에 관한 대비는 전체적으로 잘 되고 있다”며 “아직 여유가 있는 만큼 잘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현재 초안에는 원자재 역내 생산과 환경 관련 문제만 거론됐으나 보호무역과 관련된 조항이 추가될 수 있으니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해외 시장에 집중하면서 국내 산업 기반이 부족해지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CRMA가 아직 세부 조항이 나오지 않은 채 기본 틀만 공개됐기 때문에 반응이 크지 않지만 결국 자국 우선주의 또는 보호무역 기조를 드러내는 것이다”며 “세부 조항이 나온다면 생산시설의 EU 내 이전도 포함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어 그는 “국내 기업들의 대처와 별개로 IRA처럼 국내 산업 공동화가 우려된다”며 “최근 논의되는 K칩스법처럼 전기차 배터리나 전기차 역시 기업들이 국내에 공장을 지을 유인책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양준규 스카이데일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