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2-7. 정책지식과 지식인

자유기업원 / 2007-06-12 / 조회: 5,844       경향신문, 7면
“이박사님, 이번에 ‘마사지’ 많이 당하지 않았습니까?” “김박사는 이번에 ‘몇 킬로그램’ 했습니까?” 국책연구기관 연구원들 사이에는 종종 이런 농담이 오간다. ‘마사지’는 보고서에 ‘민감한’ 내용이 있을 때 연구용역 주문자(정부)의 입맛에 맞게 보고서 내용을 다듬는 것을 뜻한다. ‘몇 킬로그램’이란 보고서의 무게다. 발간 보고서 수가 고과나 연봉 협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양적인 면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대화는 국책연구기관에 소속된 정책지식 생산 지식인들이 처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은 정권이 바뀌거나, 원장이 새로 올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연구 자율성이 요동을 치기 때문이다. 원장의 전공이 무엇이냐에 따라 보고서를 많이 낼 수 있는 전공자도 생기고 보고서를 외면당할 다른 전공자도 생긴다. 한 국책연구원 소속 연구원의 말이다.

“알다시피 저희 연구원은 재정적으로 특정 행정부처에 거의 의존하고 있어요. 친정부적일 수밖에 없죠. 원장, 부원장, 교육실장 등은 부처에 상시적으로 인사를 다녀요. 영업 나간다고도 하죠. 우리가 정부 하수인이라고요? 하수인이 아니라 ‘동체(同體)’죠.”

정권 교체에도 민감하다. 특히 외교안보 관련 연구기관 소속 연구원들은 어떤 정권 하에 있느냐에 따라 연구 주제 자체가 180도 달라진다. 매우 보수적인 성향의 통일연구원 홍관희 박사는 지난 2005년 7월 “정부가 편향된 연구만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는 더 이상 자유로운 연구 활동을 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직했다.

외환위기 이후 23개 국책연구기관들이 총리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산하에 들어가면서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의 외형적인 운영 체제에 큰 변화가 생긴 듯했다. 그러나 연구기관들의 부처 종속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일선 연구원들의 느낌이다.

허영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연구원들이 용역을 받아올 수 있는 곳은 기존에 속해있던 정부 부처”라며 “옛날에 종속돼 있던 관계가 그대로 유지된 채 총리실 등의 통제를 받으니 통제기관 수만 늘었고, 연구 자율성은 훨씬 저해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은 연구 자율성에 대한 고민 외에도 많은 보고서를 생산해내야 하는 스트레스도 있다. 같은 기관 안에서도 그 대우는 천차만별이다. 이들의 보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은 보고서의 질보다는 ‘발간되는’ 보고서를 얼마나 많이 작성하느냐와 연구 용역을 얼마나 따오느냐다. 발간된 보고서만 인사 고과에 반영되므로 발간에 문제가 없도록 알아서 윗분들의 성향에 맞춰 ‘마사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선 연구원들에 따르면 대략 기본과제 한 편을 혼자서 수행했다면 100점을 받는다. 1억원짜리 용역을 따오면 100점, 3억원짜리 용역을 따오면 300점 하는 식이다. 동일한 호봉이라도 용역 수주 수준에 따라 연봉은 40~45%까지 차이가 난다는 것이 한국개발연구원(KDI) 관계자의 설명이다.

국가 주도 경제개발의 핵심 브레인으로 70년대 초반 이후 속속 설립된 국책연구기관들의 시대적 효능은 이미 끝났다는 진단을 받고 있다. 연구 자율성이 없는 태생적 제약 때문에 자유로운 연구를 원하는 연구원들은 기회만 있으면 대학 교수직으로 옮기려고 한다. KDI 한 연구원의 말이다.

“예전에는 서울의 주요 대학이 아니면, 자리가 나도 안가던 때가 있었죠. 요즘에는 지방의 대학이라도 교수 자리가 날 때마다 지원한 경험들이 있다고 해요. 이곳의 평균 근속연수가 10년이 채 안돼요. 다들 기회만 있으면 떠나려고 하죠.”

연구 자율성 결여 지적에 대한 반박도 있다. 시장 지상주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밀어붙이는 정부 하에서 많은 연구원들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KDI 국제정책대학원의 한 교수는 “KDI는 연구원들의 개인 생각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인적 구성 자체가 ‘시카고 보이스’(미국에서 주류경제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아온 사람들)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경제 관련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들 사이에는 ‘서울대 마피아’ ‘시카고 마피아’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경제 관련 한 국책연구원 소속 연구원의 말이다.

“얼마 전 나를 안좋아하던 고참한테 치욕적인 비판을 들었어요. ‘너는 이래저래 경쟁력이 없어. 미국에서 학위를 받지도 않았고, 계량적 연구를 안하고 질적 연구를 하는 것도 그래’라고요.”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에 미국에서 주류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KDI 연구원들 내에서도 성골, 진골, 6두품으로 나뉜다. 정치권에 있는 한 KDI 출신자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온 사람들은 성골,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출신은 미국 박사를 받아와도 진골에 머무르고 그 외는 모두 6두품으로 분류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KDI의 역대 원장 12명 중 11명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온 사람이다.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강봉균 전 원장(현 열린우리당 의원) 역시 석사학위를 미국에서 받아 넓은 의미에서 100% 미국 학위자라고 볼 수 있다. KDI 내의 박사 학위자 72명 중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는 무려 70명(97.2%)이다. 국내박사는 단 1명.

그러나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KDI를 비롯한 국책연구기관들의 존재감은 날로 약해지는 반면 기업 연구소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특히 삼성경제연구소는 현 정부 들어 ‘2만달러 시대론’ ‘매력있는 국가론’ 등 국가 정책의 큰 밑그림까지 제시하는 등 최전성기를 누리는 중이다.

‘정책지식’이라는 말 자체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처음으로 확립한 개념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최근 펴낸 ‘대한민국 정책지식 생태계’는 삼성경제연구소가 단기과제, 트렌드성 연구에만 능하다는 일각의 절하된 평가를 뒤집었다는 평가다.

이 책은 ‘정책지식’을 ‘정부가 국정에 관련된 의사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지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6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이 책은 정책지식이 만들어져 유통되기까지, 생산자들은 정책화를 염두에 두고 지식을 생산해야 하며 소비자도 생산자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지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특히 “과거 권위주의 시대가 정부 출연 연구소들이 중심이 돼 정책지식을 생산했던 정부의존적 정책지식 생태계가 적합성을 가졌던 때였다면 이제는 기업, 노동자, 시민사회 등 민간 부문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개체들이 인적·지적 교류를 통해 정책지식 생산 경쟁을 하고 더 나은 것이 채택될 수 있는 적절한 선별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일부 국책연구소의 거버넌스를 재설계하고, 독립적인 싱크탱크에 대한 민간 기부 등 지원을 강화하자는 도발적인 제안도 내놓는다.

이 책의 해외 싱크탱크 부분에 도움을 준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학)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이 작업에 1년 이상 시간을 쏟아부은 것으로 안다”며 “이제는 기업 연구소도 기업 차원의 연구를 넘어서 공공적이고 큰 국가 계획을 짜는 시대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강교수는 “국가 주도의 경제 건설 시대가 지나가고 민간 영역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국책연구기관의 시대적 한계는 분명해졌고, 국가기관에서 사회개조나 국가개조에 관련된 ‘그랜드플랜’을 짜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때가 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삼성경제연구소와 KDI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치가 있다. 웹사이트별 방문자 수를 체크하는 ‘랭키닷컴’에 따르면 지난 6일 현재 경제 관련 연구소 웹사이트를 찾는 온라인 방문자들의 72.8% 정도가 삼성경제연구소에 몰렸다. 2위는 LG경제연구원으로 8.3%, 전경련 산하 연구기관이었다가 분리된 자유기업원이 7.1%로 3위였다. KDI 웹사이트 방문자는 3.8%이다.

이에 대해 KDI 국제정책대학원의 한 교수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충격적이다”라고 말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학)는 “KDI가 이렇게 무기력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라며 “정책지식 생산의 주도권이 완전히 기업 연구소로 넘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는 “KDI는 당연히 정부 편을 들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FTA처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어려운 것도 정부 요구대로 생산해내면서 신뢰도가 자꾸 떨어지게 된다. 반면 삼성경제연구소는 당장 일어난 일을 정당화해줘야 할 부담은 없다는 점에서 일반인들에게는 삼성경제연구소가 더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KDI측은 삼성경제연구소의 ‘대중성’과 KDI의 ‘수월성’을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전홍택 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삼성경제연구소의 상업적인 성공은 커뮤니티를 통해 일반인들의 접근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라며 “그것이 외형적으로 삼성경제연구소를 더 크게 보이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의적절하고 기민하게 트렌디한 연구 보고서를 잘 내는 강점은 있지만, 학문적으로 엄밀한 검증 과정을 거치는 국책연구기관의 보고서와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KDI와 달리 외형상으로도 다양한 인적 구성을 보이고 있다. 미국 박사의 비율은 40%선이고, 일본·유럽 박사가 20%, 국내 박사가 40%로 고루 분포돼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형식적으로나마 중립성을 표방하며 일본의 우경화, 대북정책 등 경제 이외의 다양한 이슈에 대한 연구도 진행해 왔다.

하지만 삼성경제연구소의 한계는 자본의 이해를 정당화하는 정책지식을 생산해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KDI가 정부에 대한 연구 자율성이 부족하다면, 삼성경제연구소는 자본에 대한 연구 자율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글로벌경제실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9월 인천대 경제학과로 자리를 옮긴 양준호 교수(경제학)의 말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단기적 과제에 아주 강합니다. 그리고 중립성을 유지하려 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스피드 있게 대응하며 다양한 아젠다를 연구소재로 삼습니다. 저 같이 일본에서 비교적 진보적인 정치경제학을 하고 온 연구자도 받아줄 만큼 열려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경제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 양극화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저의 학문적 신념을 지키려면 삼성경제연구소가 추구하는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저는 그 안에 있는 동안 진보적인 문제의식을 내지 않는 식으로 보고서를 썼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저의 인식, 독점자본과 기득권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전개해 나가지 못했던 거죠. 그런 점은 KDI에 있건 삼성경제연구소에 있건 비슷하다고 봅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1971년 설립 이래 30여년간 국가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지만 최근 삼성경제연구소(SERI) 등 민간 싱크탱크에 밀려 영향력이 떨어지고 있다. 미국은 브루킹스연구소(진보), 헤리티지재단(보수) 등 민간 싱크탱크가 정당과 제휴해 정책을 생산한다.

양교수는 삼성경제연구소에 있던 지난해 7월 정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 반대하는 경제학자 171명의 서명에 이름을 올린 뒤 인천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양교수는 “연봉은 삼성경제연구소에 있을 때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지만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내 사립대학의 한 정치학 교수는 “삼성경제연구소가 다루지 못하는 문제가 딱 두 가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정치 투명성 또는 정치 개혁에 관련된 보고서, 기업지배구조를 정면으로 다루는 보고서”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삼성이 과거 정경유착의 당사자로서 이 주제를 정면으로 조명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직 형성돼 있지 않다”면서 “이 때문에 한국정치학회에서 정치개혁 관련 세미나를 하면 삼성측에서 돈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한국의 정책지식 생산은 정부와 기업이 양분하고 있다. 양질의 인적 자원과 어마어마한 물적 자원이 두 부문에 일방적으로 쏠리고 있음에도 정작 시민들이 필요한 정책지식은 ‘가뭄에 콩 나듯’ 한다. 독립 민간 싱크탱크의 출현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정책지식 생산 능력은 매우 부족하다. 경제개혁연대, 희망제작소, 민주노동당의 진보정치연구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정도가 열악한 물적, 인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이 가운데 지난해 3월 등장한 희망제작소는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정책지식 생산으로 담아내며 새 바람을 몰고 있다.

윤석인 희망제작소 부소장은 “국가와 자본의 정책지식과 정책논리가 아닌 시민사회,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정책지식으로 담아내는 일이 필요하다”며 “국책과 자본 연구소가 국가 아젠다에 치중할 때 우리는 지역 아젠다를 제기하고, 학술보고서나 전문용어와 거대담론이 넘쳐나는 보고서 아니라 잘게잘게 나눠진 과제들에 대한 정책대안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386 세대’ 생활인 120명이 월급의 십일조를 내서 운영 중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도 자본과 국가권력 일변도의 정책지식 생산에 대한 대안으로 나왔다. 손석춘 원장은 “‘개미군단’으로 신자유주의 공룡과 맞서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120명이 내는 십일조만으로는 운영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김헌동 경실련 국책사업감시단장은 “정책이란 건 정당에서 연구 개발해서 유권자들에게 제시해 표와 거래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어떤 정당이 집권해도 재벌 총수 30명을 위한 정책만 생산한다”고 강조했다.

정책지식 생산 측면에서 대학 연구소와 각종 학회들의 기여를 더 늘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양준호 교수는 “정책지식 인프라로서의 학회와 대학 연구소들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슷한 이념과 이론을 갖고 모인 학회나 대학 연구소들이 그간의 이론·학술 중심적인 연구 성향에 정책, 실천적 연구를 병행하며 시민단체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식으로 하면, 상당히 중요한 제3자적인 싱크탱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보수진영과 중도진영이 집권했을 때를 대비해 각각의 진영을 위해 안정적으로 정책지식을 공급해주는 헤리티지재단과 브루킹스연구소가 있는 미국식이 아니더라도 한국적인 정책지식 생산 싱크탱크를 위한 지식인의 역할이 절실하다.

글/손제민·장관순·김종목·사진 김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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