黨에 떠밀려… 한번 떠볼까 욕심에… 정치인 ‘묻지마 폭로’ 늪으로
《 지난달 11일 대검찰청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장.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의사진행 발언을 신청했다. 그는 “법사위를 근거 없는 의혹 제기의 장으로 활용하는 행태는 우리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며 “자신 있다면 면책특권이 없는 자리에서 얘기하라”고 말했다. 국감에서 여권 인사의 뇌물 수수 의혹을 제기한 박지원 민주당 전 원내대표를 겨냥한 것이다. 》
3년 전 법사위 국감에선 주 의원 자신이 당시 임채진 검찰총장으로부터 똑같은 얘기를 들었다. 주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100억 원대 비자금 의혹과 임 총장의 ‘삼성 떡값’ 수수 의혹을 제기했고, 임 총장은 “지금 바깥에 나가서 기자들에게 제가 뇌물을 먹었다고 발표하라. 면책특권 뒤에서 말씀하지 마시라”고 말했다.
다음 날 한 라디오에 출연해 의혹을 거듭 주장한 주 의원은 지난해 10월 명예훼손 혐의를 인정받아 서울중앙지법에서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았다.
○ 면책특권은 ‘거짓 폭로’의 보호막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정치 1번지’이자 ‘거짓말 공화국 1번지’다. 거짓 폭로가 난무하는 이유는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관하여 국회 외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면책특권이라는 보호막이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2007년 “명백히 허위임을 알면서도 허위의 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는 면책특권 대상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한계를 규정했지만 그동안 국회에서 터져 나온 폭로가 처벌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
주 의원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사회의 감춰진 부분을 드러내는 것도 국회의원의 임무”라며 “다만 정치적으로 책임질 각오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 출신인 그는 “정치인은 의혹 앞에서 항상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다”며 “검사일 때는 수사를 한 뒤 확신이 설 때만 기소를 했지만 국회의원은 수사권이 없어서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권의 자정이 쉽지 않은 만큼 괴담 수준의 말을 옮기는 의원에 대해서는 유권자가 심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지도부의 ‘하청’과 소영웅주의의 합작품
‘묻지 마 폭로’가 당 지도부의 ‘작품’인 경우도 적지 않다. 지도부가 폭로거리를 갖고 있다가 대정부질문이나 국감 때 초·재선 의원들에게 “해보라”고 종용한다. 지시에 따를 경우 공천이나 당직에서 인센티브가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초선인 한나라당 A 의원도 “2009년 당의 핵심 인사가 ‘내 방에 자료가 한 가득 있으니까 한번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당시 경제 관료들의 론스타 관련 의혹 자료였다.
당시 한나라당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표적 경제공약인 ‘금융과 산업 분리 완화’를 위해 법 개정을 추진했고, 야당은 “재벌에 은행을 주는 법”이라며 반대했다. 여권으로서는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할 ‘불쏘시개’가 필요했던 셈이다. A 의원은 “고심 끝에 그동안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밝혀진 것 없는 의혹을 다시 제기하기는 위험하다고 판단해 거절했다”고 말했다.
일부 의원의 소영웅주의와 지역구 유권자를 의식한 ‘노출 강박증’도 허위 폭로를 부른다.
실제 3선 이상의 중진 의원 가운데 초·재선 시절 상대 당이나 주요 정치 인사에 대한 ‘저격수’로 활약하며 주목을 받은 이가 적지 않다. 제기한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 사실 여부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폭로에 참여한 대부분의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그 의혹은 밝혀지지 않았을 뿐 사실이다”라고만 주장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치권 내부의 검증 기능이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주당의 한 전직 의원은 “예전에는 ‘○ 의원 심했어, 그만해’라고 충고해주는 중진 의원들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지도부도 이를 자제시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 의혹은 빠르고 진실은 더디다
정치권의 ‘묻지 마 폭로’는 특히 선거 국면에서 증폭된다.
상대 진영에 대한 ‘흠집 내기’가 표심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선 2002년 병풍 의혹을 제기해 대선 판도에 결정적 영향을 줬던 ‘김대업 학습효과’가 있다. 선거 기간 제기된 의혹의 진실은 선거가 끝난 뒤 한참 뒤에나 밝혀지거나 묻히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네거티브 선거로 얼룩졌던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한 후보의 캠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한 인사는 “선거판에서는 ‘진실이 신발을 신는 사이 거짓은 동네 두 바퀴를 돈다’는 말이 통한다”면서 “루머는 확산되기 쉬운데 짧은 선거 운동 기간 이를 진실로 밝히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대학원생 박선희 씨(30)는 “‘손가락이 12개다’와 같은 황당한 주장이 아니라 있을 법한 얘기이다 보니 사실이든 아니든 특정 후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 그 후보의 이미지에 영향을 준다”면서 “선거가 끝난 뒤 고소, 고발이 이뤄지고 판결이 나더라도 관심이 안 간다”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광우병 촛불’ 직·간접 피해 3조7513억 ▼
온 사회를 뒤흔든 거짓말은 종종 국민에게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청구’한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려 죽는다’는 괴담으로 촉발돼 서울을 마비시켰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경제연구원(KERI)이 2008년 9월 25일 발표한 ‘촛불시위의 사회적 비용’이란 보고서에 따르면 첫 촛불집회인 2008년 5월 2일부터 100번째 집회가 열린 같은 해 8월 15일까지 100회의 촛불집회가 유발한 사회적 비용은 3조7513억 원으로 추산됐다. 이는 2007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0.4%에 달하는 액수다. 사회적 비용 중 상인들의 영업 손실 등 직접피해 비용은 1조574억 원, 사회 불안정 등에 따른 간접피해 비용은 2조6939억 원으로 나타났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물론 촛불집회 주최 세력들은 “악의적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촛불집회의 중심이었던 서울 광화문 일대 상인 172명은 ‘광우병 대책회의’ 등 촛불집회 단체들을 상대로 “물질적, 정신적 손해를 봤다”며 18억4300만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기도 했다. 당시 재판부는 “업소마다 매출 감소율이 다르고 시민단체들이 시위 당시 상인들에게 영업상 손실이 발생할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요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한 ‘제2 촛불집회’가 유발하는 사회적 비용은 얼마나 될까. KERI 관계자는 “한미 FTA 비준안 처리 여부가 결정돼야 사회적 비용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1차 촛불집회의 사례에 비춰볼 때 대외신인도 등 거시경제 부문에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고 예측했다. 각종 선거철 공약도 엄청난 혼란과 사회적 비용을 야기해왔다. 이명박 대통령이 올해 4월 백지화한 동남권 신공항은 엄밀한 경제적 분석을 생략한 채 표를 얻기 위해 내놓은 공약이 얼마나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 대통령은 대선 때 동남권 신공항을 ‘지방성공시대의 의미, 통합을 위한 약속’으로 규정했지만 집권 후 신공항 사업을 차일피일 미뤘다. 영남권 지방자치단체들이 대선 공약 이행을 요구하자 정부는 경제성 분석작업에 착수했고 결과는 경제성이 없는 걸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부는 민심 이반을 우려해 동남권 신공항 포기 선언을 미뤘으며 결국 현 정부 여당의 텃밭인 영남권에서 반정부 집회가 벌어지고 수도권과 호남에서는 역차별 우려를 제기하는 등 전국을 사분오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백지화 직후 4월 1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논평을 내고 “신공항 공약 백지화로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지역갈등이 조장됐다”며 “정치권은 무분별한 개발 공약에 대한 폐해 방지와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정호 자유기업원장은 거짓말과 공약에 따른 사회적 비용 발생에 대해 “사람과 말을 신뢰하기 어려운 사회일수록 경제활동에 제약을 받고 그만큼 국민이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이 증가한다”며 “말이든 공약이든 투명도를 검증하고 책임을 지우는 사회적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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