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준 전 교육부총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강동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 최영도 전 국가인권위원장 등 최근 공직에서 잇따라 낙마한 고위 공직자들은 모두 시민단체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은 뒤 공직에서 물러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부가 임명한 고위 공직자들은 시민단체의 엄격한 사후검증을 그치는 게 현실 아닌 현실이 됐다.
이처럼 정부의 인사검증 시스템을 거친 고위 공직자들이 시민단체의 문제 제기로 잇따라 낙마하는 현상을 두고 시민단체의 검증 시스템이 정부 시스템보다 뛰어난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낙마 이후 청와대는 부총리 후보군을 먼저 언론을 통해 흘려 시민단체를 비롯한 여론의 검증을 떠보기까지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쟁자들이 상대방의 약점을 시민단체에 제보하고 있다는 설까지 파다하다.
시민단체들의 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경부고속철도 등 굵직굵직한 국책사업들이 시민단체의 문제 제기로 줄줄이 차질을 빚고 있다. 수조원의 혈세가 투입된 국책사업들이 개발보다는 환경을 강조하는 시민단체들의 높은 목소리에 발목이 잡히면서 우리 사회에 새로운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모 그룹 총수는 "고속철도 개통이 1년 지연되면 국가적으로 수조원의 국부를 상실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총수는 그 근거로 고속철도 개통을 전후한 서울 천안 부산 등지의 땅값 동향을 예로 들었다.
시민단체의 위상이 이렇게 높다 보니 정책결정 단계에서 시민단체의 의견을 수렴하는 게 주요 프로세스가 되고 있다. 재경부는 세제개편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시민단체 대표를 참여시켰고, 건교부도 임대주택 관련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시민단체 대표를 당연직으로 참여시켰다. 국정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에도 시민단체 대표들은 어김없이 참여했다. 정부가 각종 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시민단체 대표를 참여시키지 않으면 그 위원회의 정통성이 의심받을 정도다.
과천 경제부처의 한 국장급 간부는 "정책 입안단계부터 시민단체가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게 과천 경제부처의 요즘 현주소"라고 털어놨다. 이 간부는 "경제주체들 간의 이익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정책을 입안하는 데 있어서 국가 전체 이익보다는 자칫 소수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정치권과 정부뿐 아니라 민간기업들도 시민단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수년 전 소액주주 운동으로 시작된 시민단체의 민간기업 공세는 휴대폰요금 인하, 항공요금 인하 등으로 그 영향력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SKT, KTF 등 이동통신서비스업체들은 시민단체로부터 요금인하 압력을 받고 있다. 건설업체들은 분양가를 공개하라는 시민단체의 요구에 당혹해하고 있다.
건설업체 한 임원은 "주공이나 도시개발공사 등 정부 산하기관들의 분양가 공개 움직임이 민간 건설업체들로서는 엄청난 부담"이라며 "제조원가를 공개하라는 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며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최근 제주행 항공운임을 인상하면서 시민단체로부터 거센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불합리한 국내선 요금체계로 인해 제주노선에서만 연간 수백억원의 손실을 기록하고 있다. 제주시민단체협의회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담합으로 항공요금을 인상했다며 공정위의 조사를 촉구했다. 제주시민단체협의회의 이 같은 주장으로 인해 이미지가 생명인 항공사의 브랜드 가치는 적지 않게 훼손됐다.
모 항공사 관계자는 "정부의 규제 때문에 국제 유가가 올라도 항공요금을 인상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삼성SDI는 지난해 지속가능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자 '기업 책임을 위한 시민연대' '함께하는 시민행동' '한국여성민우회' 등 3개 시민단체는 삼성SDI의 보고서 내용이 불충분하다면서 보완할 것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회사 측에 보냈다. 공공기관이 아닌 민간회사가 발표한 보고서를 문제 삼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시민단체의 '간섭'에 기업들은 시민단체와의 스킨십을 강화하는 등 대처방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기아차는 최근 광주공장 채용비리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혁신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시민단체 대표를 참여시키려 했다. 삼성전자는 삼성카드 증자를 결정하면서 시민단체의 의견을 수렴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주주 가치를 저하시킨다는 시민단체의 뒷다리 걸기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후문이다.
국내 굴지의 한 자동차메이커는 지난해 신차발표회 행사를 하면서 장하성 전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운영위원장, 최열 환경운동연합 대표, 박원순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 등 유력 시민단체 대표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시민단체들과의 스킨십이 기업경영의 요인이라는 판단에서다. 몇몇 기업들은 숫제 시민단체 대표들을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참여정부 들어 기업들이 시민단체의 '눈치'를 보는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시민연대의 비판 앞에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시민단체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마당에 기업들도 시민단체를 '대우'하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시민사회단체 신년 하례식에서 "시민운동의 축적이 없었다면 저의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 조영황 국가인권위원장 등 시민단체에서 활동했던 명망가들이 노 대통령에 의해 요직에 등용됐다.
시민단체의 기업 견제는 투명성 제고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뒷다리 잡기라는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자유기업원 권혁철 법경제실장은 "소액주주 운동이 소액주주 권리 제고라는 긍정적인 요인이 있는 반면, 기업 경영에까지 간섭하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소버린과 SK의 경영권 분쟁에 참여연대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잘 살펴보라"고 꼬집었다.
이러다 보니 기업들은 시민단체들의 대안 없는 비판을 '보이지 않는 규제'로 느끼고 있으며 이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은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기업의 존재 목적은 이익 창출이지만 시민단체는 대의명분과 소수의 이익"이라며 "더 큰 성장이 있은 뒤 분배의 몫도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임원은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문제 제기에는 귀를 열 수 있으나 특정 소수의 이익만을 문제 삼는 시민단체 운동은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성홍 대기업전문기자(shk@heraldm.com)
실례로 본 이익단체 압력(?)
"1억원만 협찬…" 공문에
기업 이러지도 저러지도
1.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 본 협회에서 ○월 ○일부터 ○○이벤트를 개최하오니 귀사의 협조를 요청합니다.
3. 협찬금액 1억원 계좌번호=○○은행 **********
삼성전자는 이 같은 공문을 일주일에 3~4건씩은 받는다. 협찬금액은 보통 5000만원에서 1억원이 가장 많다. 2억~3억원을 요구하는 공문도 적지 않다. 이런 공문을 받으면 일일이 협찬이 불가한 이유를 적어 다시 되돌려 보낸다.
"지난해 순이익이 10조원 이상 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에는 이 같은 협조 요청이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회공헌 차원에서 학술적인 지원이나 정말로 소외된 지역사회에 대한 후원, 이공계 발전 등을 제외하곤 요청을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각종 협회 등의 찬조 요청 공문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며 이같이 답했다. 최근 협찬을 요청한 협회 등을 보면 무술단체, 지역단체, '사이비' 시민단체 등 삼성전자와는 어떠한 연관도 찾아볼 수 없는 곳들이다.
비단 삼성전자만의 사례는 아니다. 타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협찬 불가의 공문을 보내면, "많이 컸네. 돈 좀 번다고 우릴 무시해. 돈 벌게 해준 게 누군데…"라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처럼 몰려드는 협찬 요청은 기업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GS홀딩스 김성규 상무는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은 주주에게 배당되고, 근로자에게 임금으로 지급되고, 세금으로 나가고, 창조적인 생산활동에 재투자되는 것이 선순환적인 구조"라면서 "국세, 지방세 등 세금을 내는 것으로 기업이 기본적인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경련 양금승 팀장은 "기업은 각종 부담금 명목의 준조세 때문으로도 허리가 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외에도 성금, 찬조금, 기부금, 지역발전기금, 산학협동기금 등 갖가지 명목으로 기업에 손을 벌리는 사례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우인호 기자(ino@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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