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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 복거일 편저 에프케이아이 펴냄. |
“우리는 왜 고르게 가난한 삶을 선택해야 하는가?” 올해 초 한 일간지에 실린 환경
잡지 광고의 제목인데, 보는 순간 섬찟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종철 씨가 발행하는 ‘녹색평론‘의 지향점을 암시해주는데, 그 카피 아래의 작은 활자는 한 술 더 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그 옛날 공산당 선언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극단적 생태주의로 달려가는 환경운동이란 아차 하면 반(反)자본주의, 반 시장
경제로 치달을 수 있다. 그때 폰카로 찍어둔 광고문은 이렇다.
“‘녹색평론‘은 자본주의 산업문명 체제 자체의 근원적인 어둠을 근저로부터 묻고 (질문을 던지고), 그럼으로써 살아있는 인간정신을 끊임없이 증언하고자 하는 자유로운 정신들 사이의 상호교류에
이바지하려는 참된 의미의 비판적 공기(公器)이기를 지향해 왔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근원적인 어둠”있다?문장이 좀 길고
비비 꼬여있지만, 쉽게 말해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는 ‘근원적인 어둠‘이 있는데, 그걸 몰아내고 ‘고르게 가난한 삶‘을 목표로 살자는 제안이다. 얼핏 들으면 솔깃하고, 내용을 알고 나면 아찔한데, 평등주의를 앞세우는 좌파 민중주의 정서(사회주의 계급사관과 닮은꼴이다)가 한국사회의 대세다. 특히 젊은 층과 지식사회의 절대적 기준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심지어 청소년 어린이용 책까지 이런 류의 책이 새로운 흐름을 장악하고 있다.
정치권도 기꺼이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에 매달리는데, 이 와중에 새 책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복거일 편저, 에프케이아이 펴냄)를 읽는 것은 이런 흐름을 끊기 위한 의미 있는 성찰작업이다. 엮은이의 지적처럼 분명 자유주의란 헌법에 명문화된 한국사회의 구성원리인데,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규정하는 이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주의가 문제다.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로 이뤄지는데, 보통선거와 대의민주주의 등 정치적 자유주의는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시장경제를 앞세우는 경제적 자유주의에 사람들은 고개를 젓기 일쑤다. 대부분은 개인의 경제활동을 사회적으로 규제하는 게 정의롭고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이런 섣부르고 잘못된 상식에 반대하는 21명의 글을 모은 게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이다. 읽어내기 부담스럽진 않다. 대한민국 대표 자유주의자들 개개인의 이념적 여정을 담은 에세이집이기 때문이다.
필자 21명이 자유주의자의 길을 선택한 배경은?이영훈 교수(서울대), 안재욱 교수(경희
대학교 부총장), 김행범 교수(부산대), 현진권
소장(한국경제연구원 사회통합센터), 최승노 박사(자유경제원 사무총장) 등이 필자인데, 그들의
고백은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모인다. 왜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자라고 하면 개인주의나 이기주의 등의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리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까? 지난 달 이 지면에서 인터뷰한 소설가 복거일 선생의 말대로
삼성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끊임없이 공격하는 이들이 수두룩할까?
한국에서 가장 발달한 기업형태이자, 경쟁이 제대로 작동하는 가장 진화된 기업이 대기업인데, 그 대기업이 무너지면 경제적 재앙은 물론 시장경제의 원칙 자체를 못 지킨다. 반대로 사람들은 아주 짧은 생각으로 정글 자본주의가 어떠니 하면서 사람들 귀에 쏙 들어오는 평등과 정의의 구호를 외치곤 한다. 이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필자 21명은 자유주의자의 길을 선택했는데,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건 어린 시절부터 제도와 규제의 틀 속에서 선택의 자유를 제한 받는 것이 싫어 조금씩 그것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유주의자가 되었거나, 대학 시절 누구나 그러했듯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에 심취했으나 소련의 붕괴를 목도하고, 경제와 사회 문제에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자유주의를 선택하게 되었거나 등의 다양한 경로가 있다. 이런 자유주의 여정에는 미제스와 하이에크, 프리드먼 등 다양한
경제학자들이 등장하고, 개발시대의 한국사와 저자의 개인사, 가족사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1980년대 지식사회의 좌편향 풍토를 다시 보는 재미그래서 이 책은 경제적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책이면서, 의외로 풍부한 개인적 고백이 어우러지고 있다. 좌향좌에 매달렸던 1980년대 지식사회의 풍토를 보는 지적 재미도 없지 않다. 에세이의 주인공 스물 한 명 모두 걸어온 길은 제각기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어떤 현상을 보고 판단할 때 사회적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는 길일지 주도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다수의 우리들은 대중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구호에 쉽게 동조하고, 분배의 정의를 외치고 있지만, 사회적 소수가 분명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과 사회 모두 자유주의를 통해 발전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걸 함축한 게 이 책 프롤로그의 이 한마디인데 쓸쓸하지만 울림이 있다.
“우리 사회의 전통은 시장에 호의적이지 않다. 상업을 천시하고 관리를 선망하는 뿌리 깊은 풍조, 기업가정신의 박약, 정부부문의 꾸준한
확대와 시장부문의 축소, 자본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깊은 반감, 재산권에 불충분한 보호, 기업활동에 대한 지나친 규제…. 이런 환경에서 자유주의자가 되어 시장경제를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념적 무임승차자로 살아가는, 편한 길 대신 굳이 사회적 소수로 살아온 것은 도덕적 차원의 성취다. 그래서 여기 실린 글마다 성취감이 배어있다.”
이 책의 맨 앞을 장식한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경우 학계의 중진이고, 여러 모로 대표성이 있으니 그의 고백을
유심히 들어볼 가치가 있다.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1997년 IMF를 기점으로 그는 자유주의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전향은 거의 10년 전, 즉 민중주의 바람이 가장 높던 무렵인 1987년 6월 민주화대항쟁 직후 오랜 축적으로 거쳐 시작됐다. 당시만해도 그는“여전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언저리를 머뭇거리고 있던”(19쪽) 차였고, 운동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사 연구를 하면 할수록 마르크스 경제학이 허구적이라는 깨우침을 얻게 됐다.
국사학계가 예나 지금이나 도그마로 떠받들던 자본주의 맹아론도 허구에 다름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18~19세기 조선조 중후기에 내재적인 발전이 있었고, 그게 한국적 자본주의의 싹이라고 봤지만, 정확히 거꾸로가 진실이었다. 쉽게 말해 18~19세기 조선조는 시장이 극도로 위축되고 경제가 침체한 사회였다. 그건 조선왕조가 망해가는 지름길이었다. 그는 그걸 이렇게 쉽게 요약한다.
조선 후기 자체적 자본주의 발전이 있었다는 허구“결국 18~19세기 조선왕조 경제사는 시장이 발전하면 그 사회와 국가는 흥하고, 시장이 찌그러지면 그 사회는 망한다는 아주 상식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진리를 대변하는, 다른 무엇보다 훌륭한 교과서였다.”(23쪽)
그렇다면 우리 근대사의 치욕인 일제 식민지 전락이란 조선조라는
역사 실패의 결과물로 봐야 옳다. 또 있다. 서양 근대가 만들어낸 자유주의는 유감스럽지만 일제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제도화됐다는 걸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남은 하나, 대한민국 건국과 더불어 비로서 자유주의는 국가체제로 온전히 성립됐다. 즉 자유주의는 도입 역사가 100년 남짓에 불과하고, 상처투성이인 상태다. 이에 대한 국민적 이해와 실천은 여전히 낮은 것도 그 때문일까?
사실 시장과 경쟁이 인류사에 등장한 것은 지난 200~300년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다. 인류사를 24시간으로 보자면, 시장경제가 꽃핀 지금은 겨우 23시 58분이라고 봐야 한다. 더구나 한국인의 심성에는 전통 성리학의 영향과 민족주의 그리고 평등주의(민중주의)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자유주의가 뿌리 내리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영훈 교수는 말한다. “한국 자주의자들은 문명사의 대전환을 이끄는 창조적 소수”이며, 그걸 지속적으로 사회 구석구석에 전파하고 실천해 갈 필요가 있다고….
밝히지만, 이 책을 읽는 것은 시장경제에 대한 이 사회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문제가 있는 정도를 넘어 젊은이들은 반기업정서로 가득하다. 한국사회 구성원리이자 원칙이 홀대 받고 있고, 그게 실물경제에까지 악영향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 뿌리를 추적해보자는 생각에서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를 집은 것이다.
한국사회 좌파는 정말 힘이 세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좌파 정서와 구호가 지배적인 사회로 남아있다는 걸 그들도 알고, 반대진영의 우리도 가늠한다. 1980년대 이후 그들이 문화권력을 쥐고 있으며, 이에 따른 지식과 정보의 왜곡현상이 문제인 상황인데, 새 책의 등장은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적지 않은 심정적 위로가 됐고, 좌파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지는 경험도 했다. 이 정도 단행본이 지속적으로 나와만 준다면, 이 정도의 진실 유통량을 늘일 수 있다면, 일방적인 너무도 일방적인 지식정보 오염 현상을 차단해주는 효과가 없지 않을 것이다.
글/조우석 문화평론가