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후 전세계를 풍미했던 탈(脫)냉전의 바람은 한반도의 냉전 체제를 녹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한반도의 냉전도 종식됐다고 착각해왔다. 그 결과 2001년 9월 11일의 대사건 이후 시작된 '새로운 전쟁의 시대'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북한의 핵 개발과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미국의 반테러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심각한 안보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고조된 반미 감정과 이에 대응한 미국의 주한 미군 재조정안은 우리나라 안보의 지렛대인 한'미 동맹 관계를 변질시키고 있다.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국가 안보가 국가 이익의 최우선 목표다. 국가 안보란 개인의 경우 생명과 같다. 국가 안보가 이뤄진 뒤라야 비로소 경제,복지,문화 등 여타의 목표가 추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1990년대 10년 동안 세계 각국의 국방비 부담률 평균(GDP 대비 3.8%)보다도 낮은 비율의 국방비를 지출했다.
금년만 해도 국방비는 총액 기준 6.5% 증가했지만 GDP 대비 2%대를 넘지 못한다. 우리와 안보 상황이 비슷한 이스라엘과 대만은 GDP 대비 5~9%의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다. 중국 러시아 미국의 국방비 지출 비율도 우리보다 높다. 일본의 경우 GDP 대비 비율은 우리보다 작지만 액수로는 우리의 약 4배에 달한다. 한국의 국방비는 1970~80년대의 장비를 유지하는 데도 어려운 수준이라 하며 육군의 경우 경상운영비가 대부분이고 전력 증강에 쓰이는 돈은 예산의 25%에도 미달한다.
지난 대선 때 주요 후보는 국방비를 GDP 대비 3% 선으로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국방비로 자주국방은 요원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동맹마저 변질된다면 진정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미군이 철수해도 '우리 힘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안보 현실을 무시한 이상론일 뿐이다. 거기에 북한이 핵무기까지 보유하게 된다면 우리는 북한의 위협에 고스란히 굴복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잠재적 위협까지 생각하면 우리의 군사력은 너무나 미약하다.
전략론은 전쟁에서 싸워 이길 수 있을 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하기보다 상대가 전쟁을 생각하지 못할 만큼의 군사력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다. 즉 '방위'보다는 '전쟁 억제'가 국가 전략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한'미 동맹을 통해 한반도에서 '전쟁 억제'라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해왔다. 그러나 최근 반미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 국방력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가?
현재 우리 육군 사단의 화력은 1950년대 미 육군 사단의 화력보다 약하다. 심지어 우리 1개 군단의 화력이 미군 1개 여단과 비슷한 것으로 평가될 지경이다. 이는 2002년 70만 한국군이 지출한 국방비가 118억달러였는데 같은 해 주한 미군 3만7000명의 군사비 지출이 106억달러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이제 우리는 국방정책을 새로 짜야 한다. 먼저 한'미 동맹 관계를 더욱 튼튼히 해야 한다. 군사강국들에 둘러싸인 우리나라가 역외(域外) 강대국인 미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국가생존전략의 정석(定石)이자 상식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우리의 국력에 걸맞은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 전쟁 억제를 위한 적정 규모의 군사력과 현대전을 수행할 수 있는 기술집약형 정보'과학군을 시급히 건설해야 한다. 그러나 정보'과학군은 단기간에 건설될 수 없다. 10년,20년을 내다보고 투자해야 원하는 시기에 필요한 군사력을 가질 수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군의 현대화와 전력 증강에 어려움이 없도록 적정 국방비를 확보해 주어야 한다. 국방비는 GDP 대비 몇 %라는 식의 계산에서가 아니라 국가안보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어야 마땅하다. 평화는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이춘근(자유기업원 국제문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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