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2005년 문화예술결산, 학술

자유기업원 / 2005-12-15 / 조회: 8,183       연합뉴스 , @

단어가 지칭하는 정치적 의미를 떠나 학계는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가장 '진보적'인 곳이다.
'상아탑'이라는 이미지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듯이, 학자들은 사회에서 활발히 개진되는 의견들과 다양한 현상을 종합해 상당 기간의 연구ㆍ검증을 통해 결과물을 내놓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론'이라는 무기를 근거로 한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앞장서 제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2005년 학계에서도 새로운 해석과 통설에 대한 반박으로 이름을 날렸던 학자들이 있었고, 꾸준한 천착으로 오랜 산고(産苦)를 거쳐 한 편의 연구결과를 내놓은 학자도 있었다.
올 한해 인문ㆍ사회과학계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뚜렷한 논쟁이나 두드러진 현상으로 시끄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기존의 주류 역사담론에 대항하는 소위 탈민족주의적인 담론들의 지속적인 발언과,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불러일으킨 생명윤리에 대한 성찰이 일군의 사회운동가와 철학자들로부터 흘러나왔다. 또한 현 정부를 지탱하고 있는 진보 담론에 맞서 등장한 뉴라이트(New Right) 계열 학자들이 운신의 폭을 넓혀갔던 시기로 볼 수 있다.

▲다양한 탈민족주의 담론

올해는 기존의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주류 역사담론에 대항하는 탈민족주의 담론이 지속적으로 발언권을 확대해 나갔다.
국내 학자는 아니지만, 세계사학사(史學史)학회장이자 역사이론 분야의 석학으로 꼽히는 조지 이거스 뉴욕주립대 명예교수는 6월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주최한 초청강연에서 '민족국가 패러다임'이 이전에 존재한 적 없는 민족을 창안하고 정당화하는 데 사용됐다고 비판했다. 특히 아시아의 역사가들이 민족의식을 아주 먼 과거에까지 투사하며 민족을 창안해 민족해방 투쟁을 벌였다고 주장한 그는 역사의 '정치적 도구화'를 우려했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논쟁적 저서로 유명한 '국사해체론자' 임지현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곳이다.
또한 이영훈 서울대 교수 등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의 입장에 선 낙성대경제연구소 출신의 일군의 경제사학자들이 실증적 경제사방법론을 토대로 조선후기 이후 오늘날에 이르는 한국 경제의 전개과정을 다룬 '새로운 한국경제발전사'(나남)라는 책을 내놨다.
이대근 성균관대 명예 교수는 발간사에서 "한국사회는 자기 역사를 쓸데없이 미화하고 국민에게 허황된 자부심을 갖게 한다"며 "자기방어를 위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역사의 객관적 사실에 눈을 멀게하고, 자기도취적 역사관에 빠져들게 한다"며 민족주의적 주류 담론을 비판했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방대하게 축적된 통계 자료를 분석, 기존의 자본주의 맹아론, 식민지수탈론, 내재적발전론 등 학계의 기존 입장을 실증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입장은 민족주의 계열 학자들에 의해 일제가 작성한 통계가 의미하는 바는 일본 자본주의의 확대일 뿐, 조선의 경제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비판받는다. 대표적으로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의 경우 이들을 "수치와 통계의 마력에 심취해 있다"고 비판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가운데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은 비단 낙성대경제연구소 출신의 경제사학자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저변을 확대해가고 있다.
386세대를 비롯한 이른바 진보 세력이 5월 광주의 '상업화'에 기대 권력화했다며 '5월의 지식권력'이라고 명명한 사회학자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한국학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성격을 띨 때 학문의 보편성과 객관성이 약화될 수 있다며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 유교자본주의론 등을 민족주의적 한국학의 잘못된 사례로 들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기도 했다.
이런 '민족주의 경계령'은 세종대 박유하 교수(일문학)의 논쟁적 저서 '화해를 위해서'(뿌리와이파리)에서도 두드러졌다.
"일본의 민족주의는 비난하면서도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눈 감거나 보지 못하는 구조"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는 그는 일본의 후소샤 역사교과서와 공민교과서가 지향하는 '전통, 긍지, 공공성, 애국심'이 한국의 민족주의 교육이 한결같이 강조해온 덕목과 상통한다며, 일본의 극우와 한국의 민족주의가 닮아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사 청산

과거사 청산 문제 역시 학계의 주요 화두 중 하나였다.
학계의 관심은 과거사 청산 중에서도 특히 일제시대의 친일 행위에 대한 청산 문제에 쏠렸다. 이 문제에서도 역시 민족주의 계열과 탈민족주의 계열이 갈라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민족주의 역사학 계열의 학자들이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조사와 청산이라는 입장에서 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 움직임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을 보였던 반면, 후자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또한 보수층과 더불어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 역시 청산보다는 '화해와 포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논란 속에서도 학계 일부, 정부ㆍ정치권을 위시한 과거사 청산 움직임은 본격화됐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8월 친일인사 명단 3천690명을 발표했고,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12월1일 정식 출범해 본격적 활동에 들어갔다. 송기인 신부가 이끄는 위원회에 학계 인사로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가 참여하고 있다.

▲뉴라이트

이영훈 서울대 교수, 박효종 서울대 교수, 정갑영 연세대 교수 등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은 노무현 정권의 "실정"과 "아마추어리즘"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며 올 한해 활발히 활동을 전개했다.
'새로운 보수'라는 기치 아래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등 한 해 동안 여러 자리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높여온 이들은 최근 나남출판사와 자유기업원 공동기획으로 '21세기 한국:자유 진보 그리고 번영의 길'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들은 "한풀이 정치의 범주를 한 발자국도 넘지 못하는" 진보세력에 대한 거친 비판과 더불어, 단절과 청산 대신 '화해와 포용'의 정치를 촉구하고 보수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인기보다 '신뢰'를 얻을 것을 주문하며 보수친화적인 철학과 비전을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 '생명윤리' 논쟁 없이 공허한 울림만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연구원의 난자제공 사실이 밝혀지고, 일부 의혹 제기로 심각한 난관에 처했으나 이로 인해 깊이 있는 생명윤리 논쟁이 촉발되지는 않았다.
'윤리의 신천지'라 할 수 있는 생명공학의 최첨단을 달리는 우리 나라에서 이를 성찰하고 인류의 미래를 모색하는 담론의 울림은 공허했다.
격월간 녹색평론(발행인 김종철)과 계간 환경과생명(편집주간 장성익) 등이 몇몇 철학자들과 환경주의자들의 우려 섞인 경고와 윤리적 성찰을 촉구하는 글을 게재한 것을 제외하면, 본격적인 생명윤리 논쟁은 없었고 이들은 심지어 "잘 나가는 황우석 교수에게 딴지를 거는 세력"이라는 원색적 비난까지도 감수해야했다.
MBC PD수첩이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가 '가짜'일지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나서 온 사회가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와중에, 최근에는 생태철학의 거장 한스 요나스의 '기술 의학 윤리'가 번역돼 나오기도 했다.
한스 요나스는 독일 출신의 생태철학자로 1955-76년 뉴욕 프랑크푸르트사회연 구소에서 활동하며, 유전공학 기술이 가지고 있는 가공할 권력과 그에 합당한 책임의 문제를 철학적 사유에 올려놓은 최초의 인물. 황 교수의 표현처럼 "생명공학이라는 이름의 눈 덮인 들판"에서 일어나는 단 한번의 실족이 인류 전체를 종말로 이끌 가능성은 없는지 되돌아봐야한다는 번역자 이유택 계명대 교수의 말을 주목할 만하다.

김용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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