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2003 경제판례 해부 ①] 관행에도 엄격한 '법의 잣대'

자유기업원 / 2004-02-12 / 조회: 12,042       중앙일보, E1면

[중앙일보 김시래. 염태정. 강병철 기자] 금속업체인 A사는 올해 인력수급 계획을 서둘러 바꿨다. 이 업체는 그간 일부 생산라인을 하청업체에 맡겨 왔다. 그런데 이 하청업체는 대부분 비정규직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결국 A사는 하청업체의 근로자를 쓰는 것으로 계약했지만 실제로는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현행 근로자파견법은 컴퓨터 전문가. 번역사 등 26개 직종에 한해서만 파견 근무를 인정하고 있다. 생산직은 파견근무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제조. 건설업체들이 그간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A사와 같은 방법을 써왔다. 이들은 '하청업체와 용역계약을 맺은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법원은 기업들의 이 같은 관행에 쐐기를 박았다.

서울고법은 지난해 "하청업체 소속의 비정규직 근로자를 썼더라도 2년 이상 계속 일했다면 실제로 이들을 쓴 원청업체가 정식 직원으로 승계해 채용해야 한다"는 요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런 판결이 나오자 A사는 올부터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중단한 것이다.

지난해 법원 판결을 분석한 결과 이처럼 기업의 경영 관행에 쐐기를 박아 사회적 책임을 엄격히 강조한 추세가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재계 "현실 외면" 논란도

본지가 법률정보회사인 로앤비 및 자유기업원 등과 함께 약 3백12만건으로 추정되는 지난해 민사. 특허 등 경제관련 판결 가운데 사회적 논란이 컸던 25건을 선정해 분석한 결과다.

법원은 특히 '시장자유 원칙을 침해한다'는 논란이 일부 있더라도 경영상 편법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자유기업원은 25건 중 절반에 가까운 12건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판례라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경실련의 위평량 경제정의연구소 국장(경제학 박사)은 "우리 현실에 비춰 볼 때 기업주. 경영진의 전횡을 막는 법원의 전향적 판결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유기업원측은 "법원이 기업 현실을 좀더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울지법은 지난해 7월 건자재업체인 B사의 대주주인 金모씨에게 주식 단기매매차익 8억9천7백만원을 회사에 반환하라고 판결했다. 金씨는 2000년 8월 한 투자전문회사가 자사를 적대적 인수. 합병(M&A)하려는 움직임을 알아채고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 31만여주를 급히 사들였다. 金씨는 당시 6명의 차명계좌를 통해 주식을 산 뒤 6개월 안에 자신의 계좌로 되파는 이른바 '가장(假裝)매매'를 했다. 金씨는 차명계좌에서 보유하던 주식을 실명계좌로 다시 판 것은 법률상 진정한 매매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6개월 이내에 주식을 매매한 증권거래법상 내부자 거래 케이스라고 판결했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은 현재 외국인 지분이 40%를 넘는다. 대주주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M&A에 대항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법원은 차명거래로 단기 매매차익을 남긴 점을 강조했다. 서울지법 김진오 판사는 "대주주나 임원은 내부정보 접근성에서 일반인보다 더 쉬워 그들의 부당행위를 막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노사 충돌땐 경영권에 무게

한편 법원은 경영권과 노동권이 충돌할 때에는 경영권을 충분히 보장해 주는 추세인 것으로 분석됐다. 대법원은 지난해 9월 "기업이 향후 적자로 경영상 어려움이 예상될 때도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재판요지에서 "정리해고 당시 회사의 자산이 부채보다 많고, 장부상 이익이 났다고는 하나 사업의 변화로 고용을 그대로 유지하면 장래에 적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회사 측 주장을 수용했다.

정리해고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 필요'를 폭넓게 인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법원은 이 경우에도 기업이 먼저 노동자를 충분히 배려하는 사전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정리해고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이번 분석 결과 젊은 판사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방법원일수록 기업의 책임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자유기업원 측은 분석했다. 25건 가운데 고법. 지법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 44%(11건)나 됐다는 것. 반면 상급법원인 대법원은 시장자유원칙을 존중하는 경향이 눈에 띄었다고 자유기업원은 설명했다.

김시래. 염태정. 강병철 기자 sr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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