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한국의 '反시장病' 고치려면

자유기업원 / 2006-02-08 / 조회: 8,110       조선일보, A30

역대 99번째 미(美) 대법관이었던 루이스 파월(1907~1998)은 한 편의 글로 미국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대법원 판결문 얘기가 아니다. 대법관이 되기 1년 전인 1971년, 기업 변호사였던 파월은 미 상공회의소 간부에게 5000자 분량의 보고서를 보냈다. 훗날 ‘파월 메모’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글은 “좌파 지식인들이 ‘시장경제는 부자들만 살찌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빈곤하게 만든다’는 왜곡된 논리로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파월은 좌파 선전기구에 맞서 싸울 시장(市場) 전도사의 양성을 촉구했다. “시장경제의 경쟁원리만이 미국의 번영을 이끌 수 있다”고 설명할 이론가를 키워 사회 각 분야로 진출시켜야 한다는 거였다. ‘파월 메모’는 적당히 좌파 비위를 맞추며 지내려 했던 미 경제계를 각성시켰다. 기업인들이 내놓은 기부금으로 헤리티지 재단, 맨해튼 연구소, 카토 연구소 같은 보수 우파 싱크 탱크들이 설립됐다. 이렇게 뿌려진 씨앗이 1980년대 이후 미국 우파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파월 메모’가 진단한 1970년대 미국의 반(反)시장 질환은 30년 후 한국에서 재발하고 있다. 빈부 격차도 시장 탓, 부동산 값 급등도 시장 탓, 만사 일이 꼬이면 시장이 책임을 뒤집어쓴다.

시장은 입력한 대로 결과를 내놓는다. 잘 쓰면 약, 잘못 쓰면 독이 되는 ‘정직한’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시장에 덧셈을 입력해 놓고 “뺄셈 답을 내놓으라”며 국세청, 검찰을 동원해 윽박지르고, 그래도 원하는 답이 안 나오면 시장에 허수아비 옷을 입혀 화형식을 벌이는 게 요즘의 대한민국이다. 악당과 ‘정의의 전쟁’을 벌인다며 풍차를 향해 돌진했다는 돈키호테의 모습이다.

이코노미스트지(誌) 발행 ‘2006년 세계’를 펼치면 각국의 올해 운세가 나온다. 일본은 ‘개혁’이 본궤도에 올라 팔자가 풀리기 시작하지만, 독일과 프랑스는 ‘개혁’에 대한 확신이 없어 신수가 불투명하다는 식이다. 여기서 개혁의 정의는 ‘시장 원리에 맞는 국정 운영’이다. 21세기 세상에선 어디서나 이 뜻으로 통한다. 정부가 몸집을 키워 시장 기능을 대신 맡겠다면서 거기에 개혁 딱지를 붙이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35년 전 파월 변호사는 “미국 젊은이들은 왜 시장체제에 불만일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원인을 캐 보니 간단했다. “그렇게 듣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TV를 켜도, 서점에 가도, 대학가를 둘러봐도 “시장과 투쟁하라”는 구호만 들리더란 것이다.

오늘 한국 땅에서 시장이 ‘악의 축’으로 몰리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같은 병에 걸렸으니 치료법도 ‘파월 메모’에서 배울 수밖에 없다. 시장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전도사들이 TV 토론에 나서고, 대학 강단에 서고, 책을 써야 한다.

“어느 세월에…”라고 낙담할 필요 없다. 여기저기서 이미 봉오리가 터지고 있다. 자유기업원이 대학별로 개설하는 시장경제 강좌는 시작 3년 만에 8개 대학 800명에서 23개대 2500명가량으로 참가자가 급증했다. 김정호 원장은 “시장원리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스타급 강사도 함께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자유주의 연대 신지호 대표는 “1년 동안 뉴라이트 운동을 하면서 ‘선수’들이 좀 생겼다. 선수가 선수를 만드는 세포분열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이 정권의 좌파 자학(自虐)사관 바이블인 ‘해방전후사 인식’에 도전장을 낸 ‘해방전후사 재(再)인식’은 집필진이 20명을 넘는다.

한 나라의 장래는 국민 머릿속에서 결정된다. “시장의 경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생각과 “정부가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의 갈림에서 지난 세기 세계 각국의 흥망(興亡)이 나뉘었다. 대한민국은 다시 그 갈림길에 서 있다.

김창균 논설위원 ck-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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