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장하준의 박정희 평가가 잘못된 이유는

자유기업원 / 2011-07-08 / 조회: 1,896       투데이코리아

자유기업원 제공

장하준 교수는 개발경제학의 세계적 대가로 인정받기 위한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바로 모국인 대한민국이 굶어 죽어 가던 나라에서 몇 십 년 만에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직접 겪었던 사람으로서 하는 말 인만큼 그 말을 듣는 다른 세계인들은 훨씬 믿음이 갈 것이다.

장하준은 자신이 직접 겪은 경제성장, 그 중에서도 박정희 시절의 경제성장이 보호 무역과 관치금융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의 또 다른 히트작 <나쁜 사마리아인>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신자유주의 주도자들은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는 기적의 세월 동안 한국이 신자유주의적 경제발전 전력을 추구했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한국 정부는 이 기간 동안 민간 부문과의 협의 아래 특정한 새로운 산업을 선택하고 보호관세나 보조금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형태의 정부지원을 통해서 그 산업이 국제경쟁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성숙할 수 있도록 육성했다.(주1)

사실 장하준의 이런 비판은 국내의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 있다. 한국의 학자들 중에서 60~80년대 박정희 시절을 신자유주의 정책의 시기였다고 말하는 사람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비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란 World Bank 중심의 정통경제학자들을 지칭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주2)

대다수 한국인들은 장하준과 같이 관치경제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1989년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정책 관련 시민단체인 경실련도 관치경제의 청산을 중요한 활동 목표 중의 하나로 삼았다. 시민단체들은 일반적으로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선호하는 성향이 있는데, 그런 시민단체가 관치경제를 박정희 시대의 유물로 보고 청산의 대상으로 삼았을 정도이니 사람들이 박정희 시대를 얼마나 관치경제의 시대로 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60년대 이후 20년간을 시장경제의 시대로 보는 한국의 지식인들 중에는 필자와 더불어 KDI 스쿨의 유정호 박사, 민경국 교수, 복거일 소설가 정도다. 기업과 국민들의 경제생활에 대해서 이런 저런 간섭을 한 것이 분명한 박정희 대통령의 시절을 왜 시장경제의 시대라고 보는지 이제부터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 본 박정희 시대

필자가 박정희 시대를 시장경제의 시대라 하는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경제사에서 박정희의 위치가 중국경제사에서 등소평과 같다고 본다. 지금의 한국 경제와 비교해 보면 중국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생활에 대해서도 통제가 많은 나라이다. 기업을 만들기도 수출, 수입을 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소평이 집권하여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1980년대 이후의 중국은 분명 경제적 자유의 시대, 시장이 살아나기 시작한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등소평 이후의 시대를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즉 80년대 이전의 모택동 시대에서 비해서 자유와 시장의 폭이 크게 확대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등소평 이후의 시대를 자유와 시장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새로운 자유 때문에 중국 경제는 연평균 10%의 성장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박정희 시대의 한국이 정확히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 비해서 경제적 자유와 시장의 폭이 늘었기 때문에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보다 지독한 통제에서 부분적 통제로의 전환이 경제적 자유와 시장을 만들어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이해가 쉬울 수도 있겠다.

정부의 경제에 대한 통제와 간섭은 조선왕조 500년의 본질이었다.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질서가 바로 그것을 의미했다. 개항 및 한일합방을 거치면서 경제적 자유가 늘어나기 시작하다가 1939년 중일전쟁과 더불어 이 땅의 경제는 철저한 명령경제로 바뀐다. 전쟁 물자 동원을 위해 일제는 조선의 모든 것을 전쟁동원 체제로 전환했다. 기업 활동은 정지되었고, 쌀과 그릇까지 공출의 대상이었다. 생필품의 공급은 배급으로 이루어졌다.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과 말은 자유경제, 자본주의가 옳다고 내세웠지만 그것을 실천할 힘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쌀은 정부가 생산자인 농민으로부터 낮은 가격에 공출을 해갔고, 소비자는 정부로부터 배급을 받아야했다. 이자는 시장이율보다 매우 낮은 상태로 규제되었고, 은행 대출도 허가제로 운영되었다.

무역에 대한 통제는 더욱 심했다.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일본과의 교역은 거의 끊긴 상태였다. 수출과 수입은 허가제로 운영되어 정부의 허가 없이는 어느 것도 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지나치게 고평가된 원화 가치 때문에 수출은 해 봐야 남는 것이 없는 장사가 되어 버렸다. 이런 상태가 1960년까지 지속된다. 다시 말해서 1939년부터 1960년까지의 20여년 이 땅의 경제는 명령경제, 통제경제, 배급경제, 폐쇄경제였던 것이다.

박정희가 집권한 직후인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 한국경제의 폐쇄성이다. 1962년부터 수출이 급증하기 시작한다. 제일 큰 이유는 환율의 현실화였다. 그 이전까지의 환율은 수출을 기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낮았다. 그 환율이 차츰 시장환율에 접근해갔고 그것이 수출의 인센티브를 높여 놓은 것이다.

급기야 박정희 정부는 1964년 수입대체를 근간으로 하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출촉진으로 바꾸는 내용의 수정계획을 발표한다. 그리고 많은 정책들을 수출촉진에 맞춰 바꾸어간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대일본 수출이 늘어나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으로 진출해 기업들을 만들어간다. 그 이전까지 거의 작동하지 않거나 또는 매우 미약하던 시장기능이 그래도 박정희 시절부터 작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 수출촉진책과 반공정책, 노력동원체제, 중화학공업 육성 등의 정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수출촉진책은 죽은 시장을 살려내는 수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확대를 두고 정부주도정책의 성과라고들 이야기 한다. 정부가 무엇인가를 했기 때문에 수출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의 작동 과정에 개입한다는 의미에서의 정부주도정책은 아니었다. 수출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기존 정부정책을 완화내지 무력화시키는 차원에서의 정책들이었다.

이 말의 뜻을 이해하려면 그 이전까지 해왔던 수출입 관련 정책들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해방 이후 박정희 시절까지 수출이든 수입이든 거의 길이 막혀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미국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과는 달리 미군정은 1946년 1월과 5월 ‘대외무역규칙’을 통하여 민간의 자유로운 대외무역과 재산의 반출입을 금지하고 정부의 직접 통제 하에서만 해야 한다는 국영무역의 원칙을 공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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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5월 18일 워싱턴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는 박정희 대통령. ⓒ 국가기록원

수출입업자는 정부의 면허를 받아야했고, 수출입 상품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수출입 가격은 정부의 사정을 받아야했고, 수입품 판매대금은 강제예치를 해야 했고, 수출품 구입에만 사용해야했다. 그 나마도 당시의 무역은 물물교환 방식, 즉 바터무역으로 이루어졌다.(주3) 이승만 행정부로 주권이 넘어간 후에도 무역에 관한 정책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수출입에 대한 규제는 지속되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수출까지 규제되었다는 것은 뜻밖이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곡물, 비누, 화학약품, 피혁, 가축 등의 품목은 아예 수출 자체가 금지되었다. 그에 못지않게 수출에 장애가 되었던 것은 환율이었다. 당시 한국정부는 공정환율을 최대한 낮게 책정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유엔군 대여금 때문이었다.

6.25 전쟁에 참전한 UN군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원화자금을 한국정부로부터 대출받은 후 상환은 달러화로 하게 되었다. 한국정부로서는 그렇게 상환 받는 달러화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 최대한 환율을 낮추고 싶어 했다. 그처럼 낮게 책정된 환율이 당시 한국정부의 외화수입을 늘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수출에는 치명적 장애였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우리나라의 수출입은 모두 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1959년부터 수출이 늘기 시작하는데, 그 중 1959년의 수출증가는 일시적인 농산물의 수출증가에 따른 것이었다.(주4) 반면 60년 이후의 수출증가는 주로 제조업 제품, 그 중에서도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제품 수출이 늘어난 덕이다.

1960년 이후의 제조업제품 수출 증가는 정부의 수출촉진정책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문제를 오래 동안 연구해온 KDI 스쿨 유정호 박사의 견해다.(주5) 박정희 집권 직후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이승만 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수입대체’를 기조로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관세만 하더라도 1955년 평균 27%이던 것이 1960년대 초에는 오히려 49.5%로 올라간 후 수년간 계속된다. 이런 상태가 ‘수출촉진’으로 바뀐 것은 1964년 제1차 5개년계획의 보완계획에서부터이다.

그러면 제조업의 수출이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유정호는 환율의 인상을 제일 중요한 원인으로 보고 있다. 대미 달러 공정환율의 경우 1960년 2월에 50:1에서 65:1로, 1961년 1월에 100:1로, 1961년 2월에 다시 130:1로 뛰어 오른다. 일 년 사이에 미국 달러에 대한 환율이 160% 상승함으로써 1950년대 내내 지속되던 원화의 과대평가가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고 유정호 박사는 밝힌다. 이는 한국 제품들의 수출경쟁력이 생겨났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수출은 급등세를 보이게 되면 드디어 박정희 정부는 1964년 수출촉진을 경제개발계획의 근간으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흥미로운 것은 환율 인상의 목적이 수출 확대가 아니라 미국 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주6) 하지만 의도가 무엇이었든 현실화된 환율은 수출의 인센티브에 불을 붙였고, 그 후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국 수출의 역사가 펼쳐진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렇다. 환율 인상은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장면 정부에까지 걸쳐 일어난다. 그것으로 인한 수출확대효과는 박정희가 집권한 1962년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 가능성을 인식한 박정희는 그 후 수출확대를 경제정책의 근간으로 삼게 된다.

그리고 수출이 확대됨에 따라 수입도 따라서 늘게 되고,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한국은 급속히 확대되고 있던 세계시장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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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한국은행 온라인 서비스(2008. 10), 유정호 2008에서 재인용.

개방 선택의 세계사적 의미

환율 인상을 통한 수출 증가가 5.16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해서 한국 현대경제사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기여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우연히 시작된 수출증대 현상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경제정책의 방향을 수출촉진으로 바꾼 것은 당시 세계사적 흐름에 비추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45년을 전후해서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에서 독립을 한다.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흥독립국들이 소위 경제적 주권을 갖게 되면서, 가장 먼저 착수한 조치가 나라의 문을 닫고 수입대체를 통한 자급자족 정책을 추진한 것이었다.

자급자족이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을 지배하던 선진 자본주의국가는 국제 교역을 통해 자신들을 착취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급적 자본주의 선진 국가들과 거래를 하지 않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 간디가 영국 면직물의 수입을 막기 위해 직접 물레를 돌린 것은 신생독립국 주민들의 심리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프레비시 같은 남미 학자들의 종속이론은 수입대체와 자급자족 정책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그런데 박정희의 한국은 수입대체를 통한 자급자족이 아니라 수출지향형 개방정책을 택한 것이다. 또한 굴욕외교라는 오명을 써가면서 국교 정상화를 통해 일본과의 교역을 시작한다. 신흥독립국 중에서 1980년대까지 수출지향형 개방정책을 쓴 나라는 한국과 더불어 홍콩, 싱가포르, 대만의 4개국이다. 그리고 이들 나라는 기적적인 경제발전에 성공한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민족적 자존심을 버리고 내린 개방 결정이 기적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다.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정부의 개입인가?

우리는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정부가 개입한 정책으로 여길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을 정부 개입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정희 정권 초기의 수출촉진책들은 오히려 수출에 장애가 되는 정부정책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환율이 현실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낮은 상태였다. 암달러시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이다. 거기에 덧붙여 수입에 대한 엄격한 제한도 수출을 제약하는 요인이었다. 수입을 제한하면 그것과 경쟁관계의 국산품을 쓰는 수출산업의 경쟁력은 낮아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수입제한은 수출억제 효과를 동시에 가지는 것이다.

한국의 국내시장은 관세 비관세 장벽으로 ‘보호’를 받아왔기 때문에 그로 인해 수출경쟁력 역시 낮은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수출촉진책들은 선진국 제품들에 대한 한국 수출품들의 약한 경쟁력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다. 김광석과 웨스트팔의 연구에 의하면 박정희 당시 수출촉진책의 효과는 보호주의 수입정책으로 인한 수출저해효과를 거의 정확히 상쇄해주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기존의 수입억제 정책들과 비현실적인 환율로 인해서 한국 제품의 수출경쟁력이 낮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가 채택한 수출촉진책들은 낮아져 있던 한국 제품의 경쟁력을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았고, 그것이 수출의 증가에 크게 기여했다.(주7)

네 마리 용의 권위주의 체제와 시장경제

한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 이 네 나라는 개방정책을 택했다는 것 말고도 권위적인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같다. 홍콩은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 총독의 통치 하에 있어서 정치적 자유가 전무했다. 박정희와 장개석과 이광요 역시 독재자였다. 그것과 경제성장은 어떤 관계를 가졌던 것일까.

신생독립국들이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정치적 혼란이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문제가 치안부재와 내전이다. 그런 사정은 네 마리의 용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 역시 수많은 세력들이 서로 으르렁 거리고 있었으며, 직장 내에서 조차도 노동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정상적인 법질서를 위협하는 요소가 도처에 깔려 있었다. 그렇게 될 경우 시장경제의 기본인 사유재산권과 계약의 안정성은 보장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노사 간의 계약이라는 것이 의미를 가지기가 어렵다. 이 네 나라의 공통점은 어떤 식으로든 직장 내에서의 정치투쟁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박정희 역시 반공이라는 국시를 통해 집단행동과 정치논리로 점철될 수 있는 직장 내 질서를 계약에 의해서 작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직장 내에서의 정치투쟁이 아니라 생산 활동에 전념할 있었을 것이다. 또 생산성 높은 근로자들이 많은 보상을 받고 짧은 시간 내에 승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로의욕이 작동할 수가 있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사람들은 박정희 시대의 그 같은 상황을 노동탄압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생산현장이 정치투쟁의 장으로 바뀌는 것을 막는 조치였던 셈이다. 그로 인한 생산성의 증대는 노동자들에게 전반적 임금 상승이라는 열매를 가져다주었다.

박정희가 했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나 노동운동 탄압 같은 조치는 시장의 작동을 가능하고 경제적 자유를 확대하는 조치였던 셈이다.

본격적 시장 개입은 실패로 끝났다

박정희 시절 진정한 의미의 대규모 시장 개입이라고 불릴만한 정책은 1973년부터 시작된 중화학공업 투자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금융지원이었다. 그러는 만큼 나머지 산업들에 대한 자금공급이 줄어들게 되고 전반적인 성장률 저하가 나타난다.

1960년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모든 산업에서의 수출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이었던 데에 비해 중화학공업 정책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수출촉진보다는 해당 산업들의 보호에 더욱 힘을 쏟게 된다. 그 결과로 수출의 전반적이 감소가 초래된다.(주8) 1973년부터 시작된 정부 주도의 무리한 중화학공업투자로 인해 자본의 생산성은 급격히 낮아졌고, 급기야 1979년 4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발표함으로써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박정희와 시장경제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들은 여러 가지의 상반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는 개방정책을 쓰고 노동운동을 억제해서 시장의 원리가 작동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중화학공업으로 잘못된 투자를 유발했고 고교평준화를 강행했으며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해서 의료의 사회주의화를 시작한 장본인이다. 그린벨트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도시토지의 공급부족을 초래했고 그 결과 높은 땅값과 집값의 단초를 제공했다. 세상 어떤 자본주의 국가도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그린벨트 제도처럼 엄격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상반되고 혼란스러운 여러 가지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의미는 그 이전과의 비교를 통해 평가되어야 한다.

정조의 신해통공과 등소평의 개혁개방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미미한 경제자유화 조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당시 그 사회에서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든 자유화조치였다. 박정희 시대도 마찬가지다. 500년을 이어져온 사농공상의 신분질서, 미군정과 이승만 시절까지 이어진 중일 전쟁 이후의 명령경제체제를 극복하고 훨씬 더 많은 시장이 작동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박정희 때이다.

박정희의 성공은 장하준 교수가 말하듯이 보호무역이나 관치 금융, 경제개발계획 같은 것이 아니라 개방과 시장, 계약 같은 것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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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하준(이순희 역), 나쁜 사마리안인들: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부키, 2007, p. 32
2. World Bank, The Asian Miracle: Economic Growth and Public Policy,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3. 이대근, 해방 후-1950년대의 경제: 공업화의 사적 배경 연구, 삼성경제연구소, 2002, pp. 123-24.
4. J. Yoo, How Koreas Rapid Export Expansion Began in the 1960‘s: The Role of Foreign Exchange Rate, Working Paper 08-18, KDI School of Public Policy and Management, 2008.
5. Yoo(2008).
6. Yoo(2008), p. 19
7.김광석·웨스트팔 (공저), 『한국의 외환 무역정책』, 한국개발연구원, 1976
8. 유정호(2009), pp.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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