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야근 정당화 ‘인간 자유이용권’ 비판… 노동계, 전면 폐지 주장
고용노동부 포괄임금제 오남용 조사 나서… 폐지 추진 여부는 부정
전문가 “현실적으로 필요한 직종 있어… 확실한 자료 통해 추진해야”이전부터 장시간 노동의 원인으로 지목돼 온 포괄임금제가 윤석열정부의 노동개혁 추진과 함께 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노동계는 포괄임금제를 폐지하면 노동에 대한 보상과 노동시간 단축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은 무작정 폐지하기보다는 다각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고용노동부는 포괄임금제의 오남용 방지를 최우선 과제로 놓고, 폐지는 추진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 “문제는 오남용… 종합적 방지대책 마련하겠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12일 권고문을 발표해 산업·업무의 특수성과 근로자 선호의 다양성을 반영해 일하는 방식을 선택함에 있어 노사의 자율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부적인 방안으로는 연장근로 시간 관리 단위를 현행 1주에서 월·분기·반기 연 단위로 관리하는 것을 제시했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권고문은 윤석열정부 노동 개혁의 주요 과제 중 하나인 주52시간제 개편의 신호탄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괄임금제가 노동 개혁의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포괄임금제는 보통의 임금 산정 방식처럼 기본임금을 결정한 후 연장, 야간, 휴일근로가 발생했을 때 수당을 산정해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근로 시간을 따지지 않고 기본임금에 제수당을 포함하거나 일정액을 제수당으로 정해 매월 지급하는 방식의 임금제도다.
근로형태상 근로 시간과 휴게시간이 불규칙하거나 노동자가 재량을 가지고 근로 시간을 결정할 수 있어 근로 시간 측정이 곤란하거나 측정이 가능해도 연장·야간 근로 등이 포함된 경우 계산의 편의와 근무의욕 고취를 목적으로 일정액을 제수당으로 지급한다.
최근 자료인 고용노동부의 2020년 10월 포괄임금제 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전국 10인 이상 사업체의 37.7%가 법정 수당을 실제 근무 시간과 다른 방법으로 지급하고 있었다. 포괄임금제는 29.7%였으며 고정된 금액을 지급하는 고정 OT 약정이 8.0%였다. 이 중 노동 시간을 기록·관리하지 않는 비율은 9.0%였다.
그러나 일부 사업장에서 포괄임금제가 장기간 야근을 시켜도 추가 수당을 주지 않는 ‘인간 자유이용권’이 됐다는 비판이 있었고 윤석열정부가 주52시간제 개편을 추진함에 따라 포괄임금제 폐지 요구도 커졌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포괄임금제 계약 악용 단속에 나섰다. 고용노동부는 내년 1분기에 근로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업장에 대해 기획 감독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장시간 업무 관행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IT 업계를 중심으로 10~20개 사업장에 대해 감독을 실시할 예정이다.
다만 고용노동부는 포괄임금제 폐지까지는 추진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포괄임금제는 근로 시간 계산 편의와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활용되는 것으로 보이며 포괄임금제의 문제는 계약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를 오남용해 일한만큼 보상하지 않는 공짜 야근이다”며 “이번에 포괄임금 오남용에 대한 기획감독을 실시하고 영세기업의 임금·근로 시간 관리 어려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방지대책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양정열 고용노동부 근로감독정책단장 역시 19일 열린 설명회에서 “근로 시간 산정에서 불가피한 상황이 있어 판례에서 (포괄임금제를) 예외로 인정해왔다”며 “그 자체에 대해 금지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고 말한 바 있다.
노동계 포괄임금제 폐지 요구… 전문가 “더 구체적으로 다뤄야”
그러나 노동계에서는 포괄임금제 전면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 산하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은 입장문을 발표해 “노조가 있는 사업장의 경우 포괄임금제를 폐지하고 추가로 일한 시간에 대한 수당을 지급하게 되자 노사가 함께 노동시간을 줄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지만 여전히 포괄임금제를 폐지하지 않은 IT 산업의 대부분 사업장은 노동시간 측정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며 “이 때문에 52시간 상한제 시행 이후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스카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포괄임금제는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는 노동자 등에 대해 근무시간을 어림짐작해 수당을 지급하는 제도인데 산업 현장에서는 받는 것보다 더 많이 일하는 공짜 노동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괄임금제가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번 고용노동부 관리 감독으로 정부가 포괄임금제 공짜 노동의 심각성을 알고 폐지를 추진하면 좋겠지만 결론이 어떻게 나올 지 알 수 없으므로 일단은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포괄임금제를 실시 중이거나 포괄임금제를 경험한 현장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엇갈렸다. 포괄임금제가 일한 만큼 보상하는 것을 넘어 근로 시간 단축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과 근로 시간을 명확하게 측정하기 어려우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한 IT 업계 종사자는 “포괄임금제가 얼마 전에 폐지됐기 때문에 포괄임금제를 실시하는 회사와 실시하지 않는 회사를 겪어봤는데 포괄임금제 폐지 이전에는 근로 시간 자체를 집계하지 않았다”며 “근로 시간을 측정하지 않으니 회사에서도 고민 없이 야근을 시키고는 했다”고 말했다.
이어 “포괄임금제 폐지 이전에 몇 시간 일했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다들 근로 시간이 줄어든 것을 체감하고 있는 것 같다”며 “회사 입장에서도 근로 시간을 줄일만한 이유가 생기니 포괄임금제 폐지가 결과적으로 근로 시간 단축과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한 방송 업계 관계자는 “자료조사 업무와 같이 근로 시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업무를 할 때는 야근 수당을 받았는데 촬영에 들어갈 때는 근로 시간 측정이 쉽지 않을 때가 많아서 야근 수당을 받지 않았다”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야근 수당 챙겨줄 때가 더 일하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현재 포괄임금제에 문제는 있지만 실제로 이 제도가 근로자에게 유용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폐지를 외치기보다는 다각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포괄임금제와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자신들의 주장에 맞는 특정 사례만 집중해서 제시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포괄임금제가 악용되는 사례와 실제로 유용하게 기능하는 경우를 철저히 조사해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이와 관련된 자료가 부실한 상황이다”고 말했다. 또 “이번 관리감독을 시작으로 포괄임금제가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명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논의를 시작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버스기사나 경비, 방송 스태프 등 대기 시간이 긴 직종의 경우에는 대기 시간이나 휴게시간을 얼마나 근무 시간으로 볼지의 문제 등이 있기 때문에 포괄임금제를 이 시점에서 완전 폐지하기는 어렵다”며 “사무직이나 생산직 등 오남용 문제가 발생하는 업종에 대해서는 금지하되 특정 업종에 대해서는 유지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어 “물론 과로 문제라거나 휴게 여건 보장 등을 확실히 해서 근로자에게 과도한 피로가 쌓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승노 자유기업원 원장은 “현재 노동 개혁의 목적은 구시대적이고 경직된 노동 시간을 개혁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포괄임금제를 넘어 더 큰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며 “예를 들어 현재의 호봉제를 넘어 성과 중심 임금 제도로 개편한다면 포괄임금제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설명했다.
양준규 스카이데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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