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는 1996년 출간한 저서 '넥스트 소사이어티'에서 기업가정신이 가장 높은 나라로 단연 한국을 꼽았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연이어 겪고 폐허나 다름없었던 한 나라가 단기간에 반도체·자동차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 원동력을 기업가정신에서 찾았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경제는 기업가정신의 위기를 맞고 있다. 전 세계가 빠르게 4차 산업혁명으로 달려가는 상황에서 오히려 한국 사회의 반기업 정서와 정부·지방자치단체의 각종 규제가 미래 성장사업을 준비해야 하는 기업들의 도전정신을 위축시키고 있다.
이에 매일경제는 척박한 대지 위에 세계 초일류 기업을 세우고 국부(國富) 창출의 원천을 일군 '기업가정신'의 원류인 창업 1·2세대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21세기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SK는 세계 100대 기업이 될 것이다."
일생을 한국 경제의 발전사와 함께한 고(故) 최종현 SK 선대 회장이 1970년대부터 꿈꿔온 '21세기 일등국가론'은 그의 타계 20주기를 맞아 다시 조명받고 있다.
외환위기 국난 극복 노력이 한창이던 1998년. 최 회장은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병마와 싸우던 와중에도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며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집필 활동에 몰두했다.
그 결과물로 나온 게 그의 경영철학과 국가 경제 전반에 대한 생각을 집대성한 유고집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이었다.
그는 이 땅의 척박한 기업 풍토에서 자유주의 시장경제 기치를 내걸고 우리 경제와 기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최 회장은 유고집에서 "한국이 21세기 일등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국가 존립을 위한 최우선 과제를 '국가안보'에서 '경제 발전'으로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틀 속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한을 최대한 보호하는 한편 우선 경제적으로 잘사는 사회를 건설해나가는 데 기본 목표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SK가 무자원 산유국·정보기술(IT) 강국의 기반을 닦아 오늘날 재계 순위 3위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한 성공한 기업가로 꼽힌다. 하지만 최 회장은 SK그룹 경영에만 힘쓰지 않고 재계 목소리를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아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사업과 기술로 나라에 보답하고, 자원을 확보해 나라를 잘살게 만든다'는 그의 평소 소명처럼 기업의 본질인 이윤 추구와 사회적 책임 수행을 동시에 강조한 기업가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그가 국가경쟁력 강화 방안으로 제시한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도 그런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세계화에 대한 개념조차 생소했던 1990년대 초부터 세계 변화의 흐름이 민족주의에서 지역주의를 거쳐 세계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1993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후 1997년까지 회장직을 세 번 연임하며 창업 1세대와 2세대가 혼재한 재계 변혁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취임 직후부터 경제 5단체 공동으로 국가경쟁력 민간위원회를 발족해 '미스터(Mr.)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상대가 누구든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해 실물경제 이론에 해박했던 최 회장은 학자·관료들과 열띤 토론을 하며 시장경제 시스템과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세무조사 등 불이익을 겪으면서도 금리 인하, 규제 철폐, 쌀 시장 개방 같은 민감한 문제에 대한 고언도 서슴지 않았다. 최 회장은 또 전경련 회장 시절인 1993년 한국에도 자유주의 시장경제 이데올로기를 체계화하고, 확산시키는 핵심 연구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미국 대표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을 본떠 자유기업센터(현 자유기업원)를 발족시킨다. 자유기업센터는 애덤 스미스,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 자유주의 시장경제학파의 명저 발간을 주도하며 경제적 자유의 대중화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한편으로 최 회장은 '돈 버는 것만이 기업의 목적이 아니다'는 철학이 확고했던 기업인이었다. 국가나 사회가 갖고 있는 고충을 해결해 함께 발전하는 것을 기업과 기업인이 해결해야 할 진정한 책무로 본 것이다. "우리는 사회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기업의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었다"는 최 회장의 생각은 아들인 최태원 회장에게 이어져 '기업의 사회적 가치 추구'로 한 단계 진화 발전하게 됐다.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기업을 만들기 위한 필수조건일 뿐 아니라 기업이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본 것이다.
최 회장은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도 안되던 1970년대부터 인재 양성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1972년에 조림사업으로 장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해개발(현 SK임업)을 설립했으며, 1974년에는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세웠다. 평소 인간 중심의 경영을 강조한 최 회장은 "노사는 한솥밥을 먹는 한 식구"라는 지론을 펼치며 재계 안팎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재계 관계자는 "최종현 회장의 타계 20주기를 맞는 오늘날 우리나라는 세계 수출 6위, 국내총생산(GDP) 11위 등 경제강국으로 도약하고, SK는 포천 선정 글로벌 500대 기업 중 84위에 선정되는 등 최 회장이 꿈꾸던 21세기 일등국가에 한발 다가서고 있다"고 말했다.
[강두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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